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순덕. 1986년 아시안게임 필드하키 금메달리스트, 1988년 서울올림픽 필드하키 은메달리스트. 태극기에 자부심을 갖고 필드를 달렸다. 어느 날 뉴질랜드로 이민 갔다. 훈장은 반납했다.
 
씨랜드 유가족에 대해 검색하면 그의 이야기가 가장 많다. 2014년 세월호 사고 직후에 중앙일보가 기사를 썼다. CBS 라디오의 전화 인터뷰도 있다. 어떻게 사는지 궁금했다.
 
필드하키라는 단어와 함께 이름을 입력했다. 작년 12월 문재인 대통령이 뉴질랜드를 국빈방문해서 동포간담회를 가졌을 때, 옆에 앉았다고 한다. 뉴질랜드의 한국대사관에 김 씨의 메일 주소를 물었다.
 
대답을 기다리는 동안, 김 씨가 중식당을 운영한다는 사실을 현지 한인매체에서 찾았다. 구글 맵으로 연락처를 알았다. 전화를 여러 번 했지만 부재중 신호만 나왔다.
 
다음 날, 대사관에서 연락처를 받아 전화로 인터뷰를 했다. 1월 30일이었다. 한국에서 휴가를 보내고 뉴질랜드로 막 돌아왔다고 했다. 유가족과의 통화라서 긴장했는데 기자를 안심시키려는 듯 밝고 반가운 목소리로 인사를 했다.
 
동포간담회 얘기를 먼저 꺼냈다. 헤드 테이블에서 대통령 옆자리에 앉은 이유를 듣고 싶었다. 문 대통령이 김 씨의 이야기를 듣고 자리를 정한 것으로 안다고 했다. 많은 교민이 김 씨 가족을 보듬어줬지만 남편에게는 상처와 고통이 여전했다.
 
“애 아빠는 그분의 인간미를 제일 좋아하는 면으로 꼽았어요. 문 대통령님도 고난이 많으셨지 않나요. 그래도 그걸 다 이겨내고 열심히 하신다고 생각이 많이 바뀌었어요.”
 
▲ 김순덕 씨가 동포간담회에서 문재인 대통령과 만난 장면(출처=KTV 국민방송)
남편이 변하면서 2년 전부터는 가족 분위기가 더 좋아졌다. 둘째 아들은 씨랜드 사고에서 형을 잃고 나서부터 우울증이 심했다. 병원에 가자고 해도 싫다고 했다. 세월호 사고 직후에 한국에서 전화가 오면 어쩔 줄 몰라 했다.
 
지금은 좋아졌다. 전에는 얘기를 꺼내기조차 겁이 났지만 마음속으로만 간직하면 더 힘들다고 판단해서 지금은 형에 대해 물어보고 싶으면 물어보라고 한다. 둘째도 이겨보겠다고 했다.
 
한번은 둘째와 막내가 여행을 다녀왔다. 하늘로 간 큰 형이 있었으면 자기는 안 태어났다고 막내가 말하자 “하늘로 간 형이 있었어도 너는 태어났을 거야”라고 둘째가 말했다고 한다.
 
김 씨가 가족에게 항상 하는 말이 있다. “나중에 세월이 지나면 우리도 첫째 앞으로 갈 텐데, 잘 살고 왔다고 이야기할 정도로 열심히 살고 가자.”
 
20년이 지났지만 아직도 마음속에 첫째 아들은 7살로 남아있다고 김 씨는 말한다. 그런 김 씨에게 어머니는 “오늘 하루 다 끝날 일이 아니니까 오늘 하루 다 힘들어하지 말아라”라고 했다. 김 씨 어머니는 김 씨 위의 아들을 잃었던 경험이 있다.
 
▲ 김순덕 씨 가족
어머니가 유가족으로서, 유가족인 딸을 위로했듯이 김 씨는 세월호 유가족을 위로했다. 그리고 아들의 기일이 되면 주변의 자폐아 가족에게 식사를 대접했다. 10년 가까이 했던 일이다. 김 씨는 한국이 싫어서 떠났다는 기사내용은 사실이 아니라고 말했다.
 
“사건 처리과정의 미흡한 점 때문에 총리께 제대로 해달라고 말씀드렸던 거잖아요. 애들이 실수로 모기향을 건드려서 불이 난 것처럼 결론이 나서. 애들을 두 번 죽이는 것 아닌가요. 저희가 힘이 있나요 뭐가 있나요. 세월호도 그러지 않았을까 싶어요.”
 
훈장도 정부가 싫어서 반납하지는 않았다고 했다. 하늘로 간 아들에게 아무것도 해줄 수 없는 엄마에게 훈장이 무슨 소용이 있나 하는 마음이 들었다고 했다. 생각과 다르게 나오는 기사 때문에 처음에는 <스토리오브서울>과도 인터뷰를 하지 않으려 했다고 말했다.
 
김 씨 가족은 원래 뉴질랜드에 살았다. 남편의 일 때문에 잠깐 한국에 돌아왔다. 씨랜드 화재는 그 기간에 일어났다.
 
“한국에 들어간 지 1년도 채 안돼서 큰 애가 그렇게 된 거에요. 그래서 서둘러서 다시 돌아오게 됐어요. 한국에서 더 살 수 있었는데 그런 것(씨랜드 화재) 때문에 (이민)시기가 앞당겨졌다고 볼 수 있죠.”
 
그는 인터뷰 직전에 한국에서 휴가를 보냈다. 김 씨 부부의 부모 병환으로 각자 찾은 적은 있지만 같이 들어 온 건 처음. 필드가 그립지 않느냐는 말에 김 씨는 크게 웃으며 대답했다.
 
“우리나라 대표팀이 뉴질랜드에 와서 가끔 시합하면 가서 봐요. 보면 너무 새로워요. 내가 가서 뛰어도 될 것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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