둘째날












 18. 하수 : 할머니의 꿀물  


 

 



 

 

 

  마셔도 너무 마셨어. 백동중학교 앞에서, 청량리역에서, 또 기차에서 오늘 들이킨 진한 아메리카노만 5잔이 넘는다. 그래서인지 밤 12시가 다 됐는데도, 내 눈은 피카추처럼 지나치게 말똥거린다고! 하, 오늘도 꿀잠을 자긴 틀린 걸까?
 

 

  혼자서 휑뎅그렁한 역을 지나 밤의 어둠 속으로 발을 내딛는다. 여기는 경상북도 영주시. 논밭을 빼고 나면 시내라고 해 봤자 끝에서 끝까지 걸어서 30분인, 인구 10만 남짓의 소도시다. 손녀의 말을 들어 주던 귀녀 씨의 넉넉한 품을 봐서일까, 집을 나온 실감이 뒤늦게 파고든 걸까. 겨우 하루가 지났을 뿐인데, 알프스를 도둑맞고 찾는 파란만장한 신세계를 겪으면서 가출의 설렘과 핑크빛 환상은 저 멀리 안드로메다은하로 날려 보낸 지 오래다. 이번 가출의 목표가 가방을 잃어버렸다가 찾는 건 아닌지 착각이 들 정도라니까? 집으로 돌아가 엄마를 마주할 마음은 아직 없지만, 어제처럼 야릇한 게임 소리로 가득한 지저분한 PC방 의자에서 불편한 쪽잠을 자기는 싫고. 과학적으로 폭신하게 설계된 침대에 길들여진 나의 야생성은 겨우 이 정도였나 보다. 그러니 어쩌겠어? 나의 귀녀 씨를 만나러 올 수밖에. 
 

  가방을 끌고 텅 빈 밤의 광장을 터덜터덜 걸어간다. 선비의 고장답게 커다란 선비곰탕집과 촌스런 특산물 가게가 늘어선 모습을 보니, 서울에서 정말 멀리 온 듯하다. 텅 비었거나 어떻든 존재감만으로도 나를 쏠쏠히 달래 주는 알록달록한 알프스와 함께 시골길을 걸으니, 비로소 진정한 여행자가 된 기분도 들고. 어이, 은하수. 무슨 소리야, 정신 차려! 아무 일 없었으면, 지금쯤 환상적인 파리의 밤을 배경으로 수혁을 만나고 있을 나라니까? 하, 다시금 속이 쓰리다. 역시, 너무 쉽게 용서해 버렸어. 운의 뒤통수에 더 세게 한 방 먹여야 했다고! 별이 총총한 밤하늘에 대고 혼자 때늦은 분풀이를 할수록, 죄 없는 배만 찌릿찌릿할 따름이다. 그만하자. 이제 와서 열을 올려 봤자 나만 손해라는 말씀! 그러고 보니 하루 종일 밥다운 밥을 못 먹었다. 에휴, 할머니 댁이 역에서 5분 거리라서 그나마 다행이야.

  내게 배고픔 다음으로 중요한 고민은, 할머니다. 만나서 무슨 말을 늘어놓아야 내가 이 밤중에 여기까지 내려온 게 자연스러워 보일까? 영주 토박이로, 선생님을 하다가 시청 공무원인 할아버지를 만나 결혼하고 평생을 이곳에서, 그것도 한 고등학교에서만 33년간 아이들을 가르치며 살아온 할머니다. 엄마표 헬리콥터도 피할 겸 한국을 떠나서 유럽 곳곳을 돌아다니며 살고 싶은 나로서는, 상상만으로도 숨이 턱턱 막히고 누가 공짜로 준다 해도 거절할 따분한 삶이다. 하지만 인생에 대한 할머니의 자부심은 안정된 삶에 대한 만족을 디딤돌 삼아 요란할 정도로 영주 하늘을 찌른다. 하나뿐인 아들을 보란듯이 서울의 명문 대학으로 유학 보내 뒷바라지한 결과만 보자면, 오늘날 우리집이 누리는 경제적 풍요로움에 대해 아빠는 할머니에게 땅바닥에 이마가 닳도록 절을 해야 마땅하긴 하다. 하지만 3년 전 우리로서는, 아니 어쩌면 부모님은 아실지도 모르니까 나로서는 짐작할 수도 없는 어떤 이유로 할아버지와 황혼 이혼을 한 뒤로는 할머니 스스로도 뭔가 한풀 꺾인 느낌이다. 누구 앞에서든 꼬장꼬장한 태도가 여전한 건 오히려 다행이라고 해야 할까? 그래도 하나뿐인 손녀인 내게는 언제나 교사로서의 품격에 맞춰 큰소리치는 법 없이 예뻐해 주셨기에, 나는 어려서부터 엄마나 아빠보다도 할머니를 더 잘 따랐다.
  어쩌면 이미 내 가출 소식을 알고 계시겠지만, 작은 일로도 야단법석을 떠는 여느 할머니들과는 달리 나를 야단치거나 혼내는 대신에 카랑카랑한 목소리로 엄마에게 전화해 주실 거야. 손 안 대고 코를 풀 수 있으니까 그것만으로도 감사하다는 말씀! 비록 귀녀 씨처럼 함께 울어 주지는 않겠지만, 사람은 다 다르니까. 내가 우리 할머니를 선택할 수도 없는 일이고. 그러려면 엄마와 아빠부터 골라야 하는데, 그건 불가능하니까.

  “누구니껴?”
  한밤에 울리는 초인종 소리를 듣고도 할머니는 놀란 티도 안 난다. 나이가 들면 초저녁잠이 많다던데, 우리 할머니는 예외일까? 자주색 숄을 두른 회색 실내복 차림에, 촘촘히 빗어 넘긴 단발머리를 정갈하게 묶었다. 퇴직하신 지 오래지만, 언제 봐도 왕년의 선생님이다. 좀처럼 흐트러진 모습이나 당황하는 얼굴을 본 적이 없다, 적어도 내 기억으로는. 소행성이 지구에 충돌하거나 빙하기가 다시 돌아온다 해도, 우리 할머니는 눈 한 번 깜짝하고 말 거야! 
  그나저나 마스카라가 번져 판다가 친구하자고 달려들 가엾은 눈, 립스틱이 지워져 영양실조라도 걸린 듯 허옇게 튼 입술… 내 몰골은 그야말로 북한 꽃제비도 놀릴 만큼 엉망이다. 나는 무슨 말이라도 해야 할 것 같아서 입을 달싹거린다.
  “보고 싶어서… 왔어요.”
  “오냐, 잘 왔데이.”
  할머니는 말이 끝나자마자 얼른 나를 끌어당기고선 걸치고 있던 숄을 벗어 귀한 보물처럼 감싸 준다. 여기 오길 잘했어, 따듯해. 우리 할머니도 귀녀 씨처럼 더 이상 아무것도 묻지 않는다. 그저 본인이 해야 할 일에 집중할 뿐이다. 달짝지근한 꿀물을 한 잔 타 주곤, 나의 갑작스런 방문이 서로가 미리 약속했던 일인 듯 자연스레 내 잠자리를 보러 간다. 뜨끈한 단물이 식도를 타고 내려가자 긴장이 풀리면서 잠이 스르르 쏟아진다. 아, 이대로 잠들어도 좋아.

  “수야, 자나? 누워서 자야제?”
  “…….”
  “불쌍한 우리 강아지. 지 애미한테 얼마나 시달렸으면 집을 나왔을꼬. 쯧쯧.” 
  삑삑삑삑… 눈은 감겼지만 잠이 완전히 들지는 않은 어렴풋한 상태에서, 할머니가 휴대폰을 누르는 소리가 아득하게 들린다. 우리집에 전화하는 걸까? 할머니가 엄마에게 뭐라고 말씀하실까…? 곧이어 할머니의 나지막한 목소리가 내 귀를 간질이는 듯하다.
  “애미냐? 내다. 하수, 여기에 왔데이. 애한테 무슨 일이라도 생겼으면 어쩔 뻔 했노! 아를 그만 좀 들볶아라. 오죽하면 집을 나왔겠나. 야야, 그리고 내가 뭐랬노? 이럴 때를 대비해서 하나를 더 가져야 한다고 했제? 시어미가 은 씨 성을 이어 줄 손자 하나만 낳으라고 누누이 일렀거늘 아들 같은 딸만 하나 키웠구나.”

  지금 내가 깨어 있는 걸까, 꿈을 꾸는 걸까. 내 발로 걸어가 이부자리에 누운 건지, 소파에 기대 그대로 잠이 든 건지 모르겠다. 그저 할머니의 꿀물에 취해 끝도 없는 잠의 망각 속으로, 나는 빠져든다. 하, 세상이 무너지더라도 일단은 한숨 자고 다음은 그 다음에.







* 영주역 사진의 촬영 및 사용을 허락해 주신 윤원대 사진작가님께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저작권자 © 스토리오브서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