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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난과 인간 (18) 유족의 상담
김태언 기자 | 승인 2019.03.31 20:11

 

벨 소리가 시끄럽게 울렸다. 잠결에 휴대폰을 들었다. 딸이 아르바이트에 오지 않았다고 했다. 그러면서 중앙로에 사고가 났다는 말을 덧붙였다. 대구지하철참사 희생자대책위원회의 황명애 사무국장은 2003년 2월 18일을 이렇게 기억했다. 그는 대구지하철 화재로 딸을 잃었다.

대구 중앙로역에 현황판이 마련됐다. 사망 192명. 한 줄 한 줄 내려가며 딸을 찾았다. 한상임. 비슷한 이름이 보이면 심장이 떨어지는 듯 했다. 이곳에 이름이 있어야 좋은가, 없어야 좋은가. 혼란스러웠다. 몇 번을 확인했지만 딸의 이름은 없었다.

새 이름이 현황판에 계속 올라갔다. 시간이 지나면서 사망자는 남/여로 적히기 시작했다. 나중에는 이름도, 성별도 없는 채로 기록됐다. 누가 누군지 구분이 되지 않을 정도로 타버렸기 때문이다. 황 사무국장은 좌절했다. 딸은 이 세상에 없었다.

소방본부는 유해수습을 종료한다고 다음날 밝혔다. 딸의 죽음을 받아들이지 못할 때였다. 지하철공사 직원과 육군 50사단 장병 등 250여 명이 현장을 물청소했다.

유골과 유품이 쓰레기더미에서 발견됐다. 어느 유족은 “나는 원래 정부 발표를 신뢰하는 사람이었는데, 이때 처음으로 믿으면 안 되겠다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소방본부는 1300도 이상 고열에 타버려 DNA가 검출되지 않는다고 했다. 그러면서 유족이 피해정황 증거를 만들어오라고 했다. “생각해보세요. 내 자식이, 내 엄마가 여기서 죽었다고 가족이 스스로 증명하라는 거예요. 처절한 심정이 말로 전해지겠냐고요.”

황 사무국장은 딸과 다녀온 곳을 들렀다. 가방을 샀던 가게, 안경을 맞췄던 안경원, 엑스레이를 찍었던 병원. 딸과의 대화가 떠올랐다. 그리고 이제 혼자라는 사실이 서러웠다. 눈물이 나오지 않는 날이 없었다.

지난 16년을 되돌아보며 유족에게 가장 중요한 점으로 그는 신속하고 정확한 수습과정을 꼽는다. “아무리 좋은 트라우마센터를 만들어준다 해도 소용없어요. 진실이 밝혀지지 않으면 울분은 그대로인데, 트라우마가 어떻게 없어진다는 거죠?”

대구지하철 화재사고 11년이 되던 해, 세월호가 침몰했다. 황 사무국장은 화재사고 유족 5명과 팽목항에 갔다. 2014년 4월 22일이었다. 재난현장을 다시 보는 게 두려웠지만 유족이 더 걱정됐다.

두 사고는 비슷했다. 대구지하철에서는 불길이 번지는데도 “안에서 대기하라”는 방송이 나왔다. 세월호에서는 침몰이 시작됐는데도 “가만히 있으라”는 방송이 나왔다.

황 사무국장 일행은 수습과정을 문서화하라고 세월호 가족대책위원회 집행부에 조언했다. 하지만 세월호 유족은 외부인을 경계했다. “저희처럼 정부에서 나온 사람 말고는 쉽게 믿을 수 없었겠죠.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어요. 마음이 너무 힘든 상황이니까. 우리도 그랬으니까.”

몇 개월이 지나 세월호 유족에게서 전화가 왔다. 그들은 진상규명에 답답해했다. 대구지하철참사 희생자대책위원회의 윤석기 대표는 팽목항에서 하지 못했던 말을 전했다. 위로와 함께 “무엇보다 피해자 간 갈등은 피해야 한다”고 조언했다.

같은 시각, 팽목항을 헤매는 다른 사람이 있었다. 한국어린이안전재단 고석 대표. 1999년 씨랜드 화재로 6살 쌍둥이를 잃었다. 그는 유족의 사무실에 명함을 놓고 왔다. 발길이 향하기에 왔지만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6시간 동안 먼발치에서 바라보다가 떠났다.

▲한국어린이안전재단 고석 대표(출처=한국일보)

고 대표는 유족이었기에 아무 일도 섣불리 할 수 없었다고 말했다. 20년 전에도 많은 이가 위로했다. 누가 누구인지, 누가 찾아왔는지 알 수 없는 상태였다. 그럼에도 몇몇 목소리는 깊은 상처를 남겼다. 세월이 약이다, 이미 벌어진 일 어떡하겠느냐, 운명이라고 생각해라….

세월호 유족은 진상을 규명하기 위한 특별법을 제정하라며 2014년 7월 14일 단식농성에 들어갔다. 고 대표는 힘을 보태고 싶었다. 대구지하철 화재, 태안 해병대캠프 실종, 춘천 마적산 산사태 유족에게 전화해서 뜻을 모았다.

대구지하철 유족과 씨랜드 유족은 국회 앞에서 만났다. 2014년 8월 12일, 재난안전가족협의회가 출범했다. 인천 인현동 호프집 화재(1999년), 마적산 산사태(2011) 등 7개 참사의 유족이 모였다.

이에 앞서 2014년 6월 24일 집담회를 갖고 협의회를 만들기로 의견을 모았다. 윤석기 대구지하철참사 희생자대책위원회 대표, 이후식 태안참사유가족모임 대표와 함께 고석 씨가 공동대표를 맡았다.

협의회는 연락체 수준이었지만 활동범위는 넓었다. 세월호 유족이 국회에서 농성할 때 동참했고, 서명운동을 지원했다. 경주 마우나오션리조트 체육관 붕괴, 장성노인요양병원 화재 때는 현장에서 상담을 했다.

▲재난안전가족협의회 출범식 (출처=레디앙)

유족이 특히 강조한 부분은 트라우마를 공유하고 치유하는 공간이었다. 당시 35일 동안 국회에서 지내면서 의원 7명과 논의했지만 현실화되지 못했다.

이후식 공동대표는 여전히 이 공간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재난안전가족협의회는 단순한 사고 처리반이 아니었습니다. 유족의 말 속에 국가의 안전이 가야할 길이 있다는 걸 알아주셨으면 합니다.”

3년이 지난 올해, 이들은 제2의 재난안전가족협의회를 추진하는 중이다. 고 대표는 주축이 되는 유족은 따로 없다고 했다. 다만 협의회를 법인화해서 조직적으로 활동하고 싶어 한다.

고 대표는 지금까지 수많은 참사를 마주했다. 2017년에는 중국 웨이하이시 유치원 통학버스 화재 사고에서 유치원생을 잃은 부모가 찾아왔다. 유족은 하나 같이 사고시점에 머물렀다.

“정부의 직무 유기예요. 이대로라면 유족은 사회에서 버림받은 존재가 돼요.” 그는 유족이 사고 후에 사회로 빨리 복귀하도록 하는 시스템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고 대표도 사실은 씨랜드 당시에 멈춰 있다. 참사를 볼 때마다 1999년으로 되돌아간다. 재난이 발생하면 과거 일이 떠오른다. 세월호 때도 그랬다. 팽목항에서 자신의 아이들이 세월호에 갇힌 듯이 보였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매년 기억해주시는 분들께는 감사하지만, 잊혔으면 해요. 이제 그만 이런 일이 일어났으면 좋겠어요.” 참사가 잊히기를 바라는 말이 아니라 참사가 일어나지 않기를 바란다는 말로 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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