셋째날












 23. 귀녀 : 못다 한 말


 

 

 

 

  맨드라미가 너울너울 춤을 추네. 춤판이라도 벌렸는지 신명나게도 추네.

  예는 어디께메유1? 낸 누구래유? 황… 황? 황귀녀. 입속에서 뱅글뱅글 맴도는 이름을 머리로 올리기가 징말로2 어렵다. 맞네, 5대 독자인 아부지가 딸이라도 참으로 중한 언나3 얻었다고 귀녀라 했제! 마당에서 맨드래미를 보고 있었제. 몸이 또 혼을 뱀매실4 보냈었나 봐유. 메느래5가 좋아하던 맨드래미네? 갸들이 불꽃 맨드래미라고 했나, 촛불 맨드래미라고 했나?
* 1.여기는 어디예요  2.참으로  3.어린아이  4.밤마실  5.며늘아가 
  메느래야, 겨울이 오는데 땅속이 춥지는 않나? 뱀톨6 같이 윤나는 니 애덜7을 보고는 있냐? 애덜은 참 잘 컸데이. 니 기래8 가고 제대로 챙기지도 못했는데, 운이나 린이나 애덜 다 기특하제? 지금도 내 추울까 봐 운이가 잠바를 둘러 주고, 린이 내 손을 지 잠바 속에 넣어 꼭 붙들고 있데이.
* 6.밤톨  7.아이들  8.그렇게

  못다 한 말이 한가득 걸려 목이 멘다. 살랑이는 달빛을 머금은 맨드라미나 쳐다보고 속절없이 하소연할 뿐이다. 


  운과 린은 내 옆에 앉아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내가 듣는 줄 모르고 한낮의 참새처럼 잘도 조잘거린다. 아무리 늙은 할머니라도 어른이 두 눈을 부릅뜨고 한마디, 한마디를 가슴에 새기며 듣는 줄 안다면 지금처럼 속마음까지 시시콜콜 떠들기는 어려울 터… 한창 예민한 사춘기다 보니 어떻게 대해야 할지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는데, 꽁꽁 숨겨 둔 마음을 이렇게 몰래라도 들을 수 있으니, 이 점만큼은 치매란 빌어먹을 병에게 감사의 삼천배라도 올려야 하리라.
  “도망가유, 도망가!”
  혹시나 정신을 차렸음을 들킬세라, 멍하니 하양 맨드라미만 보며 일부러 외친다. 내가 정신을 놓으면 이런 말을 하더라고, 우리 손주들이 알려 줬다. 처음에 그 소리를 듣고 허파가 얼마나 벌렁거렸던가. 1950년 여름, 덥고 토악질 나던 피란길이 떠올라서… 난리통에 내게는 전쟁보다 더 몸서리칠 한을 새겨 준 우리 어무이도.

  내 고향은 강원도 홍천군. 겨울이면 함박눈이 셀 수 없이 쏟아지던 양덕원에서, 아부지는 뼈대 있는 양반집의 독자로 태어났다. 허나 노름에 빠진 할아부지의 분탕질로 집안의 기둥이란 기둥은 모조리 뽑혀서, 내가 태어났을 무렵의 아부지는 이미 한낱 소작농 신세에 길들여진 촌무지렁이에 불과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니면 그래서이려나? 인민군이 쳐들어왔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아부지는 농사꾼의 생활에는 쥐뿔만큼도 도움이 안 될 애국심이 들끓어 올라 자리에 가만히 앉아 있질 못했다. 뜬눈으로 밤을 지새운 아부지는 멀리서 포 소리가 드문드문 들리기 시작하자, 해가 밝기도 전에 달려가 국군에 지원해 버리곤 가족에게 남으로의 피란을 권했다.
  어무이는 곧장 얼마나 길어질지도 모르는 피란길에 오를 채비를 했다. ‘인생사 새옹지마’라 했던가. 어이없게도 아부지는 국군에 들어가기도 전에, 피란 준비를 위해 할아부지의 노름빚을 받으러 온, 한동네 살던 지주에게 잘못 떠밀려서 돌아가시고 말았으니… 아부지는 목숨 값으로 빚을 치른 셈이었다. 이런 우리집의 비극과는 관계없이, 인민군이 밀고 내려오는 속도는 우리 가족의 피란 준비보다 빨랐으니… 어느새 마구 쏴 대는 총소리가 산 너머에서 가깝게 들리더라. 희한하게도, 어무이는 제대로 슬퍼하는 기색도 없이 앞마당에 판 얕은 구덩이에 아부지의 시체를 대충 밀어넣고, 그날로 나와 동생의 손을 잡고 낮으로 밤으로 뚜렷한 목적지도 없이 남으로, 남으로만 내려가는 게 아닌가. 아마도 전쟁을 일으킨 고상한 이념 따위가 발 디딜 틈 없는, 죽고 사는 문제를 눈앞에 둔 지독한 현실이 어무이의 모성애를 무한의 경지로 일깨웠으리라.

  선산의 솔밭에 모신 조상신들이 지켜 주셨는지, 인민군과 국군이 서로 쏘아 대는 총탄과 포탄, 하늘에서 날아드는 야끄9의 무시무시한 공습에 쫓겨 걷지 않으면 밟힐 피란 행렬의 아우성 속에서도 우리는 오랫동안 무사히 살아남았다. 어무이는 두 손에 7살 먹은 나와 5살배기 동생 귀범일 쥐고 끌다시피 하며 참으로 끝도 없이 걸었다.
* 9.북한군 전투기 YAK
  어쩌면 팔자소관으로, 일어날 일이었던가. 아주 잠깐, 공습을 피해 숲속에 숨은 김에 하루 종일 참은 볼일을 보려고 어무이가 우리 남매의 손을 놓았던 몇 분 남짓, 귀범인 그새를 못 참고 엉덩이에 뿔난 송아지처럼 주위를 뛰어다니다 지뢰를 밟고 말았다. 하긴 전쟁이고 죽음이고 어린애가 뭘 알았겠는가. 한참 산으로 들로 들쑤시고 다녀도 부족할 나이에, 죽을상을 한 어무이에게 피멍이 맺히도록 아프게 팔을 잡히고 끌려다니던 아이가 맛본 자유이니 얼마나 누리고 싶었겠는가. 허나 전쟁터에서 나이다운 천진함은 불쏘시개로 달려드는 나방처럼 분별없는 행동인 것을… 이래서 전쟁을 겪은 세대는 철이 일찍 든다는 말이 나왔으리라. 따끈한 피가 엉겨붙은, 찢어진 살가죽이 내 얼굴로 날아와 귀범의 비참한 죽음을 실감케 했다. 땅바닥에 앉아서 퉁퉁 부어오른 다리를 주무르다가 무슨 일인지도 모른 채 그대로 얼어붙은 내게는, 핏기가 사라진 얼굴로 귀신처럼 다가서는 어무이의 얼굴이 또 하나의 공포였다.
  “왜, 왜… 귀범이가! 차라리… 차라리!”
  어무이는 나를 향해 불길한 삿대질을 하며 헛소리를 하다가, 돌연 다리가 풀썩 꺾이더니 기둥이 뽑힌 허수아비처럼 꼬꾸라졌다. 허나 이미 토해진 그 짧은 말이 내게는 급소를 찌르고 숨통을 틀어막는 아픔을 주더라. 처음에는 쓰러진 어무이를 마구 흔들면서, 누나로서 어린 동생을 돌보지 못한 자책감과 살아남은 자의 무조건적인 죄책감에 시달렸다. 아들인 귀범이 아니라 아무짝에도 쓰잘머리 없는 계집애인 내가 죽었어야 하는 게 아닌가? 공습이 퍼붓는 길가로 달려가 하잘것없이 작은 몸을 던지고 싶은 자포자기의 심정이 나를 에워싸는 가운데, 어디선가 강한 부정이, 삶을 향한 뜨거운 애정과 열정이 치솟았다. 그때부터 내 머릿속을 가득 채운 건 동생의 가여운 죽음에 대한 슬픔보다도, 산불처럼 일어나는, 생존을 향한 욕구였다. 죽도록 살고 싶었다. 어무이가 보란듯이, 어떠한 일이 있어도 저런 가죽 쪼가리로 날아가 생을 마감하지 않으리라. 힘도 잘 안 들어가는 귤만 한 주먹을 아프도록 꼭 쥐었다.

  그런 나를 약이라도 올리듯, 한때 귀범이었을 조각을 그러모아 땅에 묻은 뒤부터 어무이의 걸음은 다리가 달렸으니 걷되 마지못한, 뒤로 갈 수가 없으니 앞으로 나가는, 차마 떨어지지 않는 걸음이었다. 나는 살아야겠는데 자꾸만 뒤처지는 어무이가 원망스러웠다. 마침내 동강을 가로지르는 영월다리에 다다랐을 때… 어무이는 초점을 잃은 눈으로, 나더러 먼저 건너라는 힘겨운 손짓만 계속했다. 다리는 그즈음 내린 비로 강물이 불어나 바닥에 물이 찰랑거리는 위험한 상태로, 발을 헛디디거나 미끄러져서 강으로 떨어진 사람들이 울부짖고 허우적거리며 한없이 떠내려가고 있었다. 소달구지에 타고, 아부지의 지게에 올라서, 어무이의 손을 잡고도 벌벌 떨면서 건너는 애들을 보고 제자리에서 굳어 버린 우리 어무이를 다시 보니, 아무래도 내가 먼저 건너가야 어무이가 따라올 듯했다. 나는 손짓하듯 일렁이는 검은 강물을 들여다보지 않으려 애쓰며, 야위어 빠진 할아부지를 등에 업고 조심조심 강을 건너는 아저씨를 따라, 그가 디딘 부분만 꼭꼭 힘주어 밟으며 다리를 건너갔다.


  한참을 걷다 돌아보니, 아직도 강가에 선 어무이의 모습이 희미하게 아른거렸다. 나는 내 평생 다시 못할 정도로 목청껏 소리쳤다.
  “어무이, 얼릉10 와유! 얼릉, 얼릉 와유!”
* 10.얼른 
  어무이는 내 말을 들었는지 못 들었는지 그저 하염없이 먼 하늘만 올려다보고 서 있었다. 어무이의 아득한 시선을 따라가자 잔뜩 찌푸린 하늘에서 야끄가 게거품을 문 미친놈처럼 어무이가 선 강가로 재빠르게 날아들고 있었다. 아직 다리로 오르지 못한 강가의 무리는 보잘것없는 세간을 집어던지고 허겁지겁 숲속으로 달려가고, 미처 다 건너지 못한 이들은 허둥지둥 뛰고, 어떻게든 살아 보려고 사방이 야단법석을 떨고 있었다.
  “어무이, 도망가유! 도망가! 어무이, 어무이!”
  아무리 자리에서 날뛰며 숨이 넘어갈 듯 소리를 질러도 어무이는 땅에 박힌 돌덩이처럼, 마치 야끄가 오기를 기다리기라도 한 사람처럼 그대로 서 있었다. 이윽고 내게는 다른 모든 소리가 멎으며 전투기 소리만 시끄럽게 울렸고, 어무이는 쓰러졌다.

  아주 오랫동안 내 영혼을 병들게 한 건, 어무이의 보잘것없는 마지막이었다. 그건 피할 수 없는 운명이 아니라, 분명한 선택이자 계집애인 나에 대한 포기였지 않은가. 내가 지뢰를 터뜨려 죽었더라도, 어무이는 똑같은 선택을 했을 것인가. 아부지가 죽고도 늦추지 않던, 인민군에게서 멀어지기 위해 점점 더 빨리 발걸음을 재촉하던 어무이가, 귀범의 죽음 앞에서 멈추었다. ‘차라리’란 말과 함께, 딸을 버리고 아들을 따라 죽기를 바란 어무이를, 나는 절대로 용서할 수가 없었다. 매일 얼굴이 바뀌는 피란민들의 틈바구니에서 살기 위해 주린 배를 움켜쥐고 달아나던, 세상천지에 의지할 곳도 하나 없이 겁에 질린 깡마른 계집애 하나… 눈을 깜빡일 때마다 이를 갈았다. 꼭 살아서, 딸을 낳아 남부럽잖게 키울 거라며, 어떤 상황이 닥치더라도 절대로 내 딸을 포기하지 않으리라고 내쉬는 숨결마다 스스로와 약속했다.

  허나 인생의 장난은 얼마나 짓궂었던가. 그토록 딸을 원했건만, 나는 딸을 낳지 못했다. 아들도 달랑 하나밖에 못 얻었다. 어쩔 수 없이, 닭 대신 꿩이라도 달라고 밤마다 물을 떠 놓고 하늘에 빌었다. 지문이 닳도록 손을 문지른 덕인가, 살가운 며느리를 맞아 딸처럼 아끼며 알콩달콩 재미나게 살아 보나 했더니, 망할 놈의 하늘은 껄껄 웃으며 아들까지 몽땅 다시 데려가 버렸다. 사고가 났을 때, 누구도 이해하지 못했지만 나는 며느리가 아니라 딸을 잃은 슬픔에 애끓었으니… 남편과 아들, 딸을 한꺼번에 보낸 참으로 박복한 이년의 팔자! 그런데 이건 또 무슨 인생의 조화란 말인가. 그제야 우리 어무이가 이해가 가는 게 아닌가. 자식을 잃으니, 딸이고 아들이고 할 것 없이 눈이 뒤집어지고 목이 죄는 게 살아도 사는 게 아니더라. 어무이도 이런 심정이었는가. 이제와 헤아려 보면, 넋두리할 귀범인 이미 흔적도 없이 사라졌으니, 천지 사방에 부여잡고 미워할 사람은 나뿐이었는지도 모른다. 차라리… 그 말은 내가 아니라 자신을 뜻했으리라. 어미가 되고, 그런 일이 닥치고 나서야 알게 된 어무이의 마음이란, 타고난 팔자를 바꿀 수만 있다면 저승사자에게 뇌물을 써서라도 대신 죽고 싶은 마음이란 걸 비로소 깨달았으니. 진심은 언젠가 폭풍처럼 오더라.

  어무이, 귀범이 아들이라서가 아니라, 자식이어서 그리도 애달파 했소? 냄편11에 이어, 내 몸땡이에 심장 같은 자식까지 하나 잃고 나니 당장이라도 혈12 깨물고 죽고 싶은 심정이었소? 그래서 강가에서 내 등을 그리도 떠민 거유? 내만이라도 살았으면 하는 맴13에… 어무이가 자식을 잡아먹는 사나운 운수라도 타고난 듯싶어 더이상은 버틸 자신이 없었소? 그래도 내 하나만은 살리고 싶었던 거유? 어무이, 말 좀 해 봐유, 어무이!
* 11.남편  12.혀  13.마음

  아마도 그날부터 나는 어무이를 증오해서가 아니라, 오랜 세월에 걸쳐 겹쌓인 한을 풀기 위해서, 가슴에 응어리진 돌덩이를 깨부수고 그때 그 물가로 달려가 어떻게든 어무이를 살리고 싶어서, 자꾸만 돌아가는 모양이다. 허나 내 몸은 여전히 제자리에 꼼짝없이 붙박인 채 그 강, 그 다리, 그 자리에서 어무이만 목놓아 부르고 서 있다. 

다음 회에 계속-

 


* 6.25전쟁 당시 민간 통용 언어와 국군 피난 상황에 대해 친히 감수해 주신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 백선엽 자문위원장님(98세, 6.25 개전 당시 국군1사단장)과 이왕우 선임 연구원님께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 강원도 홍천군 토박이말을 감수해 주신 홍천문화원과 홍학기 사무국장님께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 강원도 홍천군 방언 자료 제공 및 홍천문화원을 소개해 주신 홍천군청과 기획감사실 김영조 주무관님, 장순희 학예 연구사님께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 6.25전쟁 당시 강원도 영월의 동강을 건너는 다리와 상황 묘사에 대해 검토해 주신 영월군청과 기획혁신실 이선규 계장님, 영월문화원의 엄흥용 원장님께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 서울 대학로 낙산 사진의 사용을 허락해 주신 홍진우 님께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 연재 전 강원도 어르신들의 검토를 받았던 귀녀 씨의 말투가 홍천문화원의 전문적인 감수를 통해 홍천군 토박이말에 보다 가깝게 재정리되는 과정에서, 4회와 14회에 실렸던 ‘도망채요’를 ‘도망가유’로 바꾸었음을 알려드립니다. 혼돈을 드려 죄송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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