둘째날












 10. 하수: 잠복근무


 




 


 

 “주문하신 아메리카노 1잔 나왔습니다!”
  공기를 가르는 아르바이트생의 외침에 정신이 퍼뜩 든다. 눈이 감긴 잠깐 사이, 200만 광년이나 떨어진 안드로메다은하라도 다녀온 기분이다. 커피를 들고 돌아와 졸린 눈을 비비며 길 건너편에 있는 중학교 교문을 살핀다. 등교가 끝나서인지 얼씬거리는 사람 하나 없이 조용하다. 내가 정말, 자리 하나는 기가 막히게 잘 잡았다! 여기서 횡단보도만 건너면 바로 백동중학교 교문이라서, 1층 창가 구석에 있으면 나를 들킬 걱정 없이 한눈에 놈을 찾을 수 있단 말씀!

  오전 11시가 갓 넘은 시간, 가을 햇살이 쏟아지는 중학교 앞은 한가로울 따름이다. 여기가 정말 대학로인지 의심이 들 정도다. 학교 담벼락에 올라앉아 열심히 발을 핥는 까만 길고양이 말곤 다른 움직임도 없다. 이런 황당한 상황만 아니라면 햇볕이 잘 드는 2층 창가로 옮겨서 밀린 잠이나 실컷 자고 싶다니까? 하, 그새 나의 파리와 수혁을 잊다니… 놈만 아니었으면, 아마 지금쯤 파리 샹젤리제의 라 뒤레에서 수혁과 달콤한 로즈 마카롱을 한 입씩 나눠 먹고 있을 나라고! 이제 겨우 하루가 지났을 뿐인데 어이없게도, 가출에 대해 내가 꿈꾸던 모든 상상이 비현실적으로 멀게만 느껴진다.


  벌써 2잔째, 먹물처럼 쓴 커피를 들이킨다. 턱까지 내려앉던 눈꺼풀이 이제야 조금 떠지는 듯하다. 어제 PC방에서 백동중학교 홈페이지를 샅샅이 뒤지느라 새벽까지 밤을 새웠더니, 내가 좋아하는 부드러운 카페 라테로는 비틀거리는 몸을 제대로 가누기도 어렵다. 계획대로 움직였으면 아침 일찍 와서 등굣길에 놈을 잡았을 텐데, 새벽에 든 잠이 어쩌자고 대책 없는 늦잠으로 이어져서 지금 여기서 헛발질을 하고 있다. 하긴, 그나마 다행이야. 내 코 고는 소리에 놀란 PC방 직원이 안 깨웠으면 아직도 퍼질러 자고 있을 뻔 했다니까?

  실은, 놈이 진짜로 중학생인지도 아직 모른다. 백동중학교 도서관의 책을 가지고 있었다는 사실만으로 중학생이라거나, 이 학교에 다닐 거라고 단정할 수는 없으니까. 『레 미제라블』도 어디서 훔친 걸지 누가 아느냐고. 운 좋게, 인터넷에서 찾아낸 이 중학교에 정말로 놈이 다닌다면, 오늘 안으로는 제 발로 걸어 나오겠지. 나는 그때까지 잠들지 않을 인내심과 카페인이 가득한 아메리카노만 꾸준히 채우면 된다.
  대한민국의 평범한 중학생이 집에 가려면, 아직 멀었다. 그런데도 이 시간부터 여기에 죽치고 앉은 이유는, 놈이 그다지 바른 학생은 아닌 것 같아서다. 어제 분명히 학교에 있어야 할 시간에 사복을 입고 지하철을 타고 있었으니까. 그런 놈이 오늘이라고 학교에서 얌전히 공부에 집중할 리 없으니, 점심시간이든 청소 시간이든 도중에 땡땡이칠 가능성에 대비해야 한다. 물론 놈이 담치기를 하거나 자기들끼리만 알고 있는 개구멍으로 빠져나갈 수도 있지만, 그렇다고 요즘처럼 보는 눈이 많은 세상에 남자 중학교 주변을 빙빙 돌며 감시할 수도 없는 노릇이니까. 갈 데까지 간 문제아가 아니라면 이틀 연속으로 오전에 도망치진 않을 거야. 그럴 정도면 아예 학교에 나오지도 않을 거고, 『레 미제라블』을 읽지도 않을 거라고. 잠깐, 놈이 빅토르 위고의 책을 읽는다는 점에 내가 너무 높은 점수를 준 건 아닐까? 어쨌거나 놈이 막가는 날라리든 어제 잠깐 일탈한 모범생이든 간에 오늘만은 제발 학교에 있어 주길 바라는 수밖에. 내가 마음을 결정할 때까지라도.

  놈을 찾으면 어떻게 잘근잘근 씹어 먹어야 속이 후련할까? 어젯밤에 눈을 부릅뜨고 컴퓨터 자판을 두드리면서 고민해 봤다. 가장 마음에 든 계획은, 경찰차를 타고 사이렌을 울리며 학교로 들이닥쳐서 멱살을 잡고 끌어내는 거다! 꼭 수업 중에 교실로 쳐들어가서 시끄러운 소동을 일으키며 전교생이 보는 운동장으로 질질 끌고 나올 거야. 그래야 망신을 톡톡히 주고 제대로 엿을 먹일 수 있으니까. 하, 상상만으로도 이틀 동안 묵은 체증이 다 내려간다! 
  단 하나, 마음에 걸리는 아주 작은 조각은, 이런 무자비한 보복이 내 어리석음을 덮으려는 지나친 복수심에서 나온 건 아닐까 하는 점이다. 사실 놈에 대한 내 감정은 날치기꾼에 대한 일반적인 느낌과는 조금 다르다. 길에서 우연히 재수 없게 가방을 도둑맞은 사람의 마음이라기보다는, 내 심장을 주물럭거리며 놀다가 바닥에 던져 버린 남자에게 느끼는 애정 섞인 미움에 가깝다고나 할까? 얼토당토않은 깊은 배신감까지 실시간으로 쑥쑥 자라나는 중이다. 가방을 보던 놈의 눈빛을 내가 착각했든 어쨌든, 나는 감수성이 넘치는 꽃다운 처녀로서의 자존심을 싹둑 베였다고! 나도 알아. 문제는 놈에게 흔들렸던 내 마음이라니까? 놈이 프랑켄슈타인처럼 소름이 끼치게 못생겼더라도 내가 그렇게 홀려서 가방을 내줬겠냐고. 그러니까, 태양계를 넘어서라도 우주 끝까지 쫓아가 꽃미남의 명예에 걸맞은 대가를 치르게 만들겠어! 오늘 아침까지는, 이 생각뿐이었다. 

  그런데… 백만 년 만에 중학교 앞에 오니, 봄철 개구리처럼 사방팔방으로 뛰고 무슨 일을 해도 실수투성이이던 ‘여중생 은하수’가 떠오르고 말았다. 수업 시간에 쌤 몰래 만화책을 돌려보다 걸려서 벌을 서면서도 잘못했다는 생각은커녕 뭐가 그리 좋다고 친구들과 깔깔대던 나, 생리통이 심한 날엔 때로 학교 앞 문구사에서 볼펜이라도 슬쩍하고 싶던, 중학생 은하수가 자꾸만 아른거린다.
  교문 너머, 중학교 운동장에서 뛰어다니는 남자애들의 모습도 덩치만 커다랗지, 아직은 한참 덜 자란 수컷처럼 어리게만 보인다. 그래, 너희가 이 험한 세상을 어찌 알겠니? 모르니까, 실수할 수 있어. 가방 하나 때문에 창피한 꼴을 당하면 애들이 왕따를 시키거나 쌤한테 문제아로 찍힐지도 모르고. 이 누나의 자비심이 우니, 한 수만 고이 물러 줄까? 나는 플라스틱 빨대로 생명줄과도 같은 커피를 쪽쪽 빨아당기며, 놈에게 치명타를 안 날리면서도 가방을 깔끔하게 되찾을 신의 한 수를 찾으려 머리를 굴려 본다. 
  학교 밖에서 덮치면 어떨까? 물론, 놈이 학교에서 나온다 해도 다짜고짜 달려드는 건 동네 바보나 하는 짓이다. 체격으로 보나 다리 길이로 보나 오히려 내가 끽소리도 못 내고 어두운 뒷골목으로 끌려가거나, 달아나는 놈을 정신이 빠지게 쫓아가야 한다고. 요즘 중학생들이 얼마나 무서운지는 나도 익히 안다. 아니, 들었다! 면도날을 좀 씹는 애들은 나를 단물이 빠져서 뱉은 껌으로도 안 볼 거야. 그러니 놈이 나오면, 무조건 몰래 따라붙자! 학원을 가든 오락실을 가든 또 다른 가방을 훔치든 눈에 안 띄게 그림자처럼 뒤를 밟다가, 집으로 따라가서 놈의 부모님과 외교의 달인인 서희 뺨치는 담판을 짓는 거야. 도둑질을 직접 시키지 않은 이상, 아들을 감쌀 부모는 없을 테니까. 최대한 조용하게 설득해서 가방을 돌려받으면 안녕! 다시는 볼 일이 없다! 나는 파리로 가서 수혁을 만나고, 진정한 해피 엔딩, 피날레, 끝이란 말씀! 잠깐만, 사람 일을 어떻게 알겠어? 앵벌이 조직처럼 부모가 도둑질을 시키는지도 몰라. 그래, 일단 초인종을 눌러서 부모를 대문 밖으로 불러내는 게 좋겠어. 조금이라도 이상한 낌새가 보이면, 이미 경찰을 불렀다고 해서 공황 상태로 만든 다음, 틈을 봐서 달아나 빛의 속도로 신고해야지. 집주소를 알고 있으니 그쪽도 내게 허튼 짓은 못할 거야.

  이런저런 가능성을 꼼꼼히 따져 보는 동안, 어느새 정오가 훌쩍 넘었다. 가게 안이 갑자기 떠들썩해지더니 붐비기 시작한다. 교복 차림의 남자애들이 끝없이 쏟아져 들어오며 저마다 주문을 외치니, 경매장이 따로 없다. 천둥벌거숭이들 같으니라고! 가까이서 보니 더 놀라 자빠질 지경이다. 초등학교 때, 내가 짝사랑했던 중2 오빠는 나보다 훨씬 어른스럽게만 느껴졌는데, 이럴 수가… 지금 보니 식스팩을 단 뇌섹남으로 자라야 한다는 압박감을 꼬리뼈처럼 몸에 달고 다니는, 한낱 꼬맹이들이다. 스스로는 충분히 자랐다고, 세상을 다 안다고 여길 소년들의 낯선 세계를 신나게 구경하고 있는데, 느닷없이 놈이 나타났다! 
  땅속에서 포근하게 겨울잠을 자다가 굴착기에 뜨여 화들짝 깬 고슴도치처럼, 깜짝 놀라 얼른 손으로 이리저리 얼굴을 가리지만 어제 입었던 옷 그대로인 나를 알아차릴까 안절부절못하겠다니까? 놈은 왜 하필이면 또 남중을 다니느냐고! 가슴이 달린 여자라면 자다가도 벌떡 일어날 일상적 흥분 상태의 동물이 사춘기의 남자애들이다. 여기에 달랑 나 혼자 있으면 눈에 뛸 거란 생각을 왜 못했을까? 숨어서 엿보는 탐정 놀이에 빠진 나머지, 내가 구경거리가 될 줄은 몰랐다. 아니나다를까, 여드름이 올라와 얼굴이 벌레 먹은 케일처럼 숭숭한 남자애가 나를 힐끔거리기 시작한다. 들키면 안 돼! 나는 허둥거리며 가방에서 『프랑스 미식 기행』을 꺼내 코를 박은 채로, 살그머니 놈의 옆모습을 쫓는다. 

  세상에! 다시 본, 교복을 입은 놈은 완전체 중학생이다. 하, 어제는 도대체 어딜 보고 내 나이라 착각한 걸까? 하지만 약이 올라도 또다시 인정할 수밖에 없는, 빛나는 외모의 소유자임은 틀림없다. 매끈한 얼굴 속에 세상을 꿰뚫을 듯 깊은 눈빛과 어떤 일에도 쉽게 흔들리지 않을 단단한 입매를 가졌다. 베네치아의 가면 볼토(volto) 같은 느낌이랄까? 밝고 화려하지만 한편으론 세상을 비웃는 듯 묘한 싸늘함이 느껴진다. 냉정과 열정이 어우러져 감도는 얼굴, 역시 특별해! 식도가 울렁거리면서 자꾸만 보고 싶다. 아무리 봐도 도둑질하고 다닐 인상은 아니라고. 하긴 사람 속을 누가 다 알겠어?

  놈의 옆에 선, 키다리 역시 분위기가 남다르다. 밀가루가 친구하자며 조를 정도로 새뽀얀 얼굴에 쌍꺼풀이 살짝 진 눈, 입가엔 미키 마우스 같은 미소를 짓고 있다. 우월한 유전자를 가진 놈들은, 다른 남자애들을 원숭이로 보이게 만들며 주문대 앞에 줄을 서서 차례를 기다리고 있다. 앞쪽에서 어떤 뚱뚱한 남학생이 버거를 20개나 시킨 탓에 줄은 좀처럼 줄어들지 않는다. 그 사이 기다리느라 심심한지 놈이 쓸데없이 매장 안을 두리번거리기 시작한다. 마음이 조마조마하고 심장이 쪼그라들어서 쓰러질 지경이다. 어이, 앞을 봐! 오른쪽으로 조금만 더 고개를 돌리면 내가 들킨다고! 그때 미키 마우스가 입을 열어서 다행히 놈이 그쪽으로 얼굴을 돌린다. 나는 책 위로 눈을 빼꼼 내밀고 귀에 레이더망을 켜서 집중한다. 
  “운아, 학교 정했음?”
  “학교?”
  “어. 곧 진학 상담 있음.”
  “윽, 민우 넌?”
  놈의 말에 미키 마우스가 오른손 집게손가락을 턱에 받치며 씩 웃는다. 
  “알다시피, 난 죽을 때까지 춤꾼임.”
  “고등학교야 어차피 졸업장이나 따러 가는 거지. 아님 말고.” 
  놈의 말에, 미키 마우스는 신이 나서 떠들기 시작한다.
  “그치? 나도 멋지게 춤추기 위해 꼭 고등학교를 갈 필요는 없다고 봐. 우리 크루 형들이나 길거리에서 배우는 인생이 더 크거덩. 근데, 우리 꼰대가 알면 또 울며불며 난리칠 거라 대충 아무 학교나 시키는 대로 가서 시간이나 때울라고. 흐, 입학하자마자 졸업장을 주는 고등학교는 어디 없나?”

  뎅뎅뎅뎅… 연말도 아닌데 보신각의 종소리가 머리 좌우에서 33번도 넘게 연달아 울린다. 어이, 철없는 동생들! 이게 무슨 대낮에 전봇대로 귓구멍을 쑤시는 소리야? 대학은 당연히 나와야지! 요즘처럼 대졸자도 취업이 어려운 세상에서, 슬렁슬렁 대충 딴 고등학교 졸업장으로 어떻게 살아가려고 그래? 우리 엄마가 항상 늘어놓는 잔소리가 수다스럽게 맴도는 내 머릿속과는 관계없이, 녀석들의 대화는 이어진다. 이번에는 놈이 말을 꺼낸다.
  “크루 형들은 잘 있지?”
  “안 그래도 무석 형이 너 좀 보자더라. 언제 시간 남?”
  “날? 왜…?”
  “돌고래처럼 우아하고 폼나게 춤추자, 우리 더스키돌핀 크루의 모토 아님! 형이 우리 춤에 네 랩을 더하면 어떨까 하더라. 돌고래가 밤바다를 헤엄치듯 환상적일 거라나?” 
  “미안하다. 나 그럴 여유 없는 거 알잖아.”
  “요 맨, 생각이라도 해 봐. 그렇게 딱 자르면 왕섭섭함.”
  놈은 슬쩍 고개를 돌려 정면에 있는 메뉴판만 뚫어지게 쳐다보며 말한다.
  “솔직히 내 랩은, 그냥 좋아하는 수준이지. 그 정도 실력으로 밥이라도 먹고 살겠어? 괜찮다, 들어줄 만하다로는 부족해. 비와이나 자이언티처럼 진짜로 끝내주지 않으면, 랩으로 돈을 벌기는 무지하게 어려워.”
  “헤이, 브라더! 자신감을 가져! 넌 내가 아는 래퍼 중 갑임! 12살에 시작해서 회사까지 차리고 자기 힘으로 흙수저에서 금수저로 완전히 바꿔 문 도끼를 생각행.”
  “도끼도 마찬가지고, 성공한 래퍼 중에 자기 자신과 싸워 가며 죽도록 노력하지 않은 사람은 없어. 근데 그렇게 되기까지 밑바닥에서 얼마나 오래 굴러야 할지는 아무도 모르잖아? 할머니랑 린일 생각해서라도, 나는 길에서 랩이나 해서도 안 되고 너처럼 비보이가 되서 춤추다가 어딜 다쳐서도 안 돼.”
  미키 마우스가 딱한 표정을 짓더니, 놈의 어깨를 툭 친다.
  “더럽게 현실적인 놈!”

  하, 여기서 놈의 얘기를 들으니, 그동안 내가 어디 별세계에서 살다 온 건지 당최 적응이 안 된다. 아마존 원주민은 세상이 강과 수풀로만 가득찬 정글이라고 생각할 거고, 사하라 사막을 오가는 낙타는 타는 목마름의 연속일 뿐인 삶에 지쳐 혹으로 갈증을 폭폭 내뿜고 있을지도 모른다. 지금까지 내 주변엔, 수능에서 1점이라도 더 받아서 얼마나 좋은 대학을 가느냐가 인생 최고의 목표이자 고민인 애들만 득시글거렸다. 별다른 꿈이 없던 나 역시도 대학을 안 가는 길은 아예 생각해 본 적이 없다. 학교 도서관에 가면, 가상의 순위표에서 조금이라도 위에 자리한 대학으로 옮기려고 1학년 1학기도 지나기 전에 재수 생활로 접어든 애들이 가을 낙엽처럼 발에 차일 정도다. 물론, 그렇게 해서 대학을 옮기더라도 끝이 아니다. 졸업한 뒤에 의학전문대학원이나 로스쿨처럼 취업이 잘 되는 쪽으로 전공을 바꾸느라 또다시 긴 세월을 보내는 선배들을 보면, 도시락을 5개씩 싸서라도 온종일 쫓아다니면서 말리고 싶긴 했다. 이름만 대면 아는 명문 대학을 나온 우리 아빠나 엄마도 결코 행복하진 않으니까. 인생, 뭐 있어? 씁쓸함이 가슴속에서 바람개비처럼 빙글빙글 도는 나는 아랑곳없이, 나 같은 대학생보다 인생을 더 아는 체하는 중학생들의 대화는 계속된다. 
  “인마, 가족들을 위해서 사는 거 말고, 널 위해서 하고 싶은 건 없음?”
  안타까움이 묻어나는 미키 마우스의 말에 놈은 슬프게 웃는다. 몰래 훔쳐보는 내 마음까지 괜스레 아프게. 그리곤 점심 메뉴처럼 대수롭지 않은 일을 말하는 것처럼 담담하게 되묻는다.
  “그거 말고, 또 뭐가 있어야 하지?”
  미키 마우스는 말문이 막히는지 잠깐 멈칫하더니, 깊은 한숨을 내쉬곤 묻는다.
  “그럼 돈은 어떻게 벌 거? 대학도 안 가고, 무슨 계획이라도 있음?”
  “아직. 어차피 대학이야 형편이 좋은 놈들만 가는 곳이지, 나한텐 해당 없음이야.”
  그 말을 끝으로 놈은 잠자코 메뉴판만 노려본다. 내가 아무리 이 세계의 존재를 방금 인정했다 해도, 이렇게 대책 없는 사고방식은 여전히 이해가 안 간다. 그런데… 놈의 냉정한 대꾸를 듣자, 반갑지 않은 물음표가 스멀스멀 고개를 드는 건 왜냐고. 대학을 안 나오면 세상을 살아가기 어려운 거 맞아? 나야말로 대학생이란 값비싼 포장지를 두르고 스스로 판 우물 안에 숨어서 개굴개굴하는 건 아니야? 혹시 놈이 나보다도 더… 삶의 본질을 꿰뚫고 있는 건 아닐까? 내가 전부라고 알던 세계가 사실은 작은 섬일 수도, 그 밖엔 밀림도 있고 사해도 있고 빙하도 있고 무엇보다 드넓은 바다와 대륙이 펼쳐져 있음을 외면해 온 건 아닐까? 그동안 부모님과 학교라는 튼튼한 울타리 안에서 얼마나 보호받으며 살았는지를, 나는 사레가 들리듯 갑작스레 깨달았다. 가출이랍시고 무턱대고 뛰쳐나와서는 가방 하나 없어졌다고 발만 동동 구르고 있는 나 자신이 바로 이런 과보호의 산증인인지도 모른다. 입안을 가득 채우는 부끄러움의 맛을 감추려 식어 버린 커피를 마셔 보지만, 지독한 카페인도 이럴 땐 별로 도움이 안 된다.
 
  잠시 뒤에 살짝 빨개진 눈동자로 바닥을 내려다보더니, 놈이 혼잣말처럼 중얼거린다.
  “그깟 내 미래보다도, 난 벌써부터 군대에 갈 생각에 돌아 버리겠어. 할머니랑 린일 두고 가야 하잖아.”
  놈의 말이 찹쌀떡처럼 걸려 목이 멘다. 고등학교도 가기 전에 가족을 먹여 살릴 걱정이라니… 도대체 내가 정상이라고 생각했던 세계가 정말로 존재하긴 하는 걸까? 눈앞이 풍차처럼 어지럽게 돌아간다. 이 애들이 살아가는 이곳이야말로, 꿈틀거리는 진짜 세상이 아닐까? 지금껏 나를 둘러싼 사람들은 누구나 성적과 대학 고민에 빠져 살았고, 연애와 취업을 당연한 통과의례처럼 요란스레 겪었다. 여기서 예외인 사람의 존재에 대해서 나는 알지 못했고, 생각해 본 적도 없으며,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도 모르겠다. 내가 디디고 선, 대리석처럼 단단하던 세계가 얼음판이 녹듯 서서히 얇아지는 느낌이다. 흘러나오는 가느다란 숨결에도 사방으로 금이 갈까, 불안이 눈가의 주름처럼 자글자글 몰려온다고. 나는 다만 약간 얼빠진 상태로, 그토록 찾아 헤매던 놈의 이름, ‘운’이라는 이름만 되뇐다. 운이었어, 운!

  “착한 버거 두 개요? 2천원입니다!”
  뚱뚱한 남학생이 나갔는지 줄이 순식간에 줄어들더니 놈이 주문을 하고 잠시 기다리자 곧 햄버거가 나왔다. 미키 마우스가 종이봉투를 받아드는 사이, 놈이 갑자기 먼저 뒤로 몸을 돌린다. 재빨리 책으로 얼굴을 완전히 가려 보지만, 타조가 땅에 머리를 묻고 스스로만 안전하다 여기는 꼴은 아닐까? 잠깐만, 근데 나 왜 숨어?
  지금 피부로 다가오는, 균형이 깨진 공기의 흐름으로는 놈이 잠시 이쪽을 돌아보며 멈칫하는 듯 했지만, 알 수는 없는 일이다. 고개를 빼서 확인할 용기 따윈 없으니까. 결승선을 통과한 마라톤 선수처럼 규칙적으로 숨을 몰아쉬며 충분한 시간이 흐르길 기다리다가, 가게 안의 소란이 썰물처럼 빠져나간 뒤에야 책을 천천히 아래로 내린다. 진정한 잠복근무는 이제부터 시작이다!



 


 

* 베네치아 가면 볼토 사진의 사용을 허락해 주신 데미오스(demioergos.com) 이수한 대표님께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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