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째날













 8. 하수 : 수건돌리기


 


 

 

 

  알프스, 지금 어디에 있어?
  알록달록한 작은 집들이 눈에 아른거린다. 알프스는, 잃어버린 내 가방의 이름이다.

  나의 기억 속에서 부모님은 언제나 서로를 물어뜯으며 으르렁거렸다. 그래서일까? 내가 어려서부터 가출을 꿈꾼 이유. 
  “하수는 날다람쥐처럼 얼마나 재바른지, 조금만 한눈팔면 어디론가 사라지곤 했어요. 경찰서에서 찾은 적도 셀 수가 없다니까요? 도대체 누굴 닮아서 틈만 나면 달아나는지 도통 모르겠어요.”
  명절이면 엄마는 무슨 전통 의식처럼 나를 들먹이며, 친척 어른들께 나 하나 키우는 게 세상에서 제일 대단한 일인 듯 엄살을 부리곤 했다. 그러면 할머니는 혀를 끌끌 차며 못마땅한 얼굴로 자리를 뜨곤 했는데, 엄마의 말이 거의 맞다 치더라도 그 정도의 비난은 살짝 지나치다는 게 내 개인적인 입장이다. 
  가만히 두면, 엄마의 과장은 지구 대기권을 뚫고 달까지 닿을 수준이라니까? 내가 지금까지 살면서 경찰서의 신세를 진 건 딱 한 번뿐이라고! 물론, 모르는 동네의 어느 담벼락 아래에 쪼그리고 앉아 눈물만 뚝뚝 떨어뜨리다가 조폭 뺨치게 생긴 아저씨의 손에 이끌려 집으로 돌아오거나, 동물원에서 길을 잃은 나를 피카추 풍선 파는 아줌마가 데리고 있다가 정신없이 달려온 아빠의 품에 돌려준 일도 있긴 하다. 하지만 나는 꽃사슴이 너무 예뻐서, 조금만 더 보고 싶어서 우리에 달라붙어 있었을 뿐이다. 딸을 볼모로 휴일에 쉬지도 못하게 괴롭힌다느니, 가족이 그렇게 귀찮으면 왜 같이 사냐며 또 말로 치고받느라 5살배기 딸을 두고 다른 곳으로 간 부모가 더 문제 아닐까? 그때의 나는 달아난 게 아니라 버림받은 기분이었다고! 어쩌면 그날부터였는지도 모른다… 나는 집을, 솔직히 말하자면 엄마와 아빠를 떠나려는 바람으로 열심히 준비해 왔다.
 
  가출이란 뭘까? 오롯이 내 힘으로 살아남아야 한다는 뜻이다. 다시 말해, 혼자서 먹고 입고 잘 수 있어야 한다. 삶에 있어 돈의 중요성을, 나는 그렇게 깨달았다. 하지만 어린아이가 큰돈을 모으기는 쉽지 않았다. 그저 스크루지처럼 아끼는 수밖에 없었다. 나는 설탕과 케첩을 둘둘 바른, 보기만 해도 군침이 저절로 도는 핫도그를 남보다 하나씩 덜 먹으며, 생일을 맞은 친구에겐 선물 대신 그림일기처럼 정성스레 꾸민 편지를 고이 건넸다. 아빠가 아이스크림을 3개 사 오라고 돈을 주면 2개만 사고 잔돈을 챙긴 뒤 엄마한테 빌붙었고. 자식이 먹고 싶어 죽겠다는 눈빛으로 바라보면 한입이라도 안 주곤 못 배기는 부모의 심리를 독창적으로 활용했달까? 진정한 창조 경제란 바로 이런 거라니까? 이렇게 먹을 거 안 먹고 가족한테까지 짠순이란 소리를 들으며 알뜰살뜰 모아서 가방을 장만했는데, 핫도그 소스 통에 빠뜨려 죽여도 시원치 않을 도둑놈이 홀랑 훔쳐간 거다! 알프스는, 내가 무려 15년 동안 안 먹고 안 입고 안 써서 얻은 소중한 친구라고! 알았다면, 안 훔쳐 갔을까? 하, 도둑놈이 그딴 걸 신경쓸 리가 없다.

  부모는 도대체 어디서 이런 애가 나왔냐며 도대체 누굴 닮은 거냐며 툴툴대지만, 자식도 부모를 선택할 수 없어 속이 터지긴 매한가지다. 만약 정자와 난자가 단순한 합체 본능 외에 미래를 따질 수 있는 이성까지 갖춘다면, 임신 성공률은 눈에 띄게 줄어들 거야. 태아에게 부모를 미리 알려 주고 자유로운 선택권을 준다고 해도 마찬가지고. 출생률이 과연 어디까지 곤두박질칠지는 아무도 모른다는 말씀!
  이처럼 내 뜻과 관계없이, 태어나면서부터 주어진 서글픈 현실을 견디기 위해서 나는 갖가지 설을 만들어 냈다. 유치원 시절에는 줄곧 ‘미아설’에 매달렸다. 사실 나는 엄마나 아빠의 친자식이 아니라 사이좋은 부부가 눈물을 흘리며 찾고 있는, 잃어버린 아이가 아닐까? 하지만 아빠를 닮아 험한 잠버릇처럼, 아니라고 할 수 없는 온갖 유전적 증거 앞에서, 내 부모는 지금의 엄마와 아빠가 틀림없다는 슬픈 진실을 받아들여야 했다. 아직도 미련이 남는 ‘알프스 소녀설’은 초등학생 때 『하이디』를 읽으면서 생겼다. 드문드문 흩어진 오두막이 마을을 이룬 알프스 산맥에서 할아버지와 페터 할머니, 염소들과 뛰노는 하이디의 삶은 내게 엄청난 문화적 충격이었다. 하이디가 부러운 나머지 혼자 엉엉 울기도 했다니까? 나도 차라리 영주로 내려가 우리 할머니랑 같이 산다면 훨씬 행복할 듯했다. 하지만 내가 자랄수록 점점 더 강해지는 나에 대한 엄마의 집착을 보면서, 만에 하나 부모님이 이혼을 하더라도 엄마가 할머니에게 나를 보낼 리가 절대로 없다는 사실을 깨달으면서 이 설도 역시 끝이 났다.
  나는 포기하는 대신, 사춘기를 맞아 ‘최후의 화해설’을 통해 또 다른 희망을 꿈꾸었다. 내 부모가 맞고, 헤어지기를 바랄 수도 없다면, 어떻게든 싸움을 멈추는 수밖에. 아무리 서로를 미워하는 엄마와 아빠라도 내가 정신도 못 차리게 아프면, 다 같이 눈물을 뚝뚝 흘리며 끌어안고 화해하지 않을까? 모두가 감동적으로 하나가 되면 당연히 나도 언제 그랬냐는 듯이 말끔하게 낫고. 엄마가 들으면 뒤로 넘어가겠지만, 고등학교에 들어가서도 나의 고민은 늘 하나였다! 어딘가 아파야 하는데, 어떻게 적당히 아플 수 있을까? 2학년 여름, 심한 다이어트로 인한 빈혈로 체육 시간에 쓰러져 병원으로 실려 간 비리비리한 친구를 보고 이거다 싶어 따라해 보려고도 노력했지만, 눈앞이 빙빙 돌 정도로 배가 고픈 데다 곰곰이 생각해 보니 엄마와 아빠는 내가 아픈 책임을 놓고 또 끝없이 싸울 것 같아서 결국 그만뒀다. 이렇게 3개의 설은 눈물을 머금고 겨우 떠나보냈지만, 할머니와 함께 사는 꿈은 차마 버리지 못하고 은밀하게 간직해 왔다. 이번 생엔 망했지만, 언젠가 다시 태어난다면 내가 고를 수 있다면, 하이디가 사는 알프스 산맥처럼 아주 작은 시골 마을에서 우리 할머니와 함께 하는 삶을 택할 거라고, 나는 지금까지 백만 번쯤 다짐했다. 알프스란 이름은 이런 내 무의식에서 나왔을지도 모른다. 가방을 보자마자 그곳이 떠올랐으니까. 
  올 여름, 수혁을 보내고 헛헛한 마음을 달래려 백화점에 갔다가 알프스를 본 순간, 본능적으로 느껴졌다. 이거야! 가져야만 했다. 내가 원하던 세계가 그대로 펼쳐져 있었으니까. 손이 떨릴 만큼 비싸서 같은 층을 10번 넘게 돌며 망설이긴 했지만, 이미 나는 알고 있었다. 이제 다른 가방으로는 내 마음을 채울 수 없었다. 결국 그날 나는 신용 카드를 긁었다. 특별한 존재는 멀리 달아나기 전에 온 힘을 다해서 잡아야 하니까. 같은 실수를 두 번이나 할 수는 없었다, 수혁을 보낸 것처럼. 그렇게 첫눈에 홀딱 반한 가방을 잃어버리다니, 그것도 고작 길에서 마주친 남자에게 한눈팔다가. 하. 나란 사람, 정말 최악이다! 나의 알프스는 지금 도대체 어디에 있을까?

  잠시나마 알프스에 대한 생각에서 떠나 머리를 식히려 창밖을 본다. 4층에서 내려다봐서인지 긴 거리가 시원시원하게 한눈에 들어온다. 평일 저녁의 우리 학교 앞은 언제나처럼 붐빈다. 비가 개인 신촌을 누비는 사람들을 구경하는데, 오늘따라 여행 가방만 자꾸 눈에 들어온다. 나도 모르게 어느새 또 알프스를 찾고 있다. 오후 내내, 조금 전까지 동대문역사문화공원역 주변을 샅샅이 뒤졌는데도 못 찾은 가방이 여기서 떡하니 눈에 띌 리가 없다고! 하, 짜증이 식도를 타고 버럭 올라온다. 빨리 찾아야 하는데, 혜수는 도대체 언제 오는 거야? 폰을 쓸 수가 없다고 이토록 속이 터질 줄은 몰랐다. 집에선 하얗게 모르고 있겠지만, 위험 부담을 안고 폰을 켜기는 싫다. 마냥 기다리는 수밖에, 에휴. 하긴 갑자기 불러냈는데도 데이트하다 말고 냉큼 달려온다니 고마울 따름이다. 내 목소리가 심상치 않다고 느껴서일까? 기다림이 지겨워져, 식어 가는 커피를 플라스틱 막대로 빙빙 저어 본다. 
  나답게, 동대문역사문화공원역 앞에서 고기를 곁들인 냉면으로 배를 그득 채우고 나서, 게다가 정말 맛있었다, 나는 가방을 잃어버린 뒤에 해야 할 당연하고도 어른스러운 조치를 했다. 먼저, 거의 백만 년 만에 공중전화 부스로 들어가 비행기표를 취소했다. 잘 곳은 파리에 도착해서 알아보려 했으니 통과! 신분증이나 카드도 크로스백에 들어 있으니 문제없고. 하, 아무리 곰곰이 생각해 봐도 급한 일이라곤 그게 다였다. 러시아 대륙을 가로질러 프랑스로 날아가는 국제적 가출치고는, 여행 가방을 도둑맞은 것치고는 뒷수습이 지나치게 간단했다. 차에 치여서 아프다고 데굴데굴 구르다 보니 살짝 긁힌 상처뿐이라 반창고만 붙이면 끝이었달까? 이런 일을 당하고 나서야, 내가 얼마나 대책 없이 집을 나왔는지 비로소 깨달았다. 무려 15년을 특별 기획했음에도 불구하고, 어디로 갈 건지 그것도 나라와 도시를 빼곤 아무것도 못 정한 팔푼이가 바로 나다.
  아무리 오래 준비했어도, 오늘 짐을 싸서 나올 줄은 아침에 세수를 하면서도 몰랐다고! 이렇게 말해 봐도, 알맹이가 다 빠진 옥수수처럼 부질없는 변명 같아 자꾸만 손발이 오그라든다. 그러고 보면 우리는 세상에서 제일 똑똑한 사람인 듯 머리를 볼링공처럼 열심히 굴리지만, 결정적인 순간에는 그제야 깨달은 스스로의 멍청함에 이마를 치며 인생이 이끄는 대로 하릴없이 끌려가고 만다니까? 내가 헛똑똑이가 아니라면 언제든 떠날 수 있게, 중간에 무슨 일이 생기더라도 성공할 수 있는 완벽한 가출 계획을 세웠어야 했다.

  오늘 아침, 김이 모락모락 오르는 뜨거운 아침밥을 입안으로 한가득 밀어넣으면서 엄마는 허기진 입을 열었다. 
  “이제 슬슬 하수를 신림으로 보낼까 봐?”
  엄마가 자주 쓰는, 듣는 사람을 떠보는 것 같은 말버릇이었다. 나는 계란말이로 뻗던 젓가락질을 멈추고 고개를 갸웃거렸다. 나와는 나눈 적이 없는 얘기였다. 아빠는 김칫국으로 들이밀던 숟가락을 식탁 유리에 거칠게 내려놓았다. 아빠의 숟가락에 붙었던 커다란 고춧가루가 공중으로 튀더니 바닥으로 떨어졌다.
  “그 얘기는 당분간 하지 말자고 결론을 내렸던 것 같은데!”
  아빠의 반응을 보고, 나는 부모님이 그동안 내 미래에 대해 의논하고 있었음을 알았다. 정작 당사자인 나는 쏙 빼고서 말이다. 엄마는 그동안 친척들이 보란듯이 나를 외교관으로 키워 왔기에 새삼 놀랄 일은 아니었다. 초등학생이 되자마자 방학마다 틈틈이 나를 데리고 유럽을 돌아다녔고, 외고로 보내 프랑스어를 선택하게 부추겨 갈고닦게 한 결과, 대학마저 프랑스어과를 가게 만들었다. 나 역시 엄마가 정해 준 길에 대해서 별다른 불만이라든지 벗어나고 싶다는 식의 반감은 느끼지 않고 살아왔다. 엄마가 이루지 못한 꿈을 나를 통해 대리 만족하려는 심리인지도 모르지만, 설사 그렇다 해도 상관없었다. 다양한 유럽 요리를 먹을 수 있는 여행이 좋았고, 부모가 자식을 나쁜 길로 내몰 거라곤 의심하지 않았으며, 프랑스어 외에 특별히 잘하거나 미치도록 하고 싶은 다른 꿈도 없었으니까. 
 

  탱탱하게 삶은 달팽이에 상큼한 허브 소스를 살짝 얹은 에스카르고(escargot)와 겉은 바삭바삭하고 속살은 생크림처럼 촉촉한 바게트(baguette), 화이트 와인을 넣고 녹인 갖가지 치즈로 작은 빵 조각을 적셔 먹는 퐁뒤(fondue)는 언제 어디서든 떠올리기만 해도 입맛이 짝짝 다셔진다. 서유럽은 이렇게 혀끝을 날아다니게 만드는 곳이기에 나 같은 식신에게는 살아서 갈 수 있는 천국이다. 외교관이 되면 자연스레 한국과 부모님을 떠날 수 있고, 운 좋게 유럽으로 파견되면 미식 여행까지 실컷 다닐 수 있다! 수혁도 프랑스에 있으니 잭팟이 줄줄이 터지는 행운이랄까? 나는 그동안 이렇게 헐렁하게 생각해 왔다. 오늘 아침이 오기 전까지는.
  막상 고시촌에 들어가라는 얘기를 들으니, 아침밥을 한 그릇 다 비웠는데도 속이 허전하고 기운이 쭉 빠졌다. 엄마의 등쌀에 떠밀려 프랑스어를 하고 어쩌다가 남들이 알아주는 대학까지는 왔지만, 사실 나는 공부에 별로 흥미가 없는 편이다. 즐거운 일은 여행이나 다니면서 기름기가 잘잘 흐르는 맛있는 음식을 먹는 거고. 인생, 뭐 있을까? 지나치게 아등바등하지 말고 슬렁슬렁 살아가면 된다고. 나는 대충 이런 사고방식의 소유자다. 게다가 나는 아직 대학교 1학년이라니까? 어린이집과 유치원을 빼더라도, 초등학교부터 무려 12년 동안 학교와 학원에 갇혀서 자잘한 글자만 들여다보며 살았는데, 무릎이 튀어나온 추리닝을 입고 하루 종일 두꺼운 책만 파며 살라는 건 한창 파릇파릇한 청춘에 대한 예의가 아니라고!
  더 어이가 없는 건 평소에 그렇게 죽어라 싸우고 서로 반대를 위한 반대를 일삼던 부모님이, 내 문제에 있어서만큼은 한통속이 된다는 기막힌 사실이다. 특히 나의 진로에 대해서 아빠는 언제나 엄마를 따랐다. 때로 진심을 알 수 없이 착잡한 표정을 짓기는 해도, 드러나게 반대한 적은 없었다. 가라앉는 배의 선장처럼 그저 입을 꾹 다물고 무겁게 침묵할 따름이다. 친척들 앞에서 내 이야기를 떠들 때처럼 공격적으로 나를 들볶는 엄마의 태도에도 불구하고. 아니나다를까. 
  “당신 생각이 정 그러면 그렇게 해라.”
  아빠답지 않게 밟힌 지렁이처럼 잠시나마 꿈틀거리더니. 이러면 얘기 끝이다. 보통 나는 실험실의 토끼처럼 얌전히 엄마가 시키는 대로 해야 한다. 그런데 오늘 아침에는 이상하게도 도저히, 내키지가 않았다. 꼭 그렇게 하지 말아야 할 다른 이유가 갑자기 생긴 것도 아닌데, 그냥 그러기가 싫었다. 
  마구 뒤흔든 콜라 캔처럼 터지기 직전인 내 속은 아랑곳없이 엄마는 신이 나서 준비한 말을 늘어놓았다. 학원은 어디가 좋다더라, 학원에서 파는 교재 말고도 무슨 책이 좋다더라, 둥둥 떠다니는 말 속에 막상 나는 없는 느낌이었다. 아침을 다 먹고도 그대로 앉아서 그릇에 바싹 말라붙은 밥풀을 손으로 떼면서야 깨달았다. 오늘이야! 오늘이 그날이야! 아빠가 출근하고 엄마가 내 이름으로 학원에 등록하러 간 사이, 나는 인터넷으로 비행기를 예약하고 스스로도 놀랄 만큼 빠른 빛의 속도로 짐을 챙겼다.  
  목적지는 에펠탑의 도시, 파리. 그리운 수혁이 있는 곳이다. 사실 내 마음은 그가 떠난 여름부터 이미 정해진 것이나 다름없었다고… 갑자기 집으로 들이닥치면 놀랄 테니, 일단은 소르본에 가서 연락하려고 했다. 이런 일만 안 생겼으면 지금쯤 잘생긴 프랑스 인 승무원의 서비스를 받으며 에어 프랑스를 타고, 가도 가도 끝이 없을 것 같은 거대한 러시아를 넘고 있을 나라고! 하긴 또 무슨 일이 나를 기다렸을지는 모르지만. 수혁이 나와는 차원이 다른 몸매의 외국인 여자친구와 새로운 역사를 이미 썼을 수도 있고, 학교로 가서 그를 만나기까지 소매치기나 다른 험한 꼴을 당했을지도 모르니까. 이제야 인생을 조금은 배운 느낌이다. 겨우 1초 뒤도 내다볼 수 없다는 말씀!


  머그잔이 바닥을 보일 즈음, 드디어 혜수가 카페 문을 열고 들어온다. 짧은 와인색 플레어스커트에 검은 카디건을 입은 그녀는 언제나처럼 도도해 보이면서도 귀엽다. 혜수가 다가오자 사람들의 시선이 멸치떼처럼 확 몰리는 게 느껴진다. 반면 그녀는 남들은 거들떠보지도 않고 선 채로 내 커피를 가져가 쭉 들이켜더니, 똥이라도 씹은 표정으로 쓰다며 한바탕 난리다. 
  “웩! 걸레 맛이야!”
  거침없음. 혜수의 치명적인 매력이라니까? 
  “그러게 좀 보고나 마시지 그랬어. 찌꺼기만 남았다고.”
  아침부터 도통 실감나지 않던, 나를 둘러싼 모든 상황이 이제야 약간이지만 현실감을 되찾는다. 혜수는 핸드백에서 담배 1개비를 꺼내 우아하게 입에 물더니, 폭신한 소파에 모델처럼 날씬한 몸을 기댄다.
  “미안, 미안. 소나기가 와서 차가 엄청 밀렸어. 길바닥에 사람은 또 왜 이리 많아? 거기다 승우가 자기를 두고 간다며 칭얼거려서 달래느라 조금 늦었어. 애도 아니고 23살이나 먹은 오빠가 그러니까 대략 난감하다.”
  “무슨 말씀! 와 준 게 어디야. 승우 오빤 잘 지내시고?”
  “아니, 행시를 준비한다는 고시생이 왜 맨날 여친 타령이냔 말야. 매일 밤을 새면서 쌍코피가 터지게 공부해도 될까 말까 한 상황에 초딩처럼 같이 놀자고 졸라 대니, 나 참.”
  모르는 사람이 들으면 남자 친구가 자기밖에 모른다며 은근슬쩍 자랑하는 거라고 여길지 몰라도, 나는 안다. 혜수는 진심이다. 그녀는 다 큰 남자가 징징거리면 어이가 없어진다며 머리를 내두를 정도로 싫어한다. 솔직하고 직선적이면서도 속을 꿰뚫어 보는 예리한 성격이, 내가 혜수를 좋아하는 이유니까. 그러면서도 본인의 감정만 위한답시고 남의 상처를 후벼파는 말이나 함부로 내뱉는, 싸가지가 없는 애들과는 수준이 다르다. 주로 자신과 남친에 대한 말만 거침없이 한다고! 철없는 남자 친구에 대한 푸념을 잠시 늘어놓던 혜수가 문득 말을 멈추더니, 내 얼굴을 꼼꼼히 뜯어보며 묻는다.
  “근데 너, 무슨 일이야?”

  혜수는 지금, 2년째 고시 준비 중인 후줄근한 연상 남자 친구와 1년째 들이대는 뽀송뽀송한 연하의 고등학생 사이에서 줄타기를 하는 중이다. 주위에선 사람의 마음을 가지고 장난치는 나쁜 년이라 욕하는 애들도 있지만, 나는 진심으로 이해한다. 1년 365일, 고시 공부하는 남자 친구를 둔 여대생의 슬픔도 알아줘야 하니까. 근사한 레스토랑이나 명품 핸드백에 대한 얘기가 아니다. 우리는 남자의 능력만 따지는 고리타분한 된장녀가 아니라니까?
  고시생과의 연애가 힘든 이유는, 여대생이라면 누구나 기대할 법한 가슴 설레는 둘만의 1박 2일 여행, 밤새도록 극장에서 심야 영화 보기, 카페에서 서로에게 기대앉아 알콩달콩 시간 죽이기 같은 평범한 만남 자체가 거의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시험을 중심으로 매일 빈틈없이 짠 생활 계획표 속에서 1분 1초를 사는 고시생들은 먹고 싸고 공부하고 자는, 일정한 틀에 박힌 시간표에서 벗어나면 불안에 시달린다. 나도 승우 오빠를 만나고 알았다. 뭐라고 딱 꼬집어 말할 수는 없지만, 우리 또래의 남자애들이 지닐 법한, 인생을 대하는 가벼움이나 허세 섞인 농담이 빠진 느낌이랄까? 뚜껑을 따서 며칠 동안 묵혀 둔 밍밍한 사이다 같았다, 사람이. 보이지도 않는 미래를 위해 무작정 참고 기다려야 하는 자신의 처지에 자꾸만 울컥하는, 작은 시한폭탄이 가슴팍에서 째깍거리는 불쌍한 인질 같기도 하고.
  그날 나는 혜수가 그를 정말 사랑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아니라면 만날 이유가 없으니까. 돈을 잘 버는 ‘사’자 남편을 만나기 위해 인생의 황금기인 대학 시절부터 고시생 남자 친구를 키울 필요는 없는 시대다. 한 남자만 바라보고 실컷 뒷바라지해 봤자, 합격하고 나면 남자는 부모의 욕심에 떠밀리든 없던 야망이 솟구치든 갖가지 핑계를 들어 여자를 차기 일쑤다. 클럽에 가서 만날 만큼 만나고 미련 없이 즐기다가 부모가 마련한 맞선 자리에 나가서 조건에 맞는 남자를 만나면, 그 이상 편할 수가 없다. 외시를 보고, 비슷한 수준의 남자를 만나서 물에 물 탄 듯 술에 술 탄 듯 그저 얄팍한 시대의 흐름에 몸을 맡기고 살아가는 게 내 인생의 목표였는데,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난 거냐고!

  아마도 혜수의 연애를 지켜보면서, 내겐 고시 생활에 대한 걷잡을 수 없는 두려움이 생긴 듯하다. 안쓰럽고 조마조마하던 승우 오빠와의 첫 만남 후, 고시 폐인 따위는 과감히 정리하고 연하남과 풋풋한 썸이나 타라며 나는 한껏 바람을 넣었다. 늘 유쾌한 혜수는 그날따라 이마를 찡그리고 다부지게 팔짱을 끼더니 중얼거렸다. 
  “그것도 문제야. 걘 지금 고3이잖아. 곧 수능을 봐야 한단 말이지.”
  우리는 누가 더라고 할 것도 없이 인생을 함께 배워 가는 사람으로서 고개를 끄덕거렸다. 하긴, 다 좋은 게 언제 우리 손에 쥐어지긴 하냐면서.

  “근데 너, 정말 무슨 일이 있는 거 아니야?”
  그녀가 이럴 때는 방법이 없다. 있는 그대로 말하는 수밖에. 아무 일 없는 듯 꾸며도 한두 번 날카로운 질문을 받으면 결국 다 불고 만다. 물론, 가출은 끝까지 감춰야겠지만. 남들이 보기에 우리집은 대기업에 다니는 능력자 아빠와 고상한 엄마가 그럴듯한 명문대생 딸을 둔 안정적이고 평화로운 가정이니까. 혜수는 대학에서 사귄 친구라서인지 전공이나 연애, 정치나 취업에 대한 얘기는 서로의 얼굴에 열띤 침을 튀겨 가며 편하게 말해도, 각자의 가족에 관한 이야기는 좀처럼 자세하게 나누게 되질 않는다. 
  안 지 반년이 넘은 지금, 나 역시 혜수의 아버지가 어느 은행의 강남 지점장이고 엄마는 정부 부처 어딘가의 고위 공무원이라는, 정부 기관이 어디 한두 갠가, 수박 껍데기 같은 사실만 아는 수준이다. 둘 다 먼저 말하지 않는 이상 안 캐묻는 약간 무심한 성격이 우리가 친한 비결이기도 하니까. 가방은 신기루처럼 사라졌고, 집에 돌아가기는 굶기만큼이나 싫어서 도둑놈을 잡아야겠는데 이 나이에 가출 소녀란 놀림은 안 받고 싶어서, 놈을 찾을 반짝이는 아이디어라도 빌릴까 해서 혜수를 부른 거니 목적에 집중하자. 나는 날치기를 당했다며 미리 생각해 둔 말을 줄줄 늘어놓았다. 여행 가방이란 말, 공항에 가던 길이란 말은 쏙 뺐지만, 말을 안 한다고 거짓말은 아니니까.

  “들어 보니 완전히 작정하고 덤빈 놈이네! 지하철 문이 닫히기 직전에 내린 거 보면, 시간 계산까지 치밀하게 한 거야. 하필이면 정신없는 역에서 달아났다는 것도 그래. 네가 운 좋게 따라 내렸다 한들 사람도 많고 해서 아마 못 잡았을 거야.”
  손뼉을 칠 만큼 신선한 대답을 기대한 건 아니지만, 실망스러운 건 어쩔 수 없다. 
  “꼭 찾아야 된다고! 이제라도 경찰에 신고하면 잡을 수 있을까?”
  “아직 경찰에 신고도 안 했어? 날 샜다고 본다. 신고 한들, 경찰이 그깟 날치기 사건까지 신경을 쓰겠어?”
  “그래서 안 했던 거라고!”
  오늘따라 교과서처럼 상식적인 대꾸만 하는 혜수가 괜스레 얄미워져서 퉁명스럽게 내뱉고 만다. 에휴, 여기까지 달려온 친구에게 잘하는 짓이다! 곧장 따갑게 밀려드는 미안함에 시달리는 나를 신경도 안 쓰고, 혜수는 심각한 생각에 잠길 때면 항상 그렇듯이 턱을 괴더니 눈을 지그시 내리깐다. 로댕의 생각하는 사람이라도 된 걸까? 그나저나 로댕의 남자는 도대체 무슨 생각을, 그렇게 벌거벗고 앉아서 백 년이 훨씬 넘도록 하는 거냐고!


  “음, 이름이나 얼굴이라도 확실하게 기억한다면 또 모르겠다. 그 동네의 전과자 중에서 찾을 수 있을지?”
  이번에는 교과서보다 약간 나아간 참고서 수준의 말이지만, 심봉사가 눈을 뜨듯 귀가 번쩍 열린다. 하, 사진! 하지만 놈이 모자를 써서 얼굴이 반밖에 안 보이는 데다가, 내가 수백 번을 보고도 단서 하나 찾지 못한 사진인데 무슨 소용이 있을까? 
  “실은… 나, 그놈 사진이 있어.”
  “엥? 사진을 가지고 있어? 어떻게?”
  그놈한테 호감이 있어서 혼자 난리블루스를 추다가 사진까지 찍었단 말은 목구멍에 걸려서, 도저히 안 나온다. 아무리 친구라도 말 못한다. 아니, 안 해! 혜수는 짓궂은 면이 있어서 내가 떤 호들갑을 들으면 평생을 두고두고 놀릴 게 틀림없으니까. 어떻게든 숨기려 이리저리 말을 돌리지만, 결국 그녀가 내민 진실의 손에 목덜미를 잡히고 만다. 최대한 덜 창피하게 바꾼 상황 설명을 듣고서도 그녀는 민망할 정도로 탁자를 치며 카페가 떠나가라 웃는다. 하.
  “냉큼 내놓으시라.”
  이러면서 오른손을 마구 내민다. 어디 그 잘난 놈의 낯짝이나 좀 보자면서. 어차피 들통난 거, 체면치레할 필요는 없으니까. 나는 도둑고양이처럼 꼬리를 내리고 얌전히 디지털 카메라를 건넨다.
  “으흥, 이놈이구만? 네가 좋아하는 스타일은 아닌데, 은근히 매력 있다? 은하수가 정신을 놓을 만하네.”
  뺨이라도 맞은 듯 볼이 화끈거리고 약이 오르지만, 내가 웃긴 짓을 한 거니까 어쩌겠어.
  “나를 계속 쳐다봐서 더 정신이 없었다니까?”
  “요새 잘생긴 고딩이 오토바이를 타고 여자애들한테 접근해서 휴대폰 좀 빌려 달라고 하고선 들고튀는 범죄가 유행이라던데, 비슷한 건가? 근데 가만. 얘, 대학생 안 같아! 자세히 보니, 어리게 생겼어. 뭐야, 너 고딩한테 당한 거야? 푸핫. 요 어린놈이 누나를 가지고 놀았네?”
  “응? 고딩이라고? 아냐, 교복도 안 입었고, 대학생 같았어.”
  아닐 거야, 아니라고! 물론 요즘 연상 연하가 대세라곤 하지만, 고등학생을 내 또래로 보고 나한테 호감이 있느니 어쩌니 착각에 빠져 사진을 찍었다면, 이건 정말 유치찬란한 악몽이다. 고개를 흔들며 손가락으로 머리카락만 꼬아 대는 나는 아랑곳없이, 혜수는 얄미울 정도로 조용히 사진기만 들여다본다. 그러더니 갑자기 흥얼거리듯 입을 연다.
  “가만가만. 찾았다, 방법.”
  “진짜?”
  “근데 어떡하니, 얘는 중딩이야, 하수야.” 
  “뭐?”
  “에이, 얼굴 펴. 초딩이 아닌 게 어디야?”
  “말도 안 돼!”
  하, 믿을 수 없어! 요즘 애들이 아무리 잘 먹고 잘 컸다 해도, 내가 고등학교에 다닐 때 아직 변성기도 안 겪은 초등학생을 대학생으로 착각했을 리 없다. 가방이 사라졌을 때보다 더 멍할 뿐이고. 사진을 아무리 살펴봐도, 혜수가 무슨 근거로 그렇게 말하는지 나는 도무지 감을 잡을 수가 없다니까?
  “모르겠어? 사진에서 걔 손가락을 잘 봐. 네가 잇달아 찍은 사진들을 빨리 넘기면, 움직이지? 걔가 손가락을 까딱거릴 때마다 그 아래에 가려진 글자들이 조금씩 보여. 이어서 읽으면 ‘백…동…중학…교 도…서…관’이야!”
  정말이다! 화면이 작아서 뭉개졌지만 확대해서 모아 보니, 분명 ‘백동중학교 도서관’이란 글자가 된다! 인터넷을 샅샅이 뒤지면 이 학교가 어디에 있는지부터 시작해서, 잘하면 녀석이 몇 학년, 몇 반인지도 알아낼 수 있어! 아니, 반드시 찾아서 경찰서에 내동댕이쳐 주겠어! 이 빌어먹을 자식은 내가 자기 사진을 찍은 줄은 상상도 못할 테니, 마음놓고 있을 거란 말씀. 대리석처럼 반듯한 얼굴에 한 방 세게 먹여 주겠어! 어디 한번 해보자고! 역시, 혜수를 부르길 잘 했다니까!
  “혜수 씨, 쌩유 베리 감사!”
  지금 내 마음은 순정 만화의 주인공처럼 고마운 눈물이 빗금처럼 흘러내린다고.
  “고맙긴 뭘. 그 자식을 잡으러 갈 거면 같이 가 줄까? 요새 중딩들은 장난이 아니라고 하더라. 오죽하면 중2가 무서워서 북한이 못 쳐들어온다잖아.”
  “걱정 마. 그래 봤자 중딩이니까.”
  “그래그래. 명품 가방 같은 건 금방 처분될 수 있으니 서둘러서 알아 봐. 혹시 내 도움이 필요하면 바로 연락해. 알았지? 근데 너, 휴대폰은 왜 먹통이야! 도둑맞은 그 가방에 넣어 뒀어?”

  혜수를 다시 남자 친구에게 돌려보내고, PC방을 찾아 신촌의 밤거리를 두리번거린다. 학교 앞이라 마주칠지 모르는 아는 얼굴들을 피해 최대한 한갓진 골목으로 들어간다. 문득, 유치원에서 배운 수건돌리기가 생각난다. 동그랗게 둘러앉은 아이들의 주위를 술래가 돌다가, 남모르게 좋아하거나 반대로 골려 주고 싶은 아이의 뒤에 수건을 놓고 지나간다. 이때 술래에겐 달리는 속도를 안 떨어뜨리면서 소리 없이 수건을 놓는 기술이 필요하다. 수건을 내려놓은 뒤에도 여전히 손에 쥔 듯 천연덕스레 뛸 수 있으면 최고다. 등뒤의 수건을 알아채고 쫓아가더라도 술래가 내 자리에 앉기 전에 잡지 못하면 술래가 되고, 술래가 한 바퀴를 다 돌고 오도록 모르고 앉아 있다간 엉덩이로 이름을 쓰거나 벌칙을 받아야 하는 놀이. 어느 집에나 있는 평범한 수건은, 내려놓는 사람의 마음에 따라 무시무시한 핵미사일이 되기도, 마음을 고백하는 수줍은 꽃이 되기도 했다. 
  나는 그저 목청껏 노래를 부르다 이따금 뒤를 돌아보며 적당한 긴장감을 즐겼는데, 혹시라도 수건이 놓일까 불안해서 제대로 노래도 못하는 애들이 있었다. 술래가 다가가면 등 뒤를 끊임없이 손으로 만져 보고 숨소리조차 가늘어졌다. 하, 이제야 그 애들의 마음을 알겠다. 누가 언제 내 뒤통수를 칠지 모르는, 마른땀이 잔뜩 배어나게 만드는, 놀이의 특성 때문이었다. 지금 보니, 인생이 딱 그 짝이라니까? 어느새 등뒤에 수건이 놓였고 나는 세상모르고 앉았다가 가방을 놓쳤다. 단지 인생의 작은 조각 하나가 넘어졌을 뿐인데, 도미노처럼 모든 계획이 잇달아 휘청거리기 시작한다. 삶의 따분한 장난에 그야말로 제대로 당한 셈이다. 수작을 걸어오면 받아 주는 게 예의란 말씀! 긴장해, 이제부터는 내가 술래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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