교루=벌써 5년이 지났구나. 이런 생각이 들었다. 5년이 지났지만 어제 벌어진 일처럼 눈앞에 선하다. 어린 학생들이 사고로 세상을 떠나지 않았다면 지금은 뭘 하고 있을까. 나처럼 중간시험을 고민할까. 기회가 생기면 꼭 학생들에게 “무서워하지 말아요. 곧 누군가가 와서 구할 거에요”라고 말하고 싶었다. 손을 잡고 “이제 우리 집에 가자”고 말하고 싶었다. 물론 이런 기회는 오지 않을 것이다. 다시는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기를 바란다.배말한=오늘은 세월호 5주기다. 다시 생각하면 너무 슬프고 안타깝다. 시간이 지났지만 어제 일 같다.
권예인=나는 중학교 3학년이었다. 후배들은 하루 전날, 수련회와 수학여행을 떠났다. 학교는 조용하고 어두웠다. 그래서인지 유난히 흐렸던 날로 기억한다. 수업 중에 속보를 들었다. 옥상에서 제발 바람이 그쳤으면 하는 마음을 나눴다. 오늘은 수업을 일찍 마친 교수님께서 함께 기억하는 하루가 되길 바란다는 말씀을 전했다. 답답한 마음과 달리 하늘은 청명하기만 하다. 이제야 바람이 불지 않는다. 김세령=잊지 않겠습니다. 다섯 번째 이 글을 쓰며 회의감이 들었다. 무엇을 잊지 말아야 할까. 5년의 시간이 기억하겠다는 다짐을 반복하게 했지만
“왜 쳐 이 XX아!” “내가 친 거냐? 뒤에서 민 거잖아!”욕설과 고성이 오가자 대학생 권정연 씨(24)는 깜짝 놀랐다. 뒤를 돌아봤더니 두 여성이 상대방 머리채를 잡고 몸싸움을 벌였다. 작년 12월 우이신설선 보문역에서 벌어진 일이다.“승객끼리 싸우는 모습을 자주 봤어요. 사람이 너무 많아서 열차를 몇 대씩 보낼 정도거든요.” 권 씨는 우이신설선으로 통학하는데 열차를 제때 타지 못해 수업에 늦을 때가 적지 않다. 2019년 2월 27일. 출근 시간대 우이신설선은 여전히 혼잡했다. 오전 8시부터 8시 3
학교마다 강의 자료를 지정도서나 참고도서로 정해 모아놓는다. 학기 초가 되면 학생들이 앞 다퉈 대학도서관을 찾는 이유다.서울대 자유전공학부 김수연 씨(21)는 도서관을 찾지 않는다. 앞이 아예 보이지 않는 전맹(全盲) 시각장애인. 흰 종이와 검은 글씨를 구별할 수 없어 일반도서를 읽지 못한다. 이번학기에 김 씨는 수업을 따라 가기 위해서 교재 3권 및 수업 자료들을 대체자료로 만들어야 한다.대체자료는 일반 도서를 장애인이 이용하도록 만든 자료다. 보통 두꺼운 종이에 6개의 점이 찍힌 점자책을 생각한다. 이외에도 ▲텍스트를 음성으로
올해는 성수대교 붕괴 25주기, 씨랜드 화재 20주기, 세월호 침몰 5주기가 겹친다. 세 가지 재난의 희생자는 대부분 학생이다. 정부, 사회, 어른이 잘못해서 소중한 생명을 잃었다.은 의식과 시스템을 본질적으로 바꾸지 않아서 비극이 되풀이되는 문제를 다루려고 연중기획을 시작했다. 지금까지 19회를 게재했는데 당분간 멈추려 한다.기획을 구체화하다가 생각하지 못한 점을 알았다. 세월이 지나도 재난은 과거가 아닌 현재라는 사실. 당사자들은 벗어나지 못했다는 사실. 극복이라는 말 자체가 어려움을 준다는 사실.학생들이 취재를
고영환 씨는 팽목항에서 고장 난 기계를 고친다. 주민은 쌀이나 양파를 건넨다. 농작물이 필요하면 아무 때나 뽑아 가라고 말한다. 집을 비우면 주민은 고 씨의 진돗개 팽이와 목이의 밥을 챙긴다.단원고 2학년 8반 고우재 군의 아버지. 팽목항에 혼자 남은 유가족. 고 씨에게 세월호는 과거가 아닌 현재다. 그는 사고 5일 만에 아들 우재 군을 찾았다. 경기 안산으로 돌아갔고, 회사에 복귀했다.하지만 아들이 계속 생각나서 2014년 11월 팽목항으로 돌아왔다. 이유를 묻자 가장 먼저 미안함이란 단어를 꺼냈다. 아이를 빨리 찾고 돌아가서 다
벨 소리가 시끄럽게 울렸다. 잠결에 휴대폰을 들었다. 딸이 아르바이트에 오지 않았다고 했다. 그러면서 중앙로에 사고가 났다는 말을 덧붙였다. 대구지하철참사 희생자대책위원회의 황명애 사무국장은 2003년 2월 18일을 이렇게 기억했다. 그는 대구지하철 화재로 딸을 잃었다.대구 중앙로역에 현황판이 마련됐다. 사망 192명. 한 줄 한 줄 내려가며 딸을 찾았다. 한상임. 비슷한 이름이 보이면 심장이 떨어지는 듯 했다. 이곳에 이름이 있어야 좋은가, 없어야 좋은가. 혼란스러웠다. 몇 번을 확인했지만 딸의 이름은 없었다.새 이름이 현황판에
비가 추적추적 내리는 날. 학교에 도착하니 교무주임이 뛰어 들어왔다. 다리가 끊어졌는데 안전하게 왔냐고 물었다.TV를 틀었더니 성수대교 속보가 계속 나왔다. 가슴이 철렁했다. 학교에 출근하며 매일 오가는, 방금 전에 건넌 다리가 무너졌다니.서울 성동구 무학여고의 이대영 교장은 당시 강남구 압구정고에 근무했다. 비가 와도 학교행사를 계속한다고 알리려고 평소보다 일찍 학교에 오면서 사고를 피했다.사고로 49명이 추락해 32명이 숨졌다. 이 중에서 8명이 무학여고 학생이었다. 이 교장은 무학여고에 부임하면서 해마다 추모제를 열었다. 어른
단편영화 ‘기념촬영’은 1997년 개봉됐다. 성수대교 사고로 단짝 친구를 잃은 무학여고 학생, 수진(김세연)의 시점에서 흘러간다.자신은 간발의 차로 살았지만 많은 친구를 잃었다. 3년이 지나 다리가 1급 교량으로 다시 태어난 날, 훌쩍 자란 주인공과 여전히 교복을 입은 친구가 함께 나온다. 영화는 과거와 현재를 15분 동안 오가며 사고를 환기시킨다.영화를 만든 정윤철 감독을 2월 20일 서울 강남구의 사무실에서 만났다. 그는 ‘기념촬영’이 살아남은 자의 트라우마를 다뤘다고 설명했다.살아남은 자의 슬픔을 통해 사고를 잊지 말아야 한다
출근길의 다리 위, 기몽서 씨(58) 앞에 먼지 자욱이 일었다. 강북에서 강남으로 건너가던 중이었다. 앞에 가던 덤프트럭에서 나오는 줄로 생각하고 속도를 줄이지 않았다. 엄청난 굉음이 울렸다.기절했다가 깨어났더니 운전석 창문으로 물이 출렁거렸다. 깨진 유리 틈으로 교각이 보였다. 조수석 문을 밀어 겨우 나왔다. 다리에서 튀어나온 철근에 앞바퀴가 걸려서 한강에 완전히 빠지지 않았다.허리가 잘린 다리, 자신을 내려 보는 사람들, 물에 빠진 차량, 찌그러진 버스. 그때서야 상황이 이해됐다. 다리가 무너졌고, 자신은 한강에 떠있다! 기 씨
형은 서울 성동구 성수동의 사무실에 가려고 아침 일찍 나섰다. 그런데 출근하지 않았다는 연락을 받았다. 느낌이 안 좋았다. 뉴스를 보니 성수대교가 무너졌다. 1994년 10월 21일.16번 버스에 탔던 김중식 씨를 동생 학윤 씨(53)는 다시 보지 못했다. 기자는 서울 성동구청 총무과를 통해 학윤 씨의 연락처를 얻으려고 했다. 그가 성수대교 유가족 대표라서 대화를 나누고 싶었다.성동구청 관계자는 개인정보라서 알려줄 수 없다고 했다. 인터뷰 요청을 전달이라도 해달라고 부탁했더니 학윤 씨에게서 전화가 왔다. 피해자가 계속 말해야 사회가
성수대교는 1994년 10월 21일 내려앉았다. 차량 6대, 승객 49명이 함께였다. 그 중 32명이 세상을 떠났다. 이승영 씨는 당시 21세였다. 서울교대 3학년으로 교생실습을 가던 길이었다.유품인 일기장에서 이 씨의 버킷리스트가 나왔다. 한 명 이상의 아이 입양하기, 복지 마을 만들기, 이동도서관 짓기…. 가족은 소원을 대신 이루겠다고 다짐했다. 25년이 지난 지금, 승영 씨의 꿈은 어떻게 됐을까. 가족은 어떻게 지낼까. 남동생 이상엽 씨(44)를 만났다.“열네 가지 중에서 여덟 가지 정도 이뤘어요.” 가족은 보상금
씨랜드 유가족 김순덕 씨는 한국에 왔을 때, 전남 진도의 팽목항을 찾았다. 미수습자 5명의 사진을 봤다며 말을 잇지 못했다. 그러면서 김 씨는 재난을 연구하고 교육하는 분을 만났다고 했다. 한국재난안전기술원(이하 기술원)의 송창영 이사장이었다.그를 만나러 서울지하철 1호선 신길역 근처의 사무실로 갔다. 2월 25일 오전이었다. 송 이사장은 기자를 만난 뒤에는 작년 12월 백석역의 온수관 파열사고와 관련해 연합뉴스와 인터뷰를 한다고 했다.김순덕 씨와 만난 계기부터 물었다. 송 이사장은 재난을 연구하는 사람으로서 함께 분노하고 아픔을
김순덕. 1986년 아시안게임 필드하키 금메달리스트, 1988년 서울올림픽 필드하키 은메달리스트. 태극기에 자부심을 갖고 필드를 달렸다. 어느 날 뉴질랜드로 이민 갔다. 훈장은 반납했다. 씨랜드 유가족에 대해 검색하면 그의 이야기가 가장 많다. 2014년 세월호 사고 직후에 중앙일보가 기사를 썼다. CBS 라디오의 전화 인터뷰도 있다. 어떻게 사는지 궁금했다. 필드하키라는 단어와 함께 이름을 입력했다. 작년 12월 문재인 대통령이 뉴질랜드를 국빈방문해서 동포간담회를 가졌을 때, 옆에 앉았다고 한다. 뉴질랜드의 한국대사관에 김 씨의
세월호가 침몰했다. 2014년 4월 16일, 온 국민이 충격에 빠졌다. 이미례 씨(52)도 텔레비전을 통해 지켜봤다. 믿을 수 없는 장면. 일하다가 눈물을 참지 못하고 밖으로 뛰쳐나갔다. “우리보다 열 배는 더 컸을 거라고요. 그 슬픔이. 그런 걸 공감하니까 또 그게 내 일인 거예요. 나는 내 아픔보다, 그 부모들 아픔이 얼마나 더 클 건지를 알아요.” 머릿속에서 세월호의 잔상이 지워지기 전에 캠프에 갔던 아이들이 죽거나 다쳤다는 뉴스를 들었다. 우울증과 공황장애가 찾아왔다. 최근 두 달 사이 구급차를 다섯 번이나 탔다. 이 씨는
이장덕 씨(60)는 경기 화성군청의 부녀복지계장이었다. 씨랜드 화재로 수사를 받다가 수첩을 공개했다. 건축물 및 시설의 인허가를 둘러싼 유착관계와 부당한 압력이 드러나 진상규명과 책임자 처벌에 영향을 미쳤다. 지금까지 이 씨는 언론의 취재요청을 거절했다. 자신이 나오고 옛날 일을 상기시키면 부모들의 가슴이 더 아플 거라는 생각에서였다. 의 기획취지를 설명하자 처음으로 인터뷰에 응했다. 남편과 함께 2월 26일, 경기 수원의 노보텔앰배서더 1층 커피숍에 나왔다. 그는 현장을 살펴보니 도저히 허가를 내줄 수 없는 상태였다
딸을 잃었다. 엄마는 죄의식에 시달린다. 맞벌이를 하느라 유치원에 가는 아이의 등을 떠밀고 모질게 대했던 스스로를 떠올리며 자책한다. 상점주인은 사고가 일어나던 시각에 별 모양의 브로치를 달았던 아이가 앞을 지나갔다고 중얼거린다. 엄마는 캠프 가던 날, 아이 옷에 묻은 초코시럽을 지우던 순간을 떠올리며 상점주인이 브로치로 착각했다고 생각한다. 실낱같은 희망을 가슴에 품고 엄마는 날마다 아이를 찾으러 길을 돌아다닌다. 하성란 작가(52)는 씨랜드를 다룬 소설에서 이 부분을 가장 강조하고 싶었다고 기자에게 말했다. 하 작가는 서울예대
소식을 처음 알린 곳은 군청과 경찰서가 아니었다. 아이들을 함께 보낸 막내처제의 전화를 받고 수련원에 불이 났다는 사실을 알았다. “도착하니까 소방관들이 바리케이드 쳐놓고 못 들어가게 하고, 현장이 장난이 아니에요. 화이트보드에 사망자 명단을 써놨는데 우리 세라 이름이 딱 있는 거예요. 그땐 뭐…. 우리 집사람은 졸도하고. 아무 생각 없었죠. 아무 생각이….” 이상학 씨(54)는 그렇게 일곱 살 딸, 세라를 보냈다. 1999년 6월 30일. 분향소는 서울 송파구 잠실동의 강동교육청 지하 1층이었다. 거기서
이미례 씨(52)는 피아노를 조율하던 집에서 아이를 만났다. 대인기피증이 있다고 했다. 아무하고도 얘기를 하지 않고, 학교에서는 고개만 숙인다고 했다. 심리치료의 내용을 떠올려 한 마디를 했다. “너는 말이 없는데 글을 참 잘 쓰겠구나.” 그리고는 기다렸다. 먼발치에서 바라보다가 아이가 옆에 다가와 피아노를 만졌다. 이 씨는 다시 한 마디를 했다. “원래 말 잘하는 아이들은 글을 못 써. 말을 안 하는 아이들은 글로 표현을 참 잘하지?” 아이가 또 말을 했다. “아줌마가 그걸 어떻게 알아요? 나 우리 학교에서 두 번째로 글 잘 쓰는
위령(慰靈)은 죽은 사람의 영혼을 위로하는 의식이다. 성수대교는 1994년 10월 21일 붕괴했다. 해마다 이 날이면 유가족은 피해자의 넋을 기린다. 성수대교 북단의 위령비에 모여서. 위령제는 어떻게 진행할까. 유가족회 김학윤 대표는 하루 전, 다른 유족과 함께 꽃시장에 들른다. 음식을 직접 준비한다. 20년 넘게 했던 일이다. 추도사도 김 대표가 낭독한다. “처음에는 많이 바꿔가면서 썼어요. 그런데 어느 정도 지나니까 크게 바꿀 내용이 없더라고요. 매년 날짜나 주기 정도를 바꾸죠.” 한 시간 가량 위령제를 지내면 또 그렇게 1년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