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누고픈 이야기 마주침의 나비 효과를 꿈꾸다 우리가 매일 거리에서 지하철에서 버스에서 스치는 많은 사람들의 대부분은 아무런 관심도 없고 관련도 없는 타인입니다. 하지만 때로 그들의 무언가가 우리에게 다가와 오랫동안 놓아주지 않고 내 삶에 물결을 일으킬 때가 있습니다. 나 또한 의식하지 못하는 순간에 방금 나를 스쳐 지나간 누군가에게 나비의 날갯짓처럼 소소한 바람을 불러일으켰는지도 모를 일입니다. 우리의 눈빛과 표정과 몸짓이 서로의 삶에 실어 올 따듯한 나비 효과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었습니다. 자신의 관점과 경험과 입장을 바탕으로 한
셋째날 24. 귀녀 : 눈이 오면 꽃도 피리라 “도망가유! 도망가, 어무이!” 느닷없는 내 외침에, 운과 린은 서로 마주보며 싱긋거리더니 다시 이야기를 이어간다. 이 애들은 한 치의 의심도 없이 지금 내가 어무이와 걷던 피란길, 어느 모퉁이를 헤매고 있으리라 믿고 있다. 아무렴, 그래야지. 이틀 전 운이 가방을 훔쳐 와 봉지를 화단에 묻으면서부터 오늘까지 일어난 일을 마저 들어야 하며, 왕따를 당하던 린의 학교생활이 나아졌는지도 알아야 하고 말고. 1년 전… 피투성이가 된 영감과 자식들을 본 그날, 나는 처음으로 정신을
셋째날 23. 귀녀 : 못다 한 말 맨드라미가 너울너울 춤을 추네. 춤판이라도 벌렸는지 신명나게도 추네. 예는 어디께메유1? 낸 누구래유? 황… 황? 황귀녀. 입속에서 뱅글뱅글 맴도는 이름을 머리로 올리기가 징말로2 어렵다. 맞네, 5대 독자인 아부지가 딸이라도 참으로 중한 언나3 얻었다고 귀녀라 했제! 마당에서 맨드래미를 보고 있었제. 몸이 또 혼을 뱀매실4 보냈었나 봐유. 메느래5가 좋아하던 맨드래미네? 갸들이 불꽃 맨드래미라고 했나, 촛불 맨드래미라고 했나?* 1.여기는 어디예요 2.참으로 3.어린아이 4.밤마실
셋째날 22. 하수 : 새로운 여행 105동, 집으로 가는 익숙한 길이 보인다. 아파트가 동굴 같은 입을 벌리고 내가 들어오기만을 기다리는 느낌이다. 반드시 진실을 파헤치겠다며 굳은 마음으로 돌아왔지만, 막상 여기 다다르자 집으로 갈 마음은 깡그리 사라졌다. 나도 이유를 모르겠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7층으로 올라가 초인종을 누르면 끝이란 말씀! 집에 아무도 없으면 비밀번호를 누르고 들어가 가방을 있던 자리에 놓아두고 식탁에 앉아 내가 좋아하는 핫 초코를 홀짝거리면서, 엄마나 아빠가 와서 딸 하나만 낳고 대한민국을 살아가는 부모로서의
셋째날 21. 운 : 한 걸음 다시 따분한 하루다. 수업마다 선생들은 칠판을 한가득 채우고, 쉬는 시간에 야한 동영상을 돌려보거나 치고받으며 노는 놈들도 무지하게 한결같다. 나 역시 창가에 삐딱하게 앉아서 귀에 이어폰을 박은 폼이 하나 별다르진 않겠지만. 아침에 눈을 뜰 때마다 고등학교 졸업식 날이기를, 또 하루가 가기만을 기다리며 하수도의 물처럼 느릿느릿 흐르는 오늘을 원망하던 어제와는 다르다. 시간의 물살이 눈에 보일 정도로 세차고 빨라진 기분. 때아닌 폭우에 남해까지 물길이라도 뻥 뚫린 것 같다! 돌아보면, 이 작은 변화의 시
셋째날 20. 하수 : 인생의 맛 기차는 역시, 낮에 타야 제맛이다. 밤차는 구경할 풍경이랄 것도 없이 심심해서 잠을 자기에나 딱 좋으니까. 커피를 홀짝이며 가을바람에 출렁이는 들의 바다를 바라본다. 고흐가 그린 밀밭처럼 넘실대는 누런 물결과 정선의 수묵화를 펼친 듯 겹겹이 포개진 산등성이는 지금 내가 느끼는 비현실감을 더해 준다. 어젯밤에 내가 들은 말이 진짜일까? 눈물나게 기분이 나쁜 악몽을 꾼 건 아닐까? 아침에 폭신한 이부자리에서 눈을 떴을 때, 나는 할머니에게 아무 말도 꺼내지 못했다. 한마디도 물어볼 수가 없었다. 할머니
셋째날 19. 린 : 눈 내리는 사막 아침에 짧은 가을 소나기가 내렸다. 학교로 가는 길, 낙엽이 구두 아래 부드럽게 밟히는 느낌이 좋은걸. 어젯밤은 꿈꾸듯 행복했다. 내가 오빠의 버팀나무라는 말은, 오늘 하루를 또 견딜힘을 내게 충전해 준다. 그렇다고 호떡이 뒤집히듯 삶이 확 바뀔 거라는, 장밋빛 내일을 바랄 나이는 지났는걸. 나는 이제 곧 중2거든. 이미 알고 있어. 인생은 결코 만만하지 않아. 예상대로야. 애들은 복도에서부터 나를 보며 수군거린다. 교실에 들어서자 술렁거리는 소리는 더 커진다. 오늘따라 웬일로 내 책상이 지나칠
둘째날 18. 하수 : 할머니의 꿀물 마셔도 너무 마셨어. 백동중학교 앞에서, 청량리역에서, 또 기차에서 오늘 들이킨 진한 아메리카노만 5잔이 넘는다. 그래서인지 밤 12시가 다 됐는데도, 내 눈은 피카추처럼 지나치게 말똥거린다고! 하, 오늘도 꿀잠을 자긴 틀린 걸까? 혼자서 휑뎅그렁한 역을 지나 밤의 어둠 속으로 발을 내딛는다. 여기는 경상북도 영주시. 논밭을 빼고 나면 시내라고 해 봤자 끝에서 끝까지 걸어서 30분인, 인구 10만 남짓의 소도시다. 손녀의 말을 들어 주던 귀녀 씨의 넉넉한 품을 봐서일까, 집을 나온 실감이 뒤늦게
둘째날 17. 린과 운 : 진실 게임 낡은 대문을 열고 집으로 들어선다. 담 그림자가 내린 마당 한구석, 언제나처럼 맨드라미 앞에 쪼그리고 앉은 할머니가 보인다. 익숙한 풍경을 보자 조마조마하던 운의 마음이 조금 놓인다. 아직 안 왔나? 운이 다가가도 할머니는 그대로다. 역시 여느 때와 같다. 할머니의 진짜 알맹이는 오늘도 전쟁터 속 어딘가를 헤매겠지. 아님 말고. 흐린 거실 등이 켜져 있을 뿐, 집 안은 조용하다. 린인 벌써 자나? 조심스럽게 현관으로 들어가 방문을 열자 침대 한쪽에 웅크리고 누운 린의 뒷모습이 보인다. 방 안 어
둘째날 16. 하수 : 나비처럼 날아서 벌처럼 쏘다 내가 딱 그랬다. 나비처럼 날아서 벌처럼 쐈다. 스스로 날아든 건지 뭐에 떠밀린 건지는 모르겠지만, 하! 그저 얼떨떨하다. 조금 전까지 나는 낮은 담벼락에 몸을 숨기고, 작은 마당에서 소곤소곤 새어 나오는 비밀 이야기를 엿듣고 있었다. 도대체 내게 어디서 그런 용기가 솟았을까? 내 남자친구의 집은 어디인가. 나는 그곳을 향해 대학로를 천천히 걸었다. 운의 집은 마로니에 공원에서 10분 거리인 낙산 중턱에 있다고 친절한 민우 씨가 말했기에, 서두를 필요는 없었다. 아르코미술관 옆길로
둘째날 15. 운 : 세상 하나뿐인 MC 스나이퍼가 〈Gloomy Sunday〉의 우울을 실은 목소리로 날 위로한다. 그가 옆에 있다면 멱살을 쥐고 흔들면서 물어보고 싶다. 이봐, 진짜야? 지금처럼 세상이 발밑으로 꺼져 버린 거 같을 때에도 하늘은 언제나 내 편이란 말을 믿어야 되는 거야? 지금 막, 민우에게서 카톡이 왔다. “여친 만났음? 베프도 모르게 비밀 연애하는 친구, 생까려다 봐 줌!” 마른하늘에 내리치는 날벼락을 맞는 기분이 이런 거지? 머리털부터 아킬레스건까지 순식간에 찌릿하게 전류가 흐르더니, 온몸에서 기분 나쁜 식은
둘째날 14. 린 : 안녕 안녕 안녕… 얼른 가야 하는데, 우물쭈물하다 할머니가 반짝 정신이 들거나 오빠와 마주치면 안되는데 왜 이러고 있는지 모르겠다. 중요한 약속을 하고 어디서 만날지는 잊은 사람처럼 머뭇거리고만 있는걸. 누군가 날 잡아 주길 기다리는 건 아냐. 화단을 가득 채운 맨드라미를 오랫동안, 어쩌면 다시는 볼 수 없을 거라는 아쉬움 때문이라고 치자. 프라하에도 촛불 맨드라미가 있을지 궁금해서, 나는 손을 내밀어 노랑 맨드라미를 살살 쓰다듬어 본다. 오늘 나는 ‘우리 반 왕따’에서 ‘전교 왕따’로 굴러떨어졌다
둘째날 13. 운과 하수 : 거짓말 교복을 입은 중학생들이 길 잃은 양떼처럼 쏟아져 나온다. 하수는 눈에 레이더망을 켜고 도둑놈을 찾는다. 저기다! 놈이 미키 마우스와 함께 교문을 나와 혜화역 방향으로 가는 모습을 확인한 하수는 부리나케 가게를 나선다. 옷이 어제 그대로인 만큼 뒤에 가까이 붙기보다 이대로 건너편에서 평행선을 그으며 따르기로 한다. 미행의 핵심은 안 들키는 기술이니까. 뭐든지 거리를 두고 보면 더 잘 보이는 법이기도 하고. 바로 뒤에서 알짱거리다간 거리에 바글거리는 사람들에 치여 도리어 놓칠지도 몰라. 백동중학교에서
둘째날 12. 린 : 덫에 걸린 문학소녀 남아메리카의 아마존, 엘 이딜리오라는 조그만 마을에 안토니오 할아버지는 산다. 말라리아로 아내를 잃은 그는 연애 소설을 읽는 즐거움으로 하루하루를 보낸다. 할아버지의 소원은 사탕수수대로 엮은 오두막에서 조용히 사랑 이야기에 파묻히는 삶이지만 세상은 가만히 두질 않아서, 결국 그는 사람을 공격하는 정글 맹수와 한판 승부를 겨루게 된다. 태평양을 따라 싱싱한 대파처럼 가늘고 길게 늘어선 나라, 칠레의 루이스 세풀베다가 쓴 『연애 소설 읽는 노인』의 내용이다. 웃는 얼굴의 털보 아저씨가 천연덕스레
둘째날 11. 운 : 수상한 기립 박수 레인보우 뮤직을 연다. 음악의 바다를 떠돌다 〈Standing Ovation〉에 멈춘다. 이 곡이 실린 굿 샬롯의 5집 앨범엔, 자그만 녹색 이파리와 열매를 달고 식물처럼 뿌리를 내린 자줏빛 심장이 그려져 있어 언제 봐도 마음에 든다. 근데… 뭐지? 좌심방에 틀어박힌 한쪽 눈알이 오늘따라 뭔가 할말이 있다는 눈빛으로 나를 쳐다본다. 이럴 줄 몰랐나, 친구? 도둑질을 하고도 아무 일 없을 줄 알았나? 가방을 훔칠 때 무시해 버린 내 안의 목소리다. 쳇, 이제 와서 돌려줄 수도 없잖아
둘째날 10. 하수: 잠복근무 “주문하신 아메리카노 1잔 나왔습니다!” 공기를 가르는 아르바이트생의 외침에 정신이 퍼뜩 든다. 눈이 감긴 잠깐 사이, 200만 광년이나 떨어진 안드로메다은하라도 다녀온 기분이다. 커피를 들고 돌아와 졸린 눈을 비비며 길 건너편에 있는 중학교 교문을 살핀다. 등교가 끝나서인지 얼씬거리는 사람 하나 없이 조용하다. 내가 정말, 자리 하나는 기가 막히게 잘 잡았다! 여기서 횡단보도만 건너면 바로 백동중학교 교문이라서, 1층 창가 구석에 있으면 나를 들킬 걱정 없이 한눈에 놈을 찾을 수 있단 말씀! 오전 1
둘째날 9. 린 : 살인 미수 내 사랑, B1A4의 〈Yesterday〉를 흥얼거리며 집을 나선다. 오빠들의 노래는 다 명곡이지만, 나는 그 중에서도 이 노래가 제일 좋다. 들으면 심장이 두근두근 콩닥콩닥 막 설레거든! 진영 오빠의 목소리는 오빠의 눈웃음만큼이나 날 살살 녹이는걸. 아, 기억도 안 날 만큼 오랜만에 맞은, 날아갈 정도로 산뜻한 아침이다. 학교로 가는 발걸음도 오늘만큼은 가볍다. 수틀리면 가방을 들고 떠나면 그만이거든. 내가 교실로 들어서자, 애들이 단체로 까나리 액젓이라도 마신 것처럼 얼굴을 마구 찌푸린다. 왜, 내
첫째날 8. 하수 : 수건돌리기 알프스, 지금 어디에 있어? 알록달록한 작은 집들이 눈에 아른거린다. 알프스는, 잃어버린 내 가방의 이름이다. 나의 기억 속에서 부모님은 언제나 서로를 물어뜯으며 으르렁거렸다. 그래서일까? 내가 어려서부터 가출을 꿈꾼 이유. “하수는 날다람쥐처럼 얼마나 재바른지, 조금만 한눈팔면 어디론가 사라지곤 했어요. 경찰서에서 찾은 적도 셀 수가 없다니까요? 도대체 누굴 닮아서 틈만 나면 달아나는지 도통 모르겠어요.” 명절이면 엄마는 무슨 전통 의식처럼 나를 들먹이며, 친척 어른들께 나 하나 키우는 게 세상에서
첫째날 7. 린 : 꿈이 이루어지면 꿈은 이루어진다! 보고 또 봐도 도저히 안 믿겨! 베개에 감춰 둔 일기장을 꺼내며 돌아보고 또 돌아봐도 가방은 그대로 있다. 기억이 가물가물할 만큼 오랜만에, 즐거운 마음으로 일기를 쓴다. 손에 쥔 노랑 꽃무늬 볼펜도 춤추듯 움직이는걸. 당장이라도 가방을 싸서 프라하로 떠나고 싶은, 참을 수 없는 내 존재의 가벼움에 지구 어디선가 지진이라도 난 것처럼 온몸이 살짝살짝 떨린다. 지금 이 순간만큼은 마음껏 꿈꿀 수 있어. 근사한 하늘 아래 자신만 알아볼 수 있는 특별한 그림을 늘어놓은 어느 젊은 화가
첫째날 6. 운 : 밤의 축제 여유롭게 리듬을 타던 크라잉넛이 벼락같이 내달린다. 다 같이 닥치고, 바람을 가르며 말을 달리자! 지금 내 기분은? 크라잉넛이 옆에 있으면 어깨동무하고 책상 위로 펄쩍 뛰어오를 만큼, 끝내준다. 정신 빠지게 〈말달리자〉를 부르짖던 우리는 이 분위기를 그대로 살려 〈좋지 아니한家〉 묻기 시작한다. 이쯤 되면 대답을 해 줘야, 노래에 대한 예의잖아? “좋지! 왜 안 좋아? 좋아, 좋아 죽겠어!” 후아, 말 춤으로는 부족하다! 방을 쿵쿵 울리는 자유로운 리듬에 맞춰 목이 부러지게 헤드뱅잉하고 싶을 정도로 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