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월호가 침몰했다. 2014년 4월 16일, 온 국민이 충격에 빠졌다. 이미례 씨(52)도 텔레비전을 통해 지켜봤다. 믿을 수 없는 장면. 일하다가 눈물을 참지 못하고 밖으로 뛰쳐나갔다.
 
“우리보다 열 배는 더 컸을 거라고요. 그 슬픔이. 그런 걸 공감하니까 또 그게 내 일인 거예요. 나는 내 아픔보다, 그 부모들 아픔이 얼마나 더 클 건지를 알아요.”
 
머릿속에서 세월호의 잔상이 지워지기 전에 캠프에 갔던 아이들이 죽거나 다쳤다는 뉴스를 들었다. 우울증과 공황장애가 찾아왔다. 최근 두 달 사이 구급차를 다섯 번이나 탔다.
 
이 씨는 스트레스로 심장이 수축했다는 진단을 받았다. 언제 쓰러질지 모르는 상황에 대비해 비상약을 갖고 다닌다. 의사는 감정이 격해지는 상황을 피하라고 당부했다.
 
하늘나라의 딸이 떠오를 때면 복받치는 감정을 가라앉히기 위해 일에 더 매달렸다. 뭔가에서 벗어나려고 집중하는 순간에는 잊는다고 했다. 그렇게 20년 동안 몸을 혹사시켜서 정신적으로나 육체적으로 많이 약해졌다.
 
“그래도 나는 이 일을 한 걸 후회 안 해요. 애 아빠가 너 죽으면 피아노 한 대 묻어줄게 그래요. 어떨 때는 대한민국의 피아노를 다 없애버리고 싶다고.”
 
이 씨는 사람을 대하듯 피아노에 최선을 다했다. 딸 찬형이를 잃고 힘들 때 새로운 삶을 주고, 상처를 치유하는 데 도움을 줬기 때문이다.
  
“내가 아이들에게 도움을 줄 수 있다는 거. 밖에서 또 다른 엄마들을 치유해줄 기를 준다는 거. 그것 때문에 더 행복한 거예요. 그러면서 치유를 받고, 또 치유를 하고, 힘 받고.”
 
▲이미례 씨가 피아노를 조율하는 모습 (사진제공=이미례 씨)
이상학 씨(54)는 기도밖에 할 수 없었다고 했다. 어른의 부주의 때문에 일어나서는 안 되는 일이 일어났다고 말할 때는 얼굴이 일그러졌다.
 
“육지 같았으면 소방차로 불 끄고 도와줄 수 있는데 망망대해 바다잖아요. 그거 보니까 진짜 구할 수 있는 상태도 아니고. 그거 보면서 우리는 기도밖에 할 수 없었지. 제발 좀 살아서 나와라. 우리 아이들 사고 났을 때 심정이랑 비슷하게 진짜 억장이 무너지고.”
 
이 씨는 씨랜드 때의 진상규명 문제를 떠올렸다. 딸 세라를 위해 제대로 진상규명을 하지 못해서 평생의 한이 된다며 울분을 터뜨렸다.
 
유족은 무허가 시공업자가 시설을 지었고, 완공 이후 몇 차례 누전으로 작은 화재가 났다는 이야기를 주민들로부터 들었다. 국립과학수사연구소는 “모기향불이 옷가지와 이불 등 인화성 물질에 옮겨 붙어 불이 났을 가능성이 높다”고 공식발표했다.
 
▲ 씨랜드 화재원인을 밝힌 국립과학수사연구소의 공문 (출처=씨랜드 참사 백서)
이 씨는 자신과 다른 아이들을 위해 할 수 있는 일을 찾았다. 10년이 지날 즈음, 입양기관을 알아보고 신청서류를 준비했다.
 
“처제들은 뭐하려고 그렇게 하냐고 했어요. 왜? 어때? 예쁘게 잘 자라주고 키워주면 내 자식인데 똑같은 거 아니냐고 했죠.”
 
어린 나이에 부모의 돌봄을 받지 못하는 아이를 보면 하늘나라에 외롭게 있을 세라 생각이 난다고 했다. 아픔을 겪으니 다른 사람의 상처가 더 잘 보이게 됐다고. 상황이 허락되면 입양을 하고 싶은 마음이다.
 
김지윤 씨(26)는 대학생이었다. 세월호를 지켜봐야 했던 기간이 유독 힘들었다고 한다. 수많은 학생의 희생을 목격하면서 옛날 일이 떠올랐다.
 
“저는 씨랜드 때 너무 어렸지만 세월호에서 살아남은 친구들은 고등학생이었잖아요. 제가 겪은 고통이나 충격보다 더 클 것 같다는 생각을 많이 했어요. 지금 세월호 생존자들이 대학생이 됐을 나이인데 생존자들에 대한 고려도 필요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요.”
 
김 씨는 사람들에게 조금이라도 경각심을 주고 싶어서 <스토리오브서울>의 인터뷰 요청에 응했다고 말했다.
 
“이런 인터뷰가 사회적으로 어떻게 영향을 미치고 얼마나 지속이 될지는 모르겠지만, 너무 운이 좋아서 안 일어난 거지, 누구한테나 다 일어날 수 있는 상황이잖아요. 사람들이 나에게도 일어날 수 있는 일이라는 생각을 하게 돼서 관심을 좀 더 갖게 되면 나중에는 좋아지지 않을까요.”
 
그는 친구들을 생각하면 더 책임감을 느낀다고 했다. 어떤 추억이 있었는지는 정확하게 기억나지 않아도 자기가 그들에게 마지막 친구였으니, 친구들 몫까지 많이 하는 사람이 됐으면 좋겠다고 자주 생각했다. 이 말을 하면서 눈물을 흘렸다.
 
▲ 김지윤 씨가 인도 남부의 학교에서 벽화를 그리는 모습 (사진제공=김지윤 씨)
김 씨는 고등학교 3년 내내 복지관에서 봉사를 했다. 공부로 바쁘더라도 매주 한 번씩은 꼭 찾아 갔다. 처음부터 큰 뜻을 가지고 시작하지는 않았지만 꾸준히 하다 보니 대학교에서도 이어졌다고 한다.
 
세계의 다양한 곳에서 도움을 필요로 하는 사람을 만나기 위해 2012년 여름에는 인도 남부의 첸나이(Chennai) 지역을 찾았다. 위생이나 문화와 관련된 교육봉사를 하고 아이들을 위해 벽화를 그렸다.
 
“봉사를 하면서 나만 이 사람을 돕는 게 아니고 내가 이 사람을 보면서도 깨닫는 게 많았어요. 내가 받았던 감사함을 느끼면서, 그 사람들한테 많이 마음을 주고 그러면서 나도 마음을 많이 받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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