둘째날












 17. 린과 운 : 진실 게임 


 

 



 

 

   낡은 대문을 열고 집으로 들어선다. 담 그림자가 내린 마당 한구석, 언제나처럼 맨드라미 앞에 쪼그리고 앉은 할머니가 보인다. 익숙한 풍경을 보자 조마조마하던 운의 마음이 조금 놓인다. 아직 안 왔나? 운이 다가가도 할머니는 그대로다. 역시 여느 때와 같다. 할머니의 진짜 알맹이는 오늘도 전쟁터 속 어딘가를 헤매겠지. 아님 말고.
  흐린 거실 등이 켜져 있을 뿐, 집 안은 조용하다. 린인 벌써 자나? 조심스럽게 현관으로 들어가 방문을 열자 침대 한쪽에 웅크리고 누운 린의 뒷모습이 보인다. 방 안 어디에도, 가방은 없다. 윽, 안 왔을 리가 없지! 그나마 다행이다. 린이 자고 있으니 적어도 내일 아침까지는 가방에 대해 아무 말 안 해도 되잖아? 운은 린의 방 창문이 잘 잠겼는지 확인하고 할머니 방으로 간다. 오늘따라 할머니는 왠지 더 추워 보인다. 놀라서 몸을 잔뜩 오그라뜨린 고슴도치를 닮았다. 밤공기는 하루가 다르게 썰렁해지는데, 할머니는 점퍼는커녕 양말도 안 신고 마당에 앉아 있다. 가만히 두면 언제까지나 저렇게 있겠지. 할머니의 정신이 멈춘 곳이 푸릇푸릇한 여름날이라면, 실제로도 그런 줄 알고 밤이 새도록 세상모르다가 얼어 죽을지도 모른다. 그런 일은 일어나면 안 돼, 아직은. 내가 어른이 되기 전까지는 절대로! 옛날식 자개장롱에서 두툼한 오리털 점퍼를 챙겨서 마당으로 나가 할머니에게 입히고 잘 여며 준다. 양말도. 이번 생이 쫄딱 망해서 세상을 뜨고 싶어도 꾹 참아, 할머니. 제발 조금만 더 우리 곁을 지켜 줘. 
  곧 몸에 온기가 돌겠지만, 새파랗게 질린 깡마른 손을 보니 그래도 안심이 안 돼서 시든 풀처럼 아래로 힘없이 늘어진 할머니의 손을 점퍼 주머니에 넣어 주고, 운은 현관 계단에 앉는다. 시멘트라 금세 엉덩이가 시리다. 이제 보잘것없는 내 체온까지 뺏으려 드는 거지. 쳇, 이놈의 개떡같은 세상! 징글맞게 매정해서 진절머리가 난다. 죄 없는 맨드라미에 대고 소리나 질러야지! 린이 자고 있으니 입 모양으로만.

  오랜만에 이렇게 화단을 바라본다. 엄마가 끔찍이도 아끼던 촛불 맨드라미가 수북하다. 언제였지? 오후 내내 나랑 놀지도 않고 화단만 돌보던 엄마에게 심하게 골났었다. 
  “엄마는 운이보다 맨드라미가 더 좋지?” 
  질투심이 가득한 나의 투정에, 엄마는 맨드라미가 좋지만 너보다는 아니라는 의미가 담긴 너그러운 웃음을 지으며 새치름하게 부푼 내 볼을 토닥였다. 
  “촛불 맨드라미를 들여다보면, 노랗고 빨간 불이 잔뜩 들어온 크리스마스트리 같아서 엄마는 행복해져.”
  엄마의 은은한 웃음이 다시금 귓가에 울려 퍼진다. 희미한 땀내가 배인 포근하고 그리운 엄마 냄새도 기억의 바람을 타고 마당에 흐른다. 하늘에서도 행복한 거지, 엄마? 운이 촛불 모양의 뾰족한 잎을 주렁주렁 단 맨드라미로 손을 뻗으려는데, 등 뒤에서 현관문이 삐걱거리며 열린다. 린이다.
  “아직 안 잤어?”
  “응. 오빠, 이제 온 거야? 밥은?”
  “생각 없어.”

  한참 동안 둘 다 말이 없다. 운은 주황색 남방이 집에 왔었는지, 가방은 어디로 사라졌는지 묻고 싶지만 차마 입이 안 떨어지고, 린은 오빠의 여자친구에 대해 확인할 기회만 찾고 있다. 운에게 연인이 생겼다는 사실이 아무래도 믿기질 않는 데다, 만약 여자친구가 아니라면 가방은 어디서 났는지도 알아야 한다. 하지만 어떤 대답을 들을지 몰라서, 린은 두렵다. 무엇보다 운이 거짓말을 할까 봐 겁나는 린이다. 꼭 진실을 알아야 행복한 건 아니야. 마주하기 싫은, 불편한 진실도 있거든. 이렇게 아무 일 없이 함께 있으니까 그걸로 충분한걸. 하지만 혹시… 오빠에게 어떤 나쁜 일이 일어나고 있는 거라면 어떡해? 너무 늦게, 내가 하나도 손 쓸 수 없게 된 뒤에 알게 되면? 그래, 그냥 진실 게임을 해 보는 거야. 내 진실의 끝에 오빠의 진심을 알 수 있을지도 몰라. 린은 깊게 심호흡을 하고, 운에게만은 영원히 감추고 싶었던 자신의 이야기를 시작한다.

  “오빠, 실은 나, 왕따야.”
  “뭐?”
  갑작스런 린의 고백에 운은 그 이상 다른 말을 할 수가 없다. 이게 무슨 소리지? 
  “네가, 도대체, 왜?”
  린이 어쩌다가? 수십 개의 물음표만이 잇달아 머리를 때린다. 남매다 보니, 사춘기에 접어들면서부터는 린이 불편할지 몰라 어디 멍이 들거나 까진 곳은 없는지 꼼꼼히 살피질 못했다. 운은 그동안 린이 보낸 SOS 신호를 놓쳤는지 모른다는 미안함과 지금이라도 알게 되서 다행이라는 안도감에 가슴을 쓸어내린다. 
  린의 반듯한 이마와 진한 눈썹, 매끈한 볼을 재빨리 훑어보지만, 흠집이 난 곳은 없다. 맞지는 않나? 윽, 하긴 바보가 아닌 이상 이렇게 잘 보이는 곳을 티가 나게 때릴 리가 없잖아! 이따가 밝은 방에 들어가서 다시 봐야겠어. 근데 도대체 누가 감히 겁도 없이 내 동생에게 손을 댄 거지? 온 세상이 들을 만큼 시끄럽게 뭐든 마구 깨부수고 싶은데, 지금 운의 손이 닿는 거라곤 약한 맨드라미뿐이다. 다 뽑아서 내던질 수도 없으니, 돌겠다! 쳇, 하긴 이제 와서 화를 내 봐야 무슨 소용이지? 결국 제일 한심한 놈은 나잖아? 지켜 준다면서 실은 동생에 대해 하나도 몰랐던 등신 새끼! 운은 부들부들 떨리며 힘이 들어가는 주먹을 겨우 교복 바지에 집어넣고 자신을 달래 본다. 린이 겁먹고 입을 다물지 않는 게 중요해. 절대로, 흥분하거나 화내지 말자. 일단은 린의 얘기를 듣자.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지를 알아야 움직일 수 있잖아? 운은 잠자코 귀에 안테나를 세우기 시작한다. 이제부턴 말에 숨겨진 작은 떨림까지도 잡아내야 한다.

  “놀랐지? 나도 처음엔 내가 왕따인지 몰랐어. 웃기지 않아? 교실에 이산화탄소가 차는 것처럼, 눈치 못 챌 만큼 아주 천천히 공기의 결이 달라지는 거야. 한두 명이 나를 보며 수군거리고, 여러 명이 자질구레한 시비를 걸다가, 나중에는 모두가 한통속이 돼서 나를 없는 존재로 대하는 거… 나는 그게 최악인 줄 알았거든? 근데, 아니야. 제일 밑바닥은… 뭘 해도 나쁜 년으로 몰리는 거였어. 그냥, 숨을 쉬는 거 자체가 힘들어. 외롭고… 슬퍼.”
  저녁에 할머니 앞에서 한 번 쏟아부은 덕분인지, 린은 말을 꺼내기가 한결 편하다. 수세미 덩굴처럼 온몸을 엉망진창으로 휘감은, 왕따라는 사슬도 조금은 헐거워진 느낌이다. 따가운 존재감은 여전하지만.
  “도대체, 왜, 네가, 그딴 일을 당해?”
  운은 가능한 모든 힘을 끌어모아 치솟는 분노를 억누른다. 잔뜩 일그러진 입술 사이로 짧은 문장이 찌그러지며 겨우 한마디씩 흘러나온다.
  “오빠, 미수 알지?”
  “미수?”
  “응, 초등학교 때 나랑 같이 피아노 학원에 다녀서 우리집에도 가끔 왔던 애 말이야. 혹부리 영감처럼 턱에 심술이 잔뜩 달라붙었다며 오빠가 싫어했잖아.”
  “쳇, 못된 팥쥐 같이 생긴 애?” 
  “맞아! 그 팥쥐가 나랑 같은 중학교에 와서 같은 반까지 됐어. 걔가 뒤로는 헛소문을 퍼뜨리면서, 내 앞에선 시치미를 뗀 거야.”
  이번에는 괜찮을 거라고, 지나간 추억을 얘기하는 것처럼 담담하게, 때로는 웃으면서 말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여전히 잘 안 되는걸. 린의 목소리는 어느새 굴절되며 힘겹게 오르내리기 시작한다.
  “애들은 나를 잘 모르거든. 근데 날 어릴 때부터 잘 안다는 애가 말하는 거야. 세상에서 제일 건방진 년이라고, 머리부터 발끝까지 재수없는 년이라고 말이야. 참 신기하게도, 대부분의 애들은 내가 그런 앤가 보다 하고 그냥 믿더라? 오빠, 난 바보 같이 눈 뜨고 코 베이고 말았어. 그런 다음에는 내가 어떤 말을 해도 변명밖에 되지 않아, 누구도 들어 주질 않아!”

  어쩔 수 없이 또 눈물이 흘러내린다. 저편으로 밀쳐놓았던 우정이 꽁꽁 막아둔 기억을 헤치고 달려든다. 미수와 현정의 괴롭힘이 갈수록 심해지던 여름, 반 애들의 시선을 피해 운동장 구석에 숨은 린을 찾아온 아이가 있었다. 반에서 유난히 말이 없는 편이던 우정은 그날따라 악마처럼 달콤하게 속삭였다. 
  “린아, 나는 미수의 말을 곧이곧대로 믿지 않아. 네 진짜 속마음을 듣고 싶어, 너란 사람을 알고 싶어.”
  그렇게 우정은 린의 여린 마음을 두드렸다. 내가 정말로 어떤 사람인지 궁금해하고 이해해 줬으면 하는 바람, 그저 단 한 명이라도 좋으니 솔직함을 나눌 친구를 기다리던 간절함… 우정은 그 틈을 파고들었다. 린은 요즘 이사카 씨를 좋아한다는 말로 시작해서 소설 얘기, 오빠 얘기를 하다가, 미수 때문에 힘들다는 말과 함께 피아노 학원의 악보 사건은 미수가 저지른 일을 덮어쓴 거라며 억울함까지 하소연하고 말았다. 다시 생각하면, 그저 멍청한 짓이었는걸. 그때는 오랜만에 학교에서 친구와 웃고 떠드는 즐거움에 잠시 눈이 멀었거든. 
  “듣고 보니 미수가 나쁘네! 너 혼자 많이 힘들었겠다. 이젠 내가 옆에 있어 줄게.”
  모범 답안을 외는 우정을, 린은 믿고 싶었다. 하지만 다정하게 팔짱을 끼고 돌아온 우정은 교실로 들어서자마자 린을 밀치고 현정과 미수 옆으로 가더니, 모두에게 들릴 정도로 빈정대기 시작했다. 
  “저년은 지 잘못을 하나도 모름. 다 미수 탓만 함. 토 나오는 줄 알았걸랑?”
  우정은 발 연기를 하는 영화배우처럼, 웩웩거리며 구역질을 하는 흉내까지 냈다. 그날 린은 결심했다. 앞으로 누가, 무슨 말을 하더라도, 직접 그 사람을 겪어 보기 전에는 함부로 판단하지 않을 거야. 어떤 더러운 말이 들리더라도 내가 본 모습이 진짜라고 믿어 줄 거야. 난, 너희와는 다르게 살 거야!
  우정의 배신이 떠오르자 다시금 마음이 아려서, 린은 머뭇거린다. 여기서 그만 말을 멈추는 게 나을지, 운에게 말하는 지금 이 순간조차 후회하고 마는 건 아닐지… 잘 모르겠는걸. 오빠는 내 말을 있는 그대로 믿을 거야? 왕따를 당하는 애들한테 문제가 있는 거라고 나를 탓하지 않을 거야? 더 많은 이야기를 털어놓기 전에, 린은 묻고만 싶다.

  “언젠가 그럴 줄 알았어! 어릴 때부터 난 걔가 네 주변에서 얼쩡거리는 게 싫었잖아. 웃는 얼굴 뒤로 널 향한 찐득찐득한 미움이 느껴졌다고 해야 하나?”
  “그랬어?”
  내 말을 믿어 준다! 하나를 말했더니 셋을 헤아리는 운의 말에, 린은 이제야 깨닫는다. 오빠는, 나쁜 예감을 알아차렸는지도 몰라.
  “기억나? 네가 초등학교 때, 팥쥐가 우리집에 찾아왔잖아. 찔러 죽일 거 같은 말투로 널 몰아세웠어. 너는 순해서 제대로 말도 못하고 우물쭈물했지.”
  시시콜콜 말 안 해도, 오빠는 알고 있는걸! 나를 믿는걸! 이해하는걸! 그것만으로도, 눈물이 핑 돌 만큼 기쁘다. 린은 코맹맹이가 되서 잠긴 목소리로 겨우 말을 잇는다. 
  “그랬어? 난 잘 기억이 안 나.”
  “나는 방에서 태권도 학원에 갈 준비를 하고 있었지. 창문으로 얘기가 다 들린다는 걸 너흰 몰랐을 거야. 어젯밤에 피아노 연습을 했냐며, 걔가 너한테 앙칼지게 따졌어. 네가 아니라고 하니까 그 애는, 자기 엄마가 어제 우리 엄마랑 통화해서 다 안다고 우겼지. 기린인 집에서도 매일 밤늦게까지 멜로디언으로 연습을 한다, 그러니까 벌써 체르니를 배우는 거라며, 자기도 하라고 해서 손가락이 아프도록 건반을 쳐야 했다고 소리쳤어. 너는 아니라고 했지만, 그런 게 아니라면 네 실력이 어떻게 집에 피아노가 있는 자기보다 더 빨리 늘 수 있냐며 팥쥐는 끝까지 따지고 들었지. 나는 사정을 잘 몰랐지만, 너를 믿었어. 내가 아는 너는, 그런 시시한 일로 거짓말하는 애가 아니잖아? 만에 하나 네가 그랬다 해도, 자기 엄마가 남의 아이랑 비교하며 강제로 피아노 연습을 시킨 걸 왜 너한테 와서 화풀이하는지도 이해가 안 됐지. 듣다 못한 내가 나가서 뭔가 잘못 안 것 같다고 말했어. 내가 그 일을 아직도 기억하는 이유는, 나를 보더니 깜짝 놀라 순간적으로 얼굴의 독기를 숨기고 착한 척하던 팥쥐의 표정 때문이야. 모든 게 자기 오해인 것 같다며 내 앞에서 쩔쩔매면서 네게 바로 사과까지 하잖아? 하지만 너를 보는 눈빛은 여전히 씹어 먹을 것처럼 차가웠어. 무지하게 황당했지. 그 순간, 걘 이 일로 죽을 때까지 널 미워할 거란 기분 나쁜 예감이 들었어. 질투에 눈이 멀어서 아무것도 안 보려 하는 모습이, 아이인데도 섬뜩할 정도였지. 그 뒤로 네가 팥쥐와 잘 안 어울리기에 특별히 조심하라고 말하지 않았는데… 내 실수였나?”
  이 모든 일을 막을 수도 있었다는 생각이 들자, 자신의 무관심이 아프도록 후회스러운 운이다.

  아니! 미수를 멀리하라고 오빠가 내게 알려 줬더라도, 그때의 나는 무슨 뜻인지 몰랐을 거야. 자책감이 배어나는 운의 말투에 린의 가슴도 아릿아릿하다. 문득 그날의 기억이 파노라마처럼 떠오른다.
  “오빠가 말하니 기억난다. 미수가 와서 난리를 피우기 전날, 걔네 집에서 온 전화를 받던 엄마 옆에서 난 책을 읽고 있었어. 오빠도 알잖아? 난 틈만 나면, 밤에도 자라는 잠은 안 자고 책만 읽어서 엄마의 골치를 썩인걸. 미수네 엄마가 나는 뭐하냐고 물었는지, 엄마가 ‘말썽쟁이는 또 책을 봐요’라고 웃으며 대답하는 걸 내가 분명히 들었거든! 근데 미수가 억지를 부려서 진짜 당황스러웠어. 하지만 금세 사과를 받았으니까, 나는 잊어버렸는걸. 미수보다 늦게 피아노 학원에 들어간 내가 먼저 체르니를 배우기 시작한 뒤로, 미수는 어제 집에서 몇 시간이나 연습했냐, 오늘은 진도를 어디까지 나갔냐며 매일 내게 캐묻곤 했거든. 그럼, 미수 엄마가 피아노 연습을 시키려고 자기 딸한테 거짓말을 한 거야? 나를 이용해서?”
  왜? 린은 갑자기 머리가 혼란스러워진다.
  “오빠, 난 도대체 내가 왜 이런 일을 당해야 하는지 이해할 수가 없었어. 그게 미치도록 답답했는데, 이제야 실마리를 찾은 것 같아. 미수가 못살게 군 마음의 뿌리가 내가 상상하지도 못한 곳에서부터 자라고 있었나 봐.”
  아버지가 변호사라고 했나? 외동딸에, 귀여움을 무지하게 받고 부족함 없이 자라면서 왜 쓸데없이 내 동생을 괴롭히지? 나름대로는 삶이 힘들었나? 우리가 다 알 수는 없겠지만 그렇다고 대상이 한참 어긋난, 못난 증오심을 키우다가는 스스로의 초라함만 더 커지잖아? 운은 미수란 애도 참 불쌍하다는 마음이 든다.
  “팥쥐도 인생이 무지하게 피곤하겠다. 엄마가 거짓말이나 하는 그런 사람이잖아?”
  운의 말에, 비로소 린은 여기저기 흩어져 나부끼던 종이를 하나로 모은 느낌이다. 기억을 그러모으자, 어떤 책인지 이제야 알겠다. 자신과 미수가 주인공인 이야기, 자기 딸이 뭐든 최고로 잘해야 하는 욕심쟁이 미수 엄마 때문에 둘 다 불행해진 비극 중의 비극.
  “근데… 그래도, 아직은 용서할 순 없는걸. 오빠, 내가 못된 거야?”
  “용서, 안 해도 돼.”
  팥쥐의 속사정은 모르겠지만, 결국 인생은 자기 몫이다. 누구나 다 부모의 입김을 받지만, 그 애의 마음에 린에 대한 질투심이 전혀 없었다고 볼 순 없잖아? 팥쥐가 자기 자신을 한 번이라도 솔직하게 들여다봤다면, 자기가 제대로 나아가고 있는지 돌아볼 줄 알았다면, 분명 여기까지 오기 전에 멈췄을 거야.

  “아무리 미수가 부추겼다 해도, 애들이 이렇게까지 날 미워하는 이유는 여전히 잘 모르겠어. 난 그냥 평범한 중1일 뿐인걸. 사실 왕따를 당하기 전에는 내가 애들과 다르다는 생각조차 해 본 적이 없었어. 오빠, 『오즈의 마법사』에 나오는 도로시 알지? 스스로는 어쩌다 회오리바람에 실려 이상한 나라로 날아간 평범한 여자아이라는 걸 너무나 잘 아는데, 다른 사람들이 전부 마녀라고 믿어서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 모르던 도로시 말이야. 난 정말 도로시가 된 기분이었어. 착한 마녀라고 환영받던 도로시도 어안이 벙벙했는데 지독하게 나쁜 마녀로 찍혀 버린 나는 어땠겠어.”
  린은 아까 운 탓에 부어오른 눈두덩을 가볍게 문지르며, 누구에게도 내보이지 못한 마음을 털어놓는다. 딱히 오빠의 대답을 기대해서 하는 말은 아닌걸. 
  “린아, 넌 하나도 안 평범해! 도로시의 마음을 이해하는 여중생은 거의 없잖아? 윽, 그렇다고 그렇게 실망하진 마. 평범하지 않다는 건, 특별하다는 뜻이기도 해. 내 생각엔 너의 다름이 애들을 견딜 수 없게 만드는 것 같아.”
  말로 아무리 설명해도 넌 모를 거야. 운은 안다. 린이 이사카 씨를 말하거나, 소설에 대해 이야기할 때, 발그레한 얼굴로 눈을 크게 뜨고 넘치는 사랑을 담아 양쪽 입꼬리를 살짝 말아 올리는 자기 모습을 볼 수는 없잖아? 그럴 때의 린은 눈부실 만큼 환하게 빛이 난다. 물고기의 비늘처럼 반짝이는 린을 떠올리자, 운은 슬며시 웃음이 난다.
  “뭐야, 오빠, 왜 웃어? 무슨 말인지 난 하나도 모르겠거든? 무슨 책을 좋아하냐며 누가 물을 때, 나처럼 『페스트』나 『레 미제라블』을 말하는 애들은 거의 없지만, 연애 소설이나 만화책을 즐겨 본다고 해서 무시하거나 얕잡아 본 적은 맹세코 없어. 난 그냥, 서로 다른 거라고 생각했거든. 애들도 나에 대해 똑같이 생각할 줄로만 알았어. 페스트에 휩싸인 해변 도시를 상상하다가 ‘시련을 마주하는 인간의 자세’처럼 어려운 주제에 부딪쳐서 나와 관심이 통한다고 느낀 친구에게 그 애의 생각을 물었을 때도, 나는 그냥 고민을 나누고 싶었을 뿐이야. 잘난 척하거나 뻐기려고 걸작을 들먹인 게 아니거든? 근데 애들은 사이코를 보듯 날 피하는 거야, 더러운 똥이라도 밟은 것처럼 화를 내는 거야! 넌 다르다며, 넌 이상하다며, 넌 재수 없다며… 오빠, 정말 내가 그렇게 역겨워?”
  “린아, 네가 좋아하는 이사카 코타로가 말했잖아? 특이한 동물들은 특별 보호를 받지만 특이한 인간은 배척당할 뿐이야.”
  “오빠가 이사카 씨의 책을 읽었어? 언제?”
  “명랑한 갱이 지구를 돌린다! 제목이 끝내주게 마음에 들어서 학교 도서관에서 슬쩍 넘겨봤지. 아무튼 중요한 건, 너만 다르고 특별한 게 아니라는 거야. 내가 보기엔 사람은 누구나 다 별난 구석이 있어. 내가 애들을 왕따시키는 놈을 하나 아는데, 그놈도 절대 정상인은 아냐. 사람을 따돌리고 때리면서 즐거움을 느낀다면 그거야말로 진짜 사이코패스잖아? 결국은 튀는 놈이 자기와 다르게 눈에 띄는 놈을 괴롭히는 거, 힘이 있는 놈 여럿이서 약한 사람을 짓밟는 게 왕따야. 그냥 단체로 힘자랑하는 거지. 쳇, 돈이든 싸움이든 자기보다 강한 놈한테는 벌벌 기면서 약한 놈 앞에서 으스대는 건 진정한 힘이 아니잖아? 더럽게 치사하고 싸가지 없는 짓,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지.” 
  후아. 운은 잠시 말을 멈추고 가쁜 숨을 몰아쉰다. 내가 왕따에 대해 이렇게 깊게 생각하고 있었나? 하지만 방금 한 말을 곱씹어 봐도, 틀린 말은 없는 것 같다. 때로는 폭우처럼 입 밖으로 쏟아내고 나서야 그런 생각을 가지고 있었음을 깨닫기도 한다. 나머지 말을 잇기 위해 운은 머릿속을 가다듬어 본다.
  “뭔가 골치 아픈 문제를 잊기 위해서라면 비겁하기까지 하잖아? 다른 놈을 이상하다고 몰아붙이는 게 자기는 안 이상한 사람처럼, 아무 문제없는 것처럼 느껴지게 만드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내 가슴속 불만을 없애려고 왜 다른 사람을 깔아뭉개야 하지? 세상이 하도 개똥 같아서 개차반처럼 살겠다면 그건 알아서 할 일이지만, 엉뚱한 사람에게 불똥을 튀기지는 말아야지. 거기에 데어 오랫동안 아플 상처를 생각한다면 쉽게 용서해서는 안 돼.”
  정말 그렇다고, 운은 마음속으로 강조한다. 용서란 받는 사람보다 하는 사람의 마음을 가볍게 한다지만, 용서받지 못할 자도 분명히 있다. 
  “먼 훗날이라면 또 모르겠지만, 언제가 되더라도 절대 팥쥐를 쉽게 용서하지는 마.”
  지금 린의 머리를 스쳐가고 있을 생각이 궁금해서, 운은 고개를 돌린다. 린의 작은 콧방울 위로 한줄기 시원한 바람이 부는 것만 같다.
  어둠에 눈이 익숙해져서인지, 린은 앞에 소복한 맨드라미 빛깔이 조금 전보다 밝고 또렷해진 기분이다. 이런 일을 겪고 보니, 차가움과 시련은 때로 사람을 더 강하게 만들기도 하는걸. 사람을 진짜로 무너지게 만드는 건, 오히려 부드러운 온기에 가까워. 작은 온도 변화가 쌓이면 북극의 어마어마한 빙하도 떨어져 내리거든. 운에 대해 알고 싶어서 진실 게임을 시작할 때만 해도, 린은 자신의 마음을 속속들이 얘기하고 위로를 받을 줄은 몰랐다. 가슴에 쌓였던, 베를린 장벽보다도 높은 담이 와르르 무너짐을 느끼며 린은 비밀을 하나 더 털어놓기로 마음먹는다. 다 말하고 싶은걸. 오늘, 오빠에게는.

  “사실은, 나 오늘 프라하로 떠나려 했어. 오빠가 준 가방을 들고 말이야.”
  “뭐라고?”
  미치겠다! 이건 뭐, 갈수록 태산이잖아? 도대체 내가 동생에 대해 제대로 아는 게 하나라도 있나? 운은 아찔함에 이마를 짚고 만다.
  “여기선 끝이 안 보였어. 왕따도, 우리집도, 할머니도. 사실 오빠는, 할머니만 해도 힘든데, 내가 왕따를 당한다는 얘기까지 해서 부담을 주긴 싫었어. 내게는 오빠가 있지만, 오빠는 기댈 사람이라고는 없는걸. 나만 없어져도 오빠가 좀 가벼워지지 않을까 하고….”
  “잠깐만! 때로는 지킬 사람이 있다는 게 살아갈 힘이 되기도 해. 내겐 너와 할머니가 그래! 정말 몰랐어?”
  린이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지 몰랐다. 무작정 린의 선택이 잘못됐다고 말하기 위해 생각나는 대로 내뱉었는데, 운은 말을 하고 나자 이번에도 또 다른 진심이었음을 깨닫는다. 정말이다! 그동안 어긋난 길에 대한 유혹에 시달릴 때마다 운을 잡은 건, 보호하고 지키고 싶은 동생, 린의 존재였다. 할머니 역시 원망스러우면서도 놓을 수는 없는, 운이 아니면 돌보는 사람 하나 없을 가여운 노인네라는 점에서 이 삶을 살아갈 수밖에 없게 만드는 소중한 버팀나무였다. 어쩌면 할머니도 우리를 두고 떠나지 않으려고 죽을힘을 다해 버티는 건 아닌지, 그런 할머니가 사라지지 않도록 촛불 맨드라미가 제 몸을 태워 지켜 주는 건 아닌지, 가끔 생각하곤 했다.
  “미안해! 화내지 마, 오빠. 결국 안 갔는걸. 아니 못 갔거든? 대문을 나서는데, 오빠의 여자친구가 나타나서 가방을 찾아갔거든.”
  윽, 그렇게 된 거였어! 운은 가방이 어디로 갔는지 대충 알 것 같았다. 그래도 남방이 왜 경찰에 신고도 안 하고, 굳이 집까지 찾아와서, 여자친구라고 둘러대고 빈 가방만 가져간 건지는 도저히 알 수가 없다.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인지 궁금하거나 뭔가 이상하다고 느꼈을 텐데, 고맙게도 린은 곤란할 질문을 모두 그냥 넘어가 준다. 린의 따스한 배려를 운은 있는 그대로 받아들인다.
  “여자친구… 아니야.”
  “응, 역시 그랬구나.”
  “실은 그 가방은.”
  거기까지 말하더니, 운은 더 이상 말이 없다. 굳게 깍지를 낀 운의 두 손이 오늘따라 추워 보여서 안쓰러운 린은 주머니에 든 손을 꺼내 운의 차가운 손을 감싼다. 작은 온기나마 나누고 싶어서. 이제 그런 가방 따위야 어떻든 상관없는걸. 린은 아까부터 입가를 맴도는, 하고 싶은 모든 말을 담아 그저 한마디로 대신할 뿐이다.
  “고마워, 오빠. 그냥, 전부 다.”
  오빠, 1년 전 그날 병원으로 돌아와서, 할머니와 나를 버리고 떠나지 않아서, 잠시지만 내게 가방을 선물해 줘서… 정말 고마워. 오빠 때문에 내가 아직 여기 있는 거야. 린은 마음으로 몇 번이고 되풀이한다.
  “무슨 소리야, 내가 더 고맙지.”
  운도 솔직한 마음을 표현한다. 그동안 혼자 외로웠을 텐데 힘이 되어 주지 못해서, 가방에 대해서 더 안 캐물어서, 지금 여기 내 옆에 있어서 정말 고맙고 미안해.  

  “근데 오빠, 어떨 때 보면 할머니가 우리 얘길 다 듣고 있는 것 같지 않아?”
  린의 우스갯소리에 운은 몸을 앞으로 기울여 할머니의 얼굴을 살핀다. 정신이 돌아온 건지 아직도 기억 속을 걷는 건지, 할머니는 점퍼 안으로 약간 움츠러들어 퀭한 눈으로 맨드라미만 바라보고 있다. 촘촘히 모여 앉은 촛불 맨드라미도 언제나처럼 그대로 말이 없다. 모두가 그냥 여기에, 함께 있다.

 

 

 

 

 

 

 

  린은 이제 안다. 진실 게임을 통해서는 절대로 진실을 알 수 없다. 우리는 상대가 기꺼이 말하고 싶은, 조각난 사실만 듣게 될 뿐이다. 그래도, 진실이 뭐 그리 중요해? 다 알지 못한다고 해서 이해할 수 없는 건 아닌걸. 오빠처럼 말해서, 아님 말고.

 

 

 

 



* 이사카 코타로의 『명랑한 갱이 지구를 돌린다』 문장 인용을 허락해 주신 은행나무에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 촛불 맨드라미 화단의 삽화를 그려 주신 이혜승 작가님께 다시 한 번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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