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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난과 인간 (19) 유족의 봉사
박진희 기자 | 승인 2019.03.31 20:12

 

고영환 씨는 팽목항에서 고장 난 기계를 고친다. 주민은 쌀이나 양파를 건넨다. 농작물이 필요하면 아무 때나 뽑아 가라고 말한다. 집을 비우면 주민은 고 씨의 진돗개 팽이와 목이의 밥을 챙긴다.

단원고 2학년 8반 고우재 군의 아버지. 팽목항에 혼자 남은 유가족. 고 씨에게 세월호는 과거가 아닌 현재다. 그는 사고 5일 만에 아들 우재 군을 찾았다. 경기 안산으로 돌아갔고, 회사에 복귀했다.

하지만 아들이 계속 생각나서 2014년 11월 팽목항으로 돌아왔다. 이유를 묻자 가장 먼저 미안함이란 단어를 꺼냈다. 아이를 빨리 찾고 돌아가서 다른 유가족에게 미안했고, 못해준 일만 기억나서 아들에게 미안했다.

▲고영환 씨가 지내는 컨테이너

그는 팽목항에서 세월호 시설물이 모두 사라지는 점을 걱정했다. 기억할 공간이 없으면 팽목항을 찾는 발길이 줄고, 세월호가 더 빨리 잊힐지 모른다고 했다.

“옛날 같으면 이런 얘기를 울면서 했을 거예요.” 우재 군의 이름을 말할 때면 목소리가 떨렸다. 그러나 눈물을 보이지는 않았다. 분향소에서 6개월 동안 지낼 때는 매일 울었다. 울지 않으려 해도 누가 말을 걸면 눈물이 나왔다. 이제는 울음을 참고 말할 수 있다.

세월호를 기억하는 공간이 생기고 진상이 규명되면 무엇을 하고 싶냐고 묻자 고 씨는 봉사활동이라고 했다. 많은 분의 도움을 받은 만큼 다른 사람을 도우면서 살고 싶다고 했다. 실제로 작년 세월호 유가족, 한부모 가정 아이들과 캄보디아에 갔다.
 

▲고 씨의 캄보디아 봉사활동 모습(사진제공=고영환 씨)

정부자 씨는 회사 구내식당에서 시간제로 일하던 주부였다. 수학여행을 가지 말까 고민하는 아들, 신호성 군(단원고 2학년 6반)에게 추억을 쌓고 오라고 했다. 그게 마지막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사고 직후에는 넋이 반쯤 나간 상태였다고 회상했다. 어느 순간 자신이 자식을 떠나보내고 숨을 쉬고 있음을 알았다. 많은 이의 도움으로 살아서 진상규명을 외치고 미래세대를 생각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연탄배달 봉사를 나갔다. 2015년 1월. 아들과 같은 2학년 6반 어머니들과 함께. 내가 아픈데 무슨 봉사냐고 잠시 생각했지만 돌아오는 차 안에서 잘했다는 이야기를 나눴다.

정 씨는 연탄을 배달하며 어떤 마음이었냐는 질문에 “아이가 죽고 아무 쓸모없는 인생이 됐다고 생각했는데, 다른 사람을 도우며 위로가 좀 됐던 것 같다”고 대답했다. 세월호 유가족의 ‘사랑의 연탄’ 배달은 해마다 계속됐다. 지난 겨울에는 생존 학생도 참여했다.

정 씨는 천안함 사건 유가족이 진도에 와서 체육관 바닥을 걸레로 닦아준 일을 기억했다. 먼지가 나지 않도록 빗자루를 사용하지 않던 모습에 대해 “그분들이 내 아픔을 아셨나 봐요”라고 고마움을 표현했다.
 
“똑바로 살아야겠다는 생각을 했어요. 아들 이름에 누가 되지 않게. 똑바로 사는 게 뭔지 생각하며 봉사를 해나가려고 해요.”

정 씨는 다른 유가족과 함께 경로당을 방문해 필요한 물품을 기증했고 작년에는 라오스 댐 붕괴지역에서 구호활동을 했다. 부정적인 시선을 의식해 처음에는 유가족임을 숨겼다. 이제는 ‘416봉사단’을 만들려고 한다. 20여 명이 참여의사를 밝혀 안산시를 중심으로 하기로 했다.

▲정부자 씨(왼쪽에서 두 번째)가 경로당에서 봉사하는 모습

안산시 산업지원본부 안에는 컨테이너 여러 개가 줄줄이 들어섰다. 4.16 세월호 참사 가족협의회 본부다. 416공방이 여기에 있다. 2014년 겨울에 생겼다가 문을 닫은 후 재정비해서 2015년 5월 다시 문을 열었다.

공방은 세월호 유가족의 심리 치료를 지원하는 안산온마음센터와 봉사자의 도움으로 운영된다. 조은정 양(단원고 2학년 9반)의 어머니는 강의를 들으려고 매일 간다. 여기에서는 서로를 아이 이름으로 부른다. 은정 어머니는 ‘은정이’로 통한다.

그는 사고 후 다른 사람과 이야기를 할 때마다 벽을 느꼈다. 아이 이야기가 나올 때가 특히 그랬다. 외국으로 아이를 보낸 부모가 자기 앞에서 울 때는 “그래도 너는 언젠가 아이를 볼 수 있잖아. 나는 평생 볼 수도 들을 수도 없는 곳으로 보냈는데”라고 생각했다.

필요한 물건은 홈쇼핑으로 주문하거나 공방물건을 썼다. 백화점이나 식당에 갔다가 아는 이를 만나면 자식 잃고 옷 사 입고 싶을까, 음식이 입에 들어갈까라고 생각하는 것 같아서다. 다른 사람이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도 스스로에게 그런 생각이 든다고 말했다.

정부의 상담프로그램에 참여했지만 상담자가 자신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다는 느낌을 받았다. “똑같이 자식 잃은 부모니까 같이 이야기하면 치료가 되는 것 같다.” 공방이 편한 이유다.

공방수업을 듣던 어머니들은 2017년부터 봉사에 나섰다. 안산의 동사무소에서 원예나 퀼트를 가르친다. 5월에는 서울국제핸드메이드포럼에 참여하기로 했다. 10월에는 연례행사인 ‘엄마랑함께하장’을 안산시 화랑유원지에서 연다.

마연숙 씨는 ‘세월호 500일 추모 합창제’에 참여하면서 유가족과 인연을 맺었다. ‘평화의나무합창단’ 소속으로 화랑유원지에 있던 유가족 대기실을 방문했다.

벽에 붙은 공방수업 일정을 봤는데 퀼트는 없었다. 잡념이 없어지므로 불면증에 시달리는 어머니들에게 퀼트가 도움이 된다고 생각했다. 마 씨가 수업을 하고 싶다고 했더니 어머니들은 반을 만들었다.

안산온마음센터가 강사료와 재료비를 지원하기 전까지, 약 7개월 동안은 교통비도 받지 않고 수업을 했다. 그렇게 시작된 인연이 올해로 5년에 접어들었다.

마 씨는 목요일마다 수업을 위해 서울에서 안산까지 간다. 처음에는 호칭조차 조심스러웠다. 자기 아이 이야기는 꺼내지 않았다. 퀼트 시간만이라도 즐겁기를 바라는 마음뿐이었다.

수업을 시작했던 2015년만 해도 어머니들은 자주 울고 한숨지었다. 대화주제는 주로 죽음이었다. “매일 죽는 이야기만 했어요. 누가 먼저 죽을래. 내가 먼저 죽고 네가 먼저 죽고. 그런 얘기들.”
 
지금은 건강 이야기를 많이 한다. 얼마 전에는 JTBC 드라마 ‘눈이 부시게’가 화제였다. 어머니들과 마 씨는 주인공이 시간을 돌리는 장면에 관해 이야기했다.

대부분은 사고 전으로 돌리고 싶다고 했다. 그런데 어느 어머니가 말했다. “난, 우리 애 7살 때로 돌릴 거야. 그래서 안 크게 할 거야.” 마 씨는 집으로 가는 차 안에서 혼자 울었다.

유가족과의 시간이 힘들지는 않으냐고 기자가 묻자 마 씨는 “어머니들이 재밌으시다”고 했다. 자신을 필요로 해서 고맙고, 이제는 가족 같다고 말했다.

그럼에도 여전히 조심스럽다. 4월 16일을 앞둔 3월이면 결석이 늘어난다. 사고일이 다가오면 아픈 어머니가 생긴다. 올해는 예년보다 결석자가 줄어서 다행이라고 느낀다. 

마 씨는 서울디지털대 패션학과 졸업을 앞두고 있다. 공방 어머니의 옷을 만들고 싶다는 말에 패션학과 진학을 결심했다. “(이 일을) 언제까지 할 수 있을지 늘 생각해요. 어머니들이 필요로 하고 수업을 할 수 있어서 늘 감사하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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