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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난과 인간 (7) 편지
최은지 기자 | 승인 2019.03.10 22:02
 
소식을 처음 알린 곳은 군청과 경찰서가 아니었다. 아이들을 함께 보낸 막내처제의 전화를 받고 수련원에 불이 났다는 사실을 알았다.
 
“도착하니까 소방관들이 바리케이드 쳐놓고 못 들어가게 하고, 현장이 장난이 아니에요. 화이트보드에 사망자 명단을 써놨는데 우리 세라 이름이 딱 있는 거예요. 그땐 뭐…. 우리 집사람은 졸도하고. 아무 생각 없었죠. 아무 생각이….”
 
이상학 씨(54)는 그렇게 일곱 살 딸, 세라를 보냈다. 1999년 6월 30일. 분향소는 서울 송파구 잠실동의 강동교육청 지하 1층이었다. 거기서 40일 간을 다른 유족과 같이 지냈다.
 
그 해 8월 8일, 강릉 주문진에서 배를 타고 나가 아이들을 바다에 뿌렸다. 이후 몇몇 유족과 문정동의 동사무소 2층에 사무실을 차리고 진상규명에 나섰다.
 
국립과학수사연구소의 시신확인 작업은 1주일 만에 마무리됐다. 연락을 받고 이 씨는 다른 아빠들과 같이 갔다.
 
“우리 세라가 세일러 문을 너무 좋아했거든요. 중간 정도 보니까 세일러 문 잠옷이 위에서부터 다리까지 타다가 잔해가 붙어 있더라고요. 그거 보고 우리 세라라는 걸 딱 알아봤어요. 다른 사람은 누가 누군지 몰라요.”
 
시신은 아빠들이 확인하러 들어갔다. 엄마들이 이 모습을 보지 않았다는 사실에 한편으로는 안도했다. 아이의 마지막을 보면서 이 기억을 평생 가슴 속에 혼자 묻고 가겠다고 결심했다.
 
▲ 기자와 만난 이상학 씨
이 씨는 밖에 나가기 전에 가스밸브를 수십 번 확인한다. 가족이 먼저 나가도 반복해서 확인하는 모습에 대해 어느 때는 병처럼 느껴질 때가 있다면서 쓴 웃음을 지었다.
 
사고 이후 딸이 생겼다. 갓 태어난 아기의 모습이 세라와 판박이였다고 했다. 세라가 다시 태어난 듯했다고. 지금도 막내에게 위안을 얻지만, 세라는 아직 마음에서 떠나보낼 수 없는 아픈 손가락이다.
 
“우리 세라 유품, 유치원 다닐 때 그림 그리고, 글씨 쓰고, 엄마 아빠 사랑해요, 그런 거 안 버리고 다 그대로 있어요. 사고 전 날 수영복 입고 찍은 사진, 캠프파이어 하면서 찍은 사진 있잖아요. 지금도 소주 한잔 먹고 저녁 때 다 자고 그러면 액자 꺼내 놓고 가끔 보면서 울 때도 있거든요. 못 버리겠더라고요.”
 
이 씨는 진상규명을 위해 유족 사무실 일을 돕다가 생계에 복귀했다. 뷔페의 주방실장으로 일하는 중이다.
 
김지윤 씨(26·가명)는 나이가 어려 심각성을 알지 못했다. 학교생활에 큰 지장을 받지 않았다. 하지만 시간이 흘러 당시 일을 알면서 얼마나 불행하고 힘들었는지를 깨닫게 됐다.
 
▲ 김지윤 씨는 씨랜드 화재의 생존자다 (사진제공=김지윤 씨)
유치원에는 다섯 살부터 일곱 살까지 나이별로 3개 반이 있었다. 일곱 살 어린이 18명이 들어간 301호에서 불이 나서 모두 숨졌다. 김 씨는 원래 301호에서 자야 했는데, 인원이 차서 친구 몇 명과 302호로 갔다가 사고를 피했다.
 
생존자 치료는 외상위주였다. 정신과 상담은 짧고 형식적인 수준에 그쳤다. 트라우마는 청소년기에 더 심해졌다. 중학교 사춘기 시절, 갑자기 밀려오는 죄책감과 미안함에 너무나 괴로웠다.
 
“소방차 소리가 들리면 보통 사람은 그냥 소방차가 지나가는구나 생각하는데 저 같은 경우는 저게 우리집이면 어쩌지 하면서 현실같이 느껴요. 커서도 (그런 생각이) 계속 있었어요. 조금만 타는 냄새가 나도 심장이 떨리고 집중이 안 되고 그렇게 되더라고요.”
 
김 씨를 더 힘들게 하는 굴레는 생존자에 대한 시선이었다. 살아남았으니 감사해야 한다는 말. 그는 힘들어도 힘든 티를 낼 수 없었다. 기자에게 가명을 요청한 이유다.
 
하지만 유가족을 앞에 두고 힘들다고 생각하면 안 된다며 스스로를 다잡았다. ‘내가 뭘 힘들어. 나는 감사한 거지.’ 이런 말을 스스로 계속 되뇌면서.
 
▲김지윤 씨가 유치원 친구들에게 보냈던 편지 (사진제공=김지윤 씨)
김 씨는 카이스트 석사과정을 마치고 최근 LG에 신입사원으로 입사했다. 유족과는 자주 교류한다. 특히 유족대표였던 고석 씨(55)와는 인연이 깊다.
 
고 씨의 쌍둥이 딸과 같은 유치원을 다니고 같은 아파트에 살았다. 부모와 아이들끼리 모두 친하게 지내던 사이. 김 씨의 어머니는 해마다 추모식을 찾았다. 생존자와 가족 중에서는 유일했다. 김 씨는 성인이 되면서 부모와 함께 참석했다.
 
고 씨는 어려운 일을 겪고도 씩씩하게 공부해서 기특하다고 김 씨를 칭찬했다. 고 씨는 2000년 한국어린이안전재단을 만들어 지금까지 대표로 활동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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