둘째날













 9. 린 : 살인 미수


 


 

 

 

  내 사랑, B1A4의 〈Yesterday〉를 흥얼거리며 집을 나선다. 오빠들의 노래는 다 명곡이지만, 나는 그 중에서도 이 노래가 제일 좋다. 들으면 심장이 두근두근 콩닥콩닥 막 설레거든! 진영 오빠의 목소리는 오빠의 눈웃음만큼이나 날 살살 녹이는걸. 아, 기억도 안 날 만큼 오랜만에 맞은, 날아갈 정도로 산뜻한 아침이다. 학교로 가는 발걸음도 오늘만큼은 가볍다. 수틀리면 가방을 들고 떠나면 그만이거든.
  내가 교실로 들어서자, 애들이 단체로 까나리 액젓이라도 마신 것처럼 얼굴을 마구 찌푸린다. 왜, 내 밝아진 얼굴을 보니 속이 막 뒤틀려? 어제 그렇게 당하고도 정신을 못 차린 미친년 같아? 너희가 하도 징글징글하게 괴롭혀서 내 정신이 지구를 반 바퀴 정도 살짝 돌았다 쳐라. 매일 단체로 기도하던 바가 아니세요? 오늘은 또 어떤 일이 나를 기다릴지 1초 뒤도 알 수 없지만, 미수의 뿌루퉁한 상판대기를 보니 속이 다 시원하다!

  살인 미수! 나는 이제 미수를 이렇게 부른다. 하루에도 수십 번씩 심장이 타들어 가는 괴로움에 차라리 죽고 싶게 만드니, 이보다 적당한 말을 찾을 수가 없다. 이름을 지은 걔네 부모님의 선견지명에 감탄을!
  한때 우리는 친구였다. 초등학교 3학년, 피아노 학원에서 만나서 어쩌다가 부모님끼리도 알게 된 사이. 부처님, 하나님, 알라신 등등 모든 신이여, 감사합니다! 신들께 감사드리게도, 우리는 그다지 친하진 않았다. 미수는 변호사인 아버지에게 법전처럼 떠받들려 키워진 외동딸로, 질투심이 태양처럼 이글이글 타올라서 자꾸만 자신을 남과 비교하고 못살게 구는 성격이었다. 미친 승부욕 때문에, 어디든 끼어들고 뭘 하든 이겨야 직성이 풀렸다. 도저히 겨룰 수 없는 사람을 만나면 마지못해 앞에서는 칭찬하지만, 뒤돌아서자마자 온갖 트집을 잡아서 끌어내리고 짓밟았다. 남이 자기보다 잘 되면 배알이 꼴리는 천박한 족속! 사촌이 뭐야, 나중에 자기 남편이 땅을 사더라도 값이 오르면 배가 아파서 데굴데굴 굴러다닐 인간이다. 한마디로, 나와는 안 맞는다.
  그래도 처음부터 미수를 싫어하진 않았다. ‘나와 다름’이 ‘네가 틀림’은 아닌걸. 어쩌다 도서관에서 옆자리에 앉는 모르는 사람처럼, 가까이 있지만 아무런 관심이 없었거든. 그때의 내겐 기댈 친구가 필요하다고 느끼지 않을 만큼 우리 가족의 품이 넉넉했고, 유치원에 다니기도 전부터 동화책에 빠져 산 문학소녀였기에 언제나 내 곁을 지키는 책이란 특별한 친구들도 이미 있었다. 6살 동갑내기들이 『신데렐라』를 꿈꾸며 백마 탄 왕자를 그릴 때, 나는 부모님이 하는 꽃집 귀퉁이에 쪼그리고 앉아 고무나무 잎사귀를 만지작거리며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를 읽고 또 읽었다. 그래도 그때는 유치원에 가면 애들과 문제없이 어울렸다. 그 나이엔 선생님이 시키는 대로 건강하게 뛰어놀면 아이들과 잘 통하거든. 『신데렐라』를 읽고 왕자를 꿈꾸건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를 읽고 말하는 토끼를 만나는 상상에 빠지건 별 차이도 없는걸. 
  하지만 빅토르 위고, 헤르만 헤세, 안톤 체호프의 작품을 아끼는 14살의 나와, 연애 소설을 쌓아 놓고 여전히 왕자를 기다리는 평범한 여중생이라면 얘기는 달라진다. 내가 한 치 앞을 알 수 없는 삶에 대해 이야기하며 한숨을 쉬면, 애들은 개코같은 소리 집어치우라며 첫 경험과 연애, 공부에 대해서 시시콜콜한 잡담을 늘어놓는걸. 내겐 애들이 티끌처럼 사소한 문제에 매달리는 소인배로 보이고, 애들은 나를 혼자 잘난 척하는 이상한 외톨이로 보니, 자연히 대화는 남북 정상 회담처럼 자주 단절될 수밖에 없다.
  내 죄는 나도 알아. 나는 이사카 씨 같은 작가들로 벽을 쌓고 현실 속의 어떤 친구도 바라지 않았어. 나를 멀리하던 애들은 내가 읽는 책이 튄다고 점점 더 싫어했고, 친해지고 싶어서 다가오던 애들은 내가 일부러 어려운 얘기만 늘어놓는다며 차츰 미워했다. 수많은 소설에서 알 수 있듯이, 호감이나 애정이 반대로 돌아서면 더 무서운 법이다. 거기에 부모님이 돌아가셨고, 집이 쫄딱 망했다는 사실이 용서할 수 없을 만큼 괘씸죄를 샀겠지. 빈털터리 고아 주제에 심각한 책을 들고 다니고, 가난뱅이인 게 건방지게 친구를 가려 사귄다며 아니꼬웠을걸. 

  초등학교를 졸업할 때까지만 해도, 괜찮았다. 그땐 할머니도 아직 제정신이었거든. 다른 학교에 다니던 미수와도 가끔 만나 떡볶이를 사 먹을 정도로는 가까웠다. 관심거리가 달라 말은 잘 안 통했지만. 미수가 달라진 건, 비극적이게도 우리가 같은 중학교, 같은 반에 다니게 되면서부터다. 여러 학교에서 온 아이들은 서로에 대해 잘 알지 못했다. 처음에 나는 미수라도 아는 얼굴이 있어 반가웠다. 이렇게 뒤통수를 맞을 줄은 꿈에도 몰랐거든. 미수의 끔찍한 영혼을 들여다볼 수 있다면 좋았겠지만, 세상에 그런 능력자는 없는걸.
  언제부턴가 서서히, 애들이 내게서 돌아서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체육 시간에 여럿이 모여서 흙을 차며 수다를 떠는 곳에 가면 하나, 둘 어색하게 자리를 떠나는 정도였다. 이상하다고 생각했지만 그냥 넘겼다. 나는 원래 남의 행동 하나하나에 신경을 잘 안 쓰거든.
  “저거, 읽지도 않는 소설책을 끼고 다니면서, 공부를 잘하는 애들한테만 말을 건다니까? 내가 몇 번이나 봤잖아.”
  누군가 뒤에서 빈정거릴 때도, 내 뒤통수를 노린 말일 줄은 몰랐다. 난 그런 적이 없거든! 하지만 그렇게 무심코 지나친 새끼손톱만 한 험담들이 굴러가면서 한군데로 모이자 눈사람처럼 어마어마하게 커졌다. 점심시간에 내 주변에서 밥을 먹던 애들이 점점 사라지기 시작했다. 사소한 추위라고 무시하다가 어느 순간 뼛속까지 으슬으슬하게 스며든 냉기에 놀라 소스라치며 겨울을 실감하게 되는, 미세하고도 느린 시간이었다. 내 마지막 점심 친구였기에, 이 모든 일의 시작이 미수일 거라고는 눈곱만큼도 의심하지 못했다. 민트 초콜릿 사건이 터지기 전까지는.

  쓸데없이 초콜릿을 건넨 내 손이 문제였다. 아니, 그보단 창문을 연 거! 아니, 아니다. 내가 이 세상에 태어난 것부터가 잘못이다. 
  1학기 중간고사 때였다. 아무리 소설에 빠져 사는 나라 해도, 성적을 가지고 잔소리하는 부모님이 없어도, 중학교에 들어와서 처음으로 큰 시험을 앞두자 꽤 긴장이 됐다. 빨갛게 충혈이 된 눈으로 중얼중얼 족보를 외우는 애들을 보니 장난이 아니구나 싶었거든. 중간고사 첫날, 교실을 환기하고 시작하자는 담임의 목소리에 그날따라 씩씩하게 창문을 열어젖힌 게 탈이었다. 내 뒤에서 앞으로 창문을 밀던 우리 반 1등, 세영의 오른손 집게손가락이 두 창문 사이에 끼고 말았다. 살점이 밀린 세영의 손가락에서 붉은 핏방울이 뚝뚝뚝 떨어졌다. 
  얼굴이 하얀 분필처럼 질린 세영인 양호실에서 치료를 받고 돌아와 시험을 치러야 했다. 당황해서 미안하다는 말만 되풀이하는 내게 괜찮다며, 너도 놀랐을 거라고 말해 주는 착한 세영에게 진심으로 고마웠다. 민트 초콜릿을 좋아한다는 말이 기억나서 쉬는 시간에 매점에 달려가 사 왔는데, 그걸 먹은 세영이 배가 아프다고 또 울상이 된 거다. 결국 세영인 첫날 시험을 다 망치고 말았다. 도대체 뭐가 문제였는지 모르겠다. 성적 때문에 원래 좀 예민해서 위염을 앓는 아이인데다 아침에 그런 사고가 있어서 위경련이라도 온 건지, 아니면 정말로 내가 준 초콜릿에 무슨 문제가 있었는지, 정확한 원인은 끝까지 안 밝혀졌다. 나도 진짜, 국립과학수사연구원에 의뢰를 해서라도 사건의 진실을 알고 싶은 마음이거든? 그런데 다음 날부터 내가 세영일 일부러 다치게 했고, 내가 준 초콜릿 때문에 그 애가 아팠다는 얘기가 돌기 시작했다. 
  “거기 뭘 넣었는지 누가 알겠어? 세영이가 공부를 잘하니까 중간고사 망하라고 치사하게 방해한 거 아냐?”
  “내 말이! 시험을 못 치게 손 다치라고 창문을 미친 듯이 세게 밀더니, 그러고도 모자라서 이상한 초콜릿까지 먹인 것 봐! 진짜 밥맛없어.”
  아주 서서히, 설 자리가 없어지는 느낌이었다. 그때 한 아이의 말이 내 귀에 부메랑처럼 날아왔다. 
  “쟤, 원래 저런 애라며? 예전에 피아노 학원에 다닐 때도, 지보다 잘 치는 애가 있으면 걔 악보를 뺏어서 찢어 버리고 그랬대.”
  그거였다! 나를 잘 알지도 못하는 애들이 같이 놀기 싫은 애, 왕따를 당해도 싼 애라고 나를 따돌린 이유! 정말로 학원에서 그런 일이 있긴 했다. 근데 그런 짓을 한 사람은 내가 아니라 미수거든? 미수에게 당한 9살짜리 여자아이는 충격이 심했는지 그날 이후 학원에 나오지 않았다. 피해자가 이미 그만둔 상황이라, 학원 원장도 미수를 심하게 야단치지는 않았던 걸로 기억한다. 어차피 학원비를 계속 낼 사람은 미수였거든. 게다가 변호사인 미수 아빠에게, 딸이 그런 행동을 저지를 수밖에 없었던 상황을 꾸며내고 감싸기는 코 풀기보다 쉬운 일이었다. 
  미수와 나밖에 모르던 일이 엉뚱하게 바뀌어서 도는 걸 듣고서도, 나는 미수를 의심하지 않았다. 애들이 내게 못되게 굴 때면 눈물을 글썽일 정도로 속상해하던, 말리지 못해 미안해하던 눈동자를 믿었다. 아니, 믿고 싶었다. 
  “미수야, 애들이 어떻게 피아노 학원 일을 아는 거야? 그랬던 사람은 사실 내가 아니라 너….”
  애들한테서 지켜 주려고 내가 소곤소곤 귓속말을 하자, 미수는 벌떡 일어서더니 그때까지와는 아주 다르게 싸늘한 표정으로 모두에게 들으라는 듯 크게 소리를 질렀다. 
  “기린, 이제 그만 좀 해! 너 같은 애, 정말 질린다! 앞으로 나한테 다시는 아는 척 하지 마!”

  ‘왕따’ 기린의 탄생을 축하합니다! 그날을 시작으로, 내 주위를 떠돌던 따돌림은 부글거리며 수면 위로 올라와 오늘에 이르렀다. 미수는 나를 뒤통수치려고 어쩌면, 우리집이 망한 다음부터 차근차근 준비했는지도 모른다. 분명히 알았을 텐데, 미수도, 걔 부모님도 장례식장에는 코빼기도 안 내밀었거든. 엄마끼리 가끔 안부 전화를 나누고, 3년이나 같은 학원을 다닌 사이라면 와서 위로의 말이라도 한마디 건네야 예의인걸. 더군다나 지가 늘 떠벌리던 대로 나와 둘도 없는 친구라면 더더욱. 이제와 생각하니, 그런 인간말짜에게 마음을 안 준 건 정말로 하늘이 굽어살핀 덕분이다.
 
  그나저나 어제 토마스 노래로 그렇게 당하고도 말짱한 나를 보고 애들도 질렸는지, 다들 아직까지는 얌전한 걸? 설마, 그럴 리가! 2교시를 마치고 화장실에 다녀오니 이사카 씨의 『피쉬 스토리』가 책상 위에 활짝 펼쳐져 있고, 116페이지 아래의 하얀 여백에는 비뚤비뚤 넘어가는 새파란 글씨가 휘갈겨져 있다. 내 반응을 살피느라 교실 안 온도가 후끈 올라간 느낌이다. 낡은 빨랫줄처럼 늘어지려는 마음을 바짝 다잡으며, 천천히 다가간다. 

  느낌표가 자그마치 10개다. 흥, 그동안 쌓은 왕따 내공이 얼만데, 이 정도론 끄떡없어! 어제부터 내겐 프라하로 갈 수 있는 마법 가방이 생겼거든! 마음으로는 여기저기 마구 삿대질하며 이미 한판 붙었지만, 꾹꾹 참으며 말없이 엉망이 된 페이지의 아래쪽만 쓱 찢어 낸다. 그리곤 보란듯이 쪽지 모양으로 예쁘게 꼭꼭 접어서 교복 주머니에 날름 집어넣는다. 애들이 조금 술렁거리는가 싶더니 이내 잠잠해진다. 나는 아무렇지 않은 척 자리에 앉아 한구석이 사라진 『피쉬 스토리』를 펴서, 117, 다음 페이지를 읽기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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