팔레스타인 희생자를 추모하는 행사가 17일 서울 종로구 보신각 앞 광장에서 열렸다. ‘팔레스타인과 연대하는 한국 시민사회 긴급행동’(긴급행동)이 주최했다.행사 이름은 ‘팔레스타인에 자유와 평화를! 모든 희생자를 애도하는 신발들의 시위.’ 전국에서 보낸 신발 3000 켤레가 희생자를 상징했다. 한 뼘도 안 되는 어린이 신발 위의 국화가 눈길을 끌었다.기자회견은 오전 10시 시작했다. 이스라엘의 가자지구 폭격을 비판하는 발언이 이어졌다. 가족, 친지의 신발 50켤레를 모아 기증한 고교생 진영인 양(18)은 “어린 나이에 끔찍한 환경에
국제원자력기구(IAEA)는 일본이 후쿠시마 오염수를 방류해도 별 문제가 없다는 결론을 내렸다. 여러 나라 정부도 IAEA 판단을 믿는다고 밝혔다. 그럼에도 반대 목소리가 계속 나온다. 이유는 무엇일까?경희대 정재학 교수(원자력공학과)는 해양 방류보다 방사성 핵종 수증기 방출 방식이 더 적합하다고 주장한다. 그는 정 교수는 한국원자력안전기술원(KINS)에서 20년 근무했고, 한국방사성폐기물학회 부회장을 맡고 있다.기자는 정 교수를 8월 12일 화상으로 인터뷰했다. 그는 수증기 방출 방식이 이미 미국에서 원전 사고 후 오염수를 처리한
후쿠시마 오염수 보도는 방류 영향을 받는 국가의 언론에게 민감한 이슈다. 잘 보도하면 국민의 올바른 판단과 여론 형성에 도움이 되지만, 그렇지 않으면 정반대 결과가 나타난다.해외 주요 매체는 이 문제를 어떻게 보도했을까. 취재팀은 ‘좋은저널리즘연구회’의 도움을 받아 해외 언론의 관련 보도를 비교분석했다. 대상은 방류 영향을 받는 미국과 태평양도서국포럼(PIF) 주요 4개국, 중국, 한국, 방류 당사국인 일본 등 8개국의 21개 매체다.미국 언론으로는 뉴욕타임스(NYT) 워싱턴포스트(WP) 월스트리트저널(WSJ) 로스앤젤레스타임스 U
정당은 유권자를 대변한다. 정부 결정을 지지 또는 비판하고, 정부가 놓치거나 잘못한 점이 있으면 시정을 요구한다.후쿠시마 오염수 방류는 최소 30년 이상 국민 건강은 물론 국가 경제, 국제관계에 영향을 미칠 중대사안이다. 오염수 영향을 받는 국가의 정당이라면 정부 결정을 살펴 적절히 대응해야 한다.취재팀은 각국 정당이 후쿠시마 오염수 방류에 어떻게 대응하는지 알아보기 위해 태평양 연안 10개국 의회에서 의석을 가진 정당 73개를 전수조사했다.국가별로는 미국 캐나다 호주 뉴질랜드 피지, 파푸아뉴기니 대만 필리핀 그리고 한국과 일본이다
방류 중인 오염수의 방사성 물질이 국제안전기준을 밑돈다는 국제원자력기구(IAEA)의 모니터링 결과가 9월 10일 현재 실시간으로 공개된다. 하지만 한국에서는 방류 반대 목소리가 강한 편이고, 한국 정부의 대응이 부족하다는 지적이 계속 나온다. 다른 나라는 어떨까?김경옥 한국해양과학기술원 연구원에 따르면 후쿠시마 바로 앞이 (방사능 수치가 가장) 높고, 미국과 캐나다, 북쪽에 있는 쿡제도 등 일부 PIF 국가, 필리핀과 대만, 마지막으로 중국과 한국순으로 영향을 미친다.북태평양에 접한 국가가 받는 영향도가 비슷하지만, 해류 일부만 대
인천 중구 운서동의 이글종합물류. 1500평 창고에 ‘Aid-Material/Turkiye(구호물품/튀르키예)’라고 적힌 박스가 가득했다. 2월 6일 규모 7.8 강진을 겪은 튀르키예에 보낼 구호품이다.벽에는 ‘구호물품 접수처’라고 적힌 종이가 보였다. 전국에서 보낸 기부 물품이 모이는 곳이다. 주한튀르키예대사관이 지정했다. 이곳에서 분류 작업을 하면 터키항공이 비행기에 실어 튀르키예로 보낸다.기자가 2월 15일 이곳에 갔다. 봉사자가 오전 9시부터 하나둘 나타났다. 대부분은 튀르키예인과 한국인이다. 사흘째 봉사 중인 엘리프 메셰
독일 국회의원인 마가레테 바우제는 온라인 거짓 정보에 4년 넘게 시달려왔다. 한 남성이 페이스북에서 이민 문제에 대한 그녀의 발언을 왜곡해 퍼트렸기 때문이다. 지난 3월, 이 남성의 집에 경찰이 찾아왔다. 이 사람은 독일 사정당국으로부터 벌금형을 통보받았다. 벌금은 1,400유로(한화 약 200만원)였다. 뉴욕 타임스는 지난 9월 23일 ‘온라인 혐오 발언으로 경찰이 방문할 수 있는 곳’(Where Online Hate Speech Can Bring the Police to Your Door)이라는 제목의 기사를 게재했다. A4 용
지난 7월 23일, 야나 파샤예바 로이터 통신 피디를 화상 중계를 통해 만났다. 윤세영 저널리즘 스쿨 특강에서였다. 그는 모스크바 국립 대학에서 언론학 박사 학위를 취득했고, 러시아 경제지 코메르산트 라디오국과 슬레이트 매거진에서 경력을 쌓았다. 지난해 12월부터는 로이터 통신 모스크바 지부에서 비디오 프로듀서로 일한다. 정치, 사회, 우크라이나 사태 등의 속보와 기획 기사를 주로 다룬다. 유튜브 구독자 233만 명을 보유한 러시아의 언론인 이리나 시호만의 비디오 프로듀서이기도 하다. 유튜브 저널리즘은 언론 규제가 강한 러시아에서
“저는 우크라이나라는 아름다운 독립 국가에서 태어났습니다. 그리고 더 아름다운 독립 국가인 우크라이나에서 성장해가길 희망합니다.” 한국에 있는 올랴 쉐스타코바 씨(28)의 러시아 침공 규탄 연설이다.기자는 3월 18일 저녁 6시 50분, 서울지하철 1호선 시청역에서 내려 덕수궁 돌담길을 지나 정동제일교회에 도착했다. 집회 장소인 교회는 주한 러시아 대사관 앞이었다.집회를 주최한 ‘우크라이나 평화행동’ 관계자가 촛불과 우크라이나의 평화를 지지하는 내용을 담은 스티커를 나눠줬다. 이 모임은 전쟁에 반대하고 평화적 해결을 촉구하는 한국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침공하고 일주일이 지난 3월 3일. 서울 중구 주한러시아 대사관 앞에서는 러시아를 규탄하는 시위가 이어졌다. 대사관 앞 경비는 삼엄했고, 경찰 뒤로 보이는 대사관 문은 굳게 닫혔다.대사관 앞에는 우크라이나 국기를 상징하는 파란색과 노란색을 배경으로 만든 포스터를 들고 시민 10여 명이 시위를 했다. 포스터에는 ‘전쟁 반대’, ‘Stop War’ ‘Putin Out’ 같은 문구가 보였다.시위에 참여한 안중규 씨(61)는 “러시아의 행동이 도를 넘었다”고 지적했다. 그는 러시아가 학교와 병원 같은 민간 시설을 공격
크로아티아는 1991년 유고슬라비아 사회주의연방공화국으로부터 독립을 선언했다. 이후 정치 사회 경제 개혁에 집중하면서 여러 국가와 외교 관계를 수립했다. 한국과는 1992년 수교했다.운영비 문제로 크로아티아는 주일 대사관이 한국 업무를 담당토록 했다. 2011년 박희태 당시 국회의장이 크로아티아를 방문했을 때, 양국 투자와 관광 교류 증대를 위해 대사관 상주를 요청하면서 2018년 주한 대사관의 문을 열었다. 대사관은 서울 중구 퇴계로에 있다.이웃 국가인 세르비아는 연방 유지를 원했다. 두 나라의 대립은 전쟁으로 이어졌다. 이후 크
서울 종로구의 주한 핀란드 대사관을 10월 30일 찾았다. 뻬까 메쪼(Pekka Metso) 대사는 전날, 경북 안동에 다녀왔다. 그는 안동대에 가서 안동의 미래 산업과 녹색성장, 핀란드와의 교류 확대에 대해 이야기를 나눴다고 했다.한국은 지역 균형 발전을 고려할 필요가 있다고 기자가 말하자 메쪼 대사는 공감했다. 핀란드는 수도 헬싱키가 크게 발전했지만 다른 지역도 비슷한 수준이 되도록 기반 시설을 발전시킨다고 했다.핀란드의 힘은 신뢰에서 나온다. 메쪼 대사에 따르면 국민 80%는 정부에 대한 신뢰가 높다. 자기가 내는 세금이 제대
미얀마 군사 쿠테타가 2월 1일 발생하고 200일이 넘었다. 미얀마 민주항쟁이 어떤 배경에서 시작되어 현재 상황까지 오게 됐는지 당사자의 증언을 통해 정리하는 영상을 제작하고자 했다. 항쟁의 큰 줄기에 대한 이야기를 미얀마인의 입을 통해 들어보자.
탈레반이 8월 15일 아프가니스탄 수도 카불을 점령했다. 대통령은 외국으로 달아났다. 대전에 사는 미르와이스 씨(25)는 이 소식을 접하고 하루 종일 울었다. 이후에 하루 3시간도 잠을 자지 못했다. 기자와 만난 날에는 8월 23일 새벽에는 두 시간만 잤다고 했다.그는 휴대폰을 손에서 놓지 못한다. 카불의 가족이 페이스북으로 메시지를 보내기 때문이다. 가족이 걱정돼 아무 일도 못한다고 했다.미르와이스 씨는 3년 전 한국에 왔다. 사업을 하겠다는 꿈이 있었다. 지금은 바뀌었다. 가족과 외국에서 정착하기를 희망한다. 어느 나라든 상관없
미얀마의 군사 쿠테타 이후에 계속되는 시위는 1980년의 광주 민주화운동을 떠올리게 한다. 광주 오월 어머니회와 미얀마 청년이 만나 사진을 매개로 서로의 감정을 교류하고 과거와 현재를 기억하고자 한다. 같은 아픔을 가진 한국인으로서, 같은 역사를 공유하는 한국인으로서 미얀마에 조금이라도 힘을 보태고 싶었다.
전남대 정문은 1980년 5월 18일, 학생 300여 명의 함성으로 뒤덮였다. 휴교령이 내려진 첫날이었다. 공수부대는 양쪽으로 10명씩 서서 정면을 응시했다. 뒤에는 M113 장갑차가 보였다.“밀어내!” 학생들이 학교 안으로 들어가려 하자 계엄군의 곤봉과 군홧발에 아수라장이 됐다. 학생들은 구호를 외치며 전남도청으로 향했다. 광주민주화운동의 서막이었다.미얀마 양곤거리에는 2021년 2월 7일, 구슬픈 노랫소리가 울려 퍼졌다. 캔자스 밴드가 1977년에 발매한 ‘Dust in the wind’를 개사한 노래다.많은 시민이 세 손가락을
눈앞에서 시민이 죽는다. 누구는 분노를 느끼며 거리로 나가고 누구는 공포감에 사로잡혀 집에 남는다. 그들은 슬픔과 무력감을 느끼며 하루를 보낸다. 거리로 나간 이들의 목소리는 뉴스에 나오지만 집에 남은 이들의 이야기는 듣기 힘들었다.스토리오브서울 취재팀은 지인을 통해 미얀마 청년 8명을 소개받았다. SNS로 55일 동안 이야기를 들었다. 어느 날은 인터뷰를 하는데 통화가 갑자기 끊겼다. 친척 집에 다녀오겠다던 취재원은 2주 동안 연락이 두절됐다. 그들은 매일 총소리를 듣는다고 말했다.미얀마 만달레이 중심부에 사는 또우다(23)는 4
‘사랑도 명예도 이름도 남김없이 / 한평생 나가자던 뜨거운 맹세~.’4월 11일 오전, 서울지하철 3호선 옥수역 일대에서 ‘임을 위한 행진곡’이 울려 퍼졌다. 옥수역 근처에는 주한 미얀마 대사관의 무관부가 있다. 용산구 한남동의 미얀마 대사관과 별도로 군부 업무를 담당한다. 미얀마 민주주의 네트워크가 2월 초부터 근처에서 집회를 한다.현장에서 만난 미얀마인은 아무도 익명을 요구하지 않았다. 얼굴이 나온 사진을 사용해도 괜찮다고 했다. 위험하지 않으냐는 질문에 쩌탁(31)은 “미얀마에서는 아이들도 총 맞고 죽는다. 우리가 무서울 건
스토리오브서울 취재팀은 미얀마인을 찾아 페이스북으로 친구를 신청했다. 모르는 문자로 쪽지가 왔다. ‘안녕하세요’라는 뜻임을 나중에 알았다.미얀마 상황을 취재하기는 쉽지 않았다. 미얀마어는 네이버 번역 서비스(파파고)에서 지원하지 않는 언어다. 그러던 중, 미얀마의 만달레이 외국어대에서 한국어를 전공하는 학생 린과 연락이 닿았다.린은 인터뷰가 가능한 현지인을 소개하겠다고 말했다. 이후 취재팀과 주고받은 메신저를 캡처해서 자신의 페이스북에 올렸다. 게시물이 4시간 만에 1000회 이상 공유되면서 미얀마 곳곳에서 연락이 왔다.미얀마를 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