둘째날












 12. 린 : 덫에 걸린 문학소녀

 




 


 

  남아메리카의 아마존, 엘 이딜리오라는 조그만 마을에 안토니오 할아버지는 산다. 말라리아로 아내를 잃은 그는 연애 소설을 읽는 즐거움으로 하루하루를 보낸다. 할아버지의 소원은 사탕수수대로 엮은 오두막에서 조용히 사랑 이야기에 파묻히는 삶이지만 세상은 가만히 두질 않아서, 결국 그는 사람을 공격하는 정글 맹수와 한판 승부를 겨루게 된다. 태평양을 따라 싱싱한 대파처럼 가늘고 길게 늘어선 나라, 칠레의 루이스 세풀베다가 쓴 『연애 소설 읽는 노인』의 내용이다. 웃는 얼굴의 털보 아저씨가 천연덕스레 풀어 나가는 이야기가 어찌나 재미나던지, 손도 못 떼고 단숨에 읽었다. 나 역시 물수제비뜨듯 자잘한 괴롭힘에서 벗어나 책에 집중할 수 있기를 더없이 바란다는 점에서, 안토니오 할아버지에게 남다른 우정을 느꼈다. 안토니오 할아버지, 아니면 루이스 아저씨, 나 어떡해요?


  오전에 『피쉬 스토리』에 대한 볼펜 테러를 당한 거 말고는 잠잠해서, 앞으로는 달라질지도 모른다고 착각했다. 그럴 리가 없는걸. 청소 시간에 멍하니 빗자루질을 하는데, 3반 날라리 선아가 다가왔다. 
  “야, 찐따 기린, 유리가 좀 보잔다.”
  으르는 말투라서 어쩐지 불안했다.
  “날 왜? 나 지금 청소하거…든?”
  내 대답이 끝나기도 전에 선아는 뒤에서 양팔로 내 허리를 끌어안더니, 통나무처럼 굳은 나를 번쩍 들고 복도로 나간다. 어디 가는 거야? 설마, 쉬는 시간마다 날라리 아지트로 쓰이는 5층 발코니? 거침없는 억센 손아귀에서 빠져나오려 버둥거려도 아무런 소용이 없다. 나보다 얼굴 하나 만큼 키가 큰 선아이기에 나로서는 아예 두 발이 공중에 떠 있는걸. 볼일이 있다면 만나는 수밖에. 땅에 발도 안 닿도록 곱게 모셔 간다고 치자. 애써 스스로를 위로하며, 대놓고 내 꼴을 비웃는 현정과 친구들의 차가운 눈길을 피한다.

  나와 초등학교 동창인 유리, 강남에서 전학 온 선아는 전교에서 알아주는 2인조 날라리다. 둘이서 매일 대학로, 홍대, 이태원을 돌아다니며 남자들과 어울린다는 소문이 2학기 초부터 돌았고, 그 바람에 이 지역의 날라리 세계에선 제법 유명세까지 타는 모양이다. 하지만 난 유리에 대한 소문의 어디까지가 진실인지 잘 모르겠는걸. 이상하게도 같은 반이었던 초등학교 6학년 때의 내 기억엔 그런 아이가 반에 있는지도 모를 정도로 존재감이 없었거든. 올해 초, 부모님이 이혼했다는 말을 스치듯 들은 기억이 난다. 어떤 일은 사람을 270도 변하게도 한다. 
  나를 맞는 유리는 말끔한 얼굴이다. 화장하기 전에는 이렇게 순한 얼굴인걸. 날라리는 노는 걸 좋아하고 골치 아픈 걸 싫어한다는 점에서 일진회하고는 다르다. 자기들끼리 몰려다니며 온갖 재미난 일을 벌이고 시시덕거리느라 걔들 눈엔 철부지 아가로만 보일 대다수 애들과 쉽게 안 어울리지만, 이쪽에서 먼저 건드리거나 욕하지만 않으면 딱히 무섭게 굴지도 않는다. 근데 오늘 유리는 입을 일자로 굳게 다물고 서서 나를 뚫어져라 바라보기만 한다. 그 옆에서 선아는 내가 도망치지 못하게 길을 막고 있다. 걱정 붙들어 매, 잘못한 게 없으니 도망칠 생각 없거든? 사람을 불렀으면 말이나 하시지! 속으로 큰소리를 뻥뻥 치면서 무슨 일인지는 모르지만 지고 싶지는 않아서, 볼일이 있다는 유리가 먼저 말을 꺼낼 때까지 꾹 참고 기다린다.
  “정말 너야?”
  앞뒤를 다 잘라먹고 이렇게 물어보는 데는 뭐라 할 말이 없다.
  “…….”
  “한 번만 더 물을게. 네가 내 이름 팔고 다녔어?”
  이게 무슨, 먹다 만 개뼈다귀가 데굴데굴 굴러다니는 소린지 모르겠다. 
  “무슨… 소리야?”
  또 뭔가 잘못 걸려들었군, 생각하면서도 어떻게 해야 이 상황에서 벗어날 수 있을지 도무지 알 수가 없다. 그러자 선아가 끼어든다.
  “이년아, 똑바로 불어! 유리가 초등학교 때 빌빌대는 루저였다고, 네가 헛소문을 퍼뜨리고 다닌다며?”
  금방이라도 한 대 후려칠 폼의 선아다. 

  솔직히, 유리가 공부를 잘하진 않았다. 대신 내 양심을 걸고, 공부를 못한다고 해서 패배자라거나 밑바닥 인생이라며 무시한 적은 없어! 초등학교 때, 어느 날인가 발표 시간에 유난히 말수가 적은 유리를 보고, 눈에 안 띄는데도 찬찬히 뜯어보면 참 예쁜 아이라고 생각한 적은 있어도. 유리뿐 아니라 누구라도 마찬가지다. 왜? 나부터 공부를 좋아하는 바른 학생은 아니거든. 성적순으로 도미노처럼 한 줄로 세우면, 누군가는 1등을 하고 그럼 나머지 등수도 있기 마련인걸. 공부가 뭐 대수야? 소설이라면 또 몰라. 성적에 대해서라면 한 톨의 걱정이나 근심도 없이 사는 나이기에, 이건 정말 억울해도 너무 억울해서 팔짝 뛰다가 앞구르기까지 하기 직전이거든?
  “에? 아니야! 무슨, 말도 안 돼. 난 그런 적 없어. 진짜야!”
  어째 말을 하면 할수록, 소문난 거짓말쟁이의 변명처럼 구질구질하다. 유리와 선아는 이미 ‘그렇다’는 결론을 내리고 나를 부른 거야. 질문이지만 물음표를 담은 게 아니라, 느낌표를 확인하는 과정일걸? 내가 무슨 말을 해도 이 일을 바로잡을 수 없을 거야. 나는 무시무시한 함정에 빠졌어! 거미줄에 던져진 나비, 아니 나방이다. 아무도 나를 나비로 보진 않는걸. 살겠다고 날개를 파닥거릴수록 거미가 다가오도록 무섭게 자극할 뿐이다. 이미 몸에 엉긴 끈적끈적한 덫에서 어떻게 해야 벗어날 수 있을까요? 안토니오 할아버지, 아니면 루이스 아저씨, 제발 도와주세요!

  “정말 너 아니야?”
  “맹세해! 나 아니야.”
  왼손 검지로 내 턱을 살짝 들어올리며 날카롭게 눈을 맞추고 물어보는 유리에게, 나는 딱 잘라 말한다. 있는 힘을 다해 어금니를 꽉 깨물고 유리의 눈동자를 똑바로 쳐다보면서. 벼랑 끝에 선 마음으로 한 말이 진심을 전달한 건지, 섬세하게 구부러진 눈썹과 갈색 눈동자에 든 유리의 단단한 분노가 아주 조금이지만 흔들리는 느낌이다. 지금 이 순간, 잠깐 비집고 나온 희망을 날쌔게 붙잡아 여기를 벗어나야 해! 
  “그런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려고 부른 거면, 난 그런 적 없으니까 갈게.”
  “…….”
  “…….”
  유리도, 선아도 둘 다 아무런 말이 없다. 이런 상황에서 침묵은 아주 나쁜 신호다. 선아는 끝까지 꼿꼿한 내 태도에 분을 못 이겨서 씩씩거리고, 유리는 잠시 혼자만의 생각에 잠겼는지 고요하다. 시간이 갈수록 불리하다는 생각에 뒤로 한 발 내딛지만, 선아는 장승처럼 꿈쩍도 않고 버티고 서 있다. 우리 셋을 둘러싼 공기가 그대로 점점 얼어붙는다. 먼지를 품고 얼굴로 날아드는 가을바람과 알 수 없는 추위에 몸이 조금씩 떨리기 시작한다. 덩달아 눈꺼풀이 뜨거워진다. 무서워서, 외로워서, 힘들어서 눈물이 비집고 나오려고 한다. 탭댄스, 공중그네, 탭댄스, 공중그네… 울면 바보야, 기린. 그럼 이 더러운 덫을 놓은 인간들에게 지고 마는걸. 아니야, 난 이제 완전히 지쳤어… 그냥 난간을 넘어서 땅바닥으로 날아 버리면 다 끝인데… 이 순간을 피하고 싶은 마음이 자꾸만 쉬운 선택을 부추긴다. 

  제이 아셰르가 쓴 『루머의 루머의 루머』에, 지금의 나처럼 옴짝달싹 못 하는 상황에 빠져 자살한 여자애가 나온다. 첫 남자 친구의 허세 섞인 거짓말에 친구들의 무책임한 과장이 더해지며 더러운 욕설이 범벅되고 억울한 누명이 씌워져서 결국 견디지 못하고 약을 먹은 아이, 해나 베이커. 해나는 자신을 세상 밖으로 떠민 13명에게 각자 무엇을 잘못한 건지 녹음한 테이프가 차례차례 전달되게 준비해 두고 죽는다. 소설은 9번째로 해나의 테이프를 받은 남자아이의 과거 기억과 현재가 교차되면서 이어진다.
  독특한 구성에 실감나는 표현이 더해져 매력이 넘치는 글이다. 작가는 실제로 이런 이유로 자살을 시도했던 친척과 이야기를 나누다가 소설을 썼다고 했다. 원래 제목은 『Thirteen Reasons Why』다. ‘내가 죽는 13가지 이유’로 해석할 수 있을 거야. 해나가 나라면 죽고 싶은 이유가 몇 가지나 될지, 테이프를 누구누구에게 남겨야 할지, 영원히 시간이 멈춘 이 옥상에서 고민해 본다. 아니, 이렇게 말도 안 되게 당할 수는 없어! 내가 지레 겁을 먹고 죽어 주지도 않을 거야! 내겐 이 모든 악몽을 끝낼 수 있는 가방이 있거든!

  “당연히 아니라고 하겠지, 유리야! 저년 말 믿지 말고 작살내자! 아우, 열 받아! 2반 왕따 주제에!”
  마지막 말에 순간적으로 폭발한 나는 벌게진 눈을 치켜뜨고 손톱을 세워 선아에게 달려든다.
  “나 정말 아니거든? 네 말대로 왕따라서 다들 나랑 말도 안 섞는데, 누구한테 소문을 낸다는 거야, 어?”
  “이게 보자보자 하니까!”
  성질을 못 이긴 선아가 주먹으로 내 양쪽 어깨를 번갈아 한 대씩 퍽퍽 때린다. 주먹이 닿은 자리마다 아픔이 솟아나자 잠시나마 품었던 용기가 순식간에 사라진다. 다시금 하늘로 새처럼 훨훨 날아가고만 싶다. 그때 뜻밖에도 유리가 난간 쪽으로 빙그르르 몸을 돌리더니, 이 모든 일에 갑자기 흥미가 식은 말투로 중얼거린다.
  “오해 같아. 보내 주자.”
  “오해라니? 서미수라고, 얘네 반 애한테 내가 직접 들었다니깐? 유리야, 이럴 때 다른 년들한테도 제대로 본보기를 보여야 돼!”
  “보내. 얜, 아니야.”
  부드러우면서도 무시할 수 없는 힘이 담긴 유리의 말에, 선아는 속이 터진다는 표정으로 자기 가슴을 쾅쾅 치면서도 한 발 물러선다. 어쨌거나 선아는 이 일에서 제3자인걸. 나는 후들거리는 다리로 겨우 걸음을 옮기면서 내가 떨고 있다는 사실을 감추려 애써 본다. 
  “함부로 아가리 놀리지 마라, 이게 끝이 아니야!”
  옆으로 비켜선 선아가 꽉 쥔 주먹을 흔들며 다짐이라도 받듯 말한다. 나는 오늘따라 끝없이 길게만 느껴지는 복도를 지나 우리 반까지 온 힘을 다해 걸어간다.

  어느새 교실 청소는 끝나 있다. 나는 그만 다리가 풀려 의자에 털썩 주저앉고 만다. 살인 미수와 현정 패거리가 시체를 기다리던 까마귀 떼처럼 입맛을 다시는 표정으로 나를 바라본다. 달아나! 지금 당장! 어서, 어서 달아나야 해! 영혼이 탈탈 털린 나로서는 다른 생각은 하나도 안 든다. 나는 숨을 고를 겨를도 없이, 뒤도 안 돌아보고 밖으로 달려나간다. 집으로, 나의 프라하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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