둘째날












 13. 운과 하수 : 거짓말


 

 



 

 

  교복을 입은 중학생들이 길 잃은 양떼처럼 쏟아져 나온다. 하수는 눈에 레이더망을 켜고 도둑놈을 찾는다. 저기다! 놈이 미키 마우스와 함께 교문을 나와 혜화역 방향으로 가는 모습을 확인한 하수는 부리나케 가게를 나선다. 옷이 어제 그대로인 만큼 뒤에 가까이 붙기보다 이대로 건너편에서 평행선을 그으며 따르기로 한다. 미행의 핵심은 안 들키는 기술이니까. 뭐든지 거리를 두고 보면 더 잘 보이는 법이기도 하고. 바로 뒤에서 알짱거리다간 거리에 바글거리는 사람들에 치여 도리어 놓칠지도 몰라. 백동중학교에서 혜화역 1번 출구까지는 다행히 놈이 샐 만한 골목이 없다. 은밀하게, 하수는 놈을 쫓기 시작한다.

  뚫어져라 앞만 보며 걸어간다. 뒤돌아보거나 주변을 기웃댈 생각은, 하지도 마! 잔뜩 긴장한 탓인지 운은 뻣뻣한 로봇이 된 기분이다. 목과 팔, 다리가 삐거덕거리며 따로따로 논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종례가 끝날 때까지도 세상은 조용했다. 경찰이 들이닥치지도, 여자애가 다짜고짜 학교로 쳐들어와 깽판을 부리지도 않았다. 도대체 뭘, 어쩌려는 생각이지? 쳇, 속셈을 모르니, 일단은 내가 알아봤다는 사실을 주황색 남방이 눈치채지 못하게 해야 해. 이건 아님 말고 할 문제가 아니야. 무조건이지! 지금부터는 무조건 남방이 나를 따라온다 생각하고 신중하게 움직여야 한다. 마로니에 공원까지만 가면 되잖아? 조금만 버텨. 운은 쿵덕거리는 마음을 다잡으며 불안한 걸음을 내딛는다.

  느낌 좋고! 주변을 두리번거리거나 살피지도 않고 자연스레 걸어가는 놈을 보니, 들킨 줄 알고 새가슴으로 쪼그라들었던 내가 웃길 정도라니까? 놈이 마치 일부러 그러는 듯이 앞만 보고 걸어서 살짝 꺼림칙하긴 하지만, 내 과민 반응일 거야. 이젠 안심해도 되겠어. 하수는 한결 가벼워진 마음으로 걸음을 서둘러, 혜화역 4번 출구 앞에서 횡단보도를 건너 놈을 바짝 따라잡는다. 놈이 고개를 돌리면 눈이 마주칠 정도로 가까운 거리다. 하수는 마로니에 공원으로 들어가는 놈을 따라 공원 입구에 자리한 좋은공연안내센터 옆 나무에 몸을 숨기고 놈이 정체 모를 남자들을 만나는 모습을 지켜본다. 저 애들은 또 누굴까? 옷차림이 심상치 않아. 하, 설마… 날치기 조직?

 

 

 

  공원에 들어서자 덩치 큰 소 앞에 모여 선 더스키돌핀 크루 형들이 보인다. 운은 한눈에도 남다른 그들에게 90도로 꾸벅 인사를 하며 민우에게 속삭인다. 
  “내 사정, 형들도 아는 거지?”
  휘리릭. 민우가 유쾌하게 휘파람을 불면서 운의 어깨를 따듯하게 두드린다. 
  “돈 워리, 브라더.”
  민우는 무석에게 다가가 오른 주먹을 맞부딪치며 눈을 찡긋하더니, 크루의 나머지와도 비슷하게 인사를 나눈다. 하나같이 모자를 눌러쓰고 브랜드 이름이 적힌 박스 티와 헐렁한 바지를 입고 있는데도, 저마다 분위기가 다르다. 운은 자유로운 영혼을 제멋대로 드러내는 그들을 부러운 눈길로 바라본다. 이런 운의 모습을 옆에서 찬찬히 뜯어보던 크루의 리더, 무석이 운에게 말을 건다.
  “쓸 만한 래퍼라던데? 우린 춤에 빠져 사는 비보이. 난 오무석.”
  “기, 운입니다.”
  “반갑다. 요즘 우리가 배틀 준비 중이라서, 자세한 얘기는 나중에 하고 일단은 연습부터.”
  “네, 전 신경쓰지 마십시오.”
  “헤이, 편하게 말 놓고, 형이라고 불러. 힙합이란 거대한 바다에서, 래퍼랑 비보이는 한 형제나 다름없어. 생김새나 인간이 붙인 이름은 다 달라도 더스키돌핀이나 클리멘돌핀, 헥터돌핀은 전부 멋들어진 돌고래잖냐.”
  “와, 맞아요!”
  “요?”
  “아, 아니. 맞아, 형.”
  “굿! 우리 먼저 몸 좀 푼 다음에 랩 실력 보고, 어떻게 섞을지 고민해 보자. 래퍼지만 너도 간단한 춤까지 출 수 있으면 더 좋잖냐? 일단은 물구나무서기랑 탑락, 풋워크부터 어때? 인디언스텝 실력은 우리 중에 민우가 갑이니, 믿고 배워 봐.”
  자기만의 세계가 있어 보이는 무석이 멋진 말을 쏟아 내자 운은 눈앞에서 폭죽이 펑펑 터지는 것처럼 무지하게 어지럽다. 
  “나는 이 세상에서 우리 크루 형들을 제일 리스펙트함!”
  민우가 왜 그렇게 자기 크루를 아끼는지 운은 이제야 진심으로 이해하게 된 기분이다. 이런 형이라면, 더스키돌핀 크루라면 진짜로 함께해 보고 싶을 정도로 끝내준다! 윽, 기운, 정신 차려, 인마! 오늘은 남방을 따돌리기 위해 가짜로 얼굴도장만 찍으러 온 거잖아? 물구나무서기 연습이며, 탑락? 풋워크를 내가 왜 해! 
  “뭐가… 어떻게 된 거야!”
  혀끝까지 당황한 운이, 앞장선 무석을 성큼성큼 뒤따라가는 민우에게 바싹 붙어 물었지만 민우는 장난스럽게 웃으며 어깨만 으쓱한다.
  “네가 형 맘에 쏙 든 걸 내가 어떡함?”
  남방을 떼어 내려고 시작한 거짓말이 일을 크게 만드는 건 아닌지, 나중에 어떻게 바로잡아야 할지 운은 벌써부터 골치가 아프다. 후아, 쫄지 마! 운은 가슴속 어딘가에 숨어 있을 깡을 끄집어내서 스스로를 응원해 본다. 별 거 아냐. 담임을 속이고 조퇴하는 정도잖아? 일이 꼬이면 정신 놓은 할머니를 핑계로 빠지면 돼. 아님 말고, 가 아니면, 어떡하지?
 

  기분 좋은 리듬이 공원을 채우기 시작한다. 야외무대에 앉은 놈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하수는 공원 안으로 천천히 걸음을 옮긴다. 놈이 자신을 등지고는 있지만 언제 돌아볼지 몰라서, 하수는 공원 가운데 있는 큰 돌 뒤로 몸을 숨긴다. 여기선 무대와 놈이 고스란히 보여, 좋아! 근데 도대체 지금 무슨 일이 벌어지는 걸까? 조금 전부터 무대 위에서는 날치기 조직이 공기를 지르밟으며 마구 날아다닌다. 놈들은 다리춤을 춘다 싶으면 한쪽 손으로 물구나무를 서서 바닥을 튕기고, 멈췄나 싶으면 벌써 바닥에 머리를 대고 팽이처럼 핑글핑글 돌고 있다. 무대 앞은 어느새 몰려든 사람들로 가득하다. 이렇게 가까이에서 비보잉을 본 건 처음이라서, 하수는 가방도 파리도 수혁도 잊은 채 심장의 두근거림에 몸을 맡기고 그저 이 순간을 즐기고 싶은 유혹에 흔들린다. 
  하지만 혹시… 앞에서 저렇게 시선을 끄는 동안, 구경하는 사람들의 가방이나 지갑을 훔치는 건 아닐까? 충분히, 그럴 가능성이 있어. 만약 그렇다면 행동할 사람은 놈이야! 하수는 춤꾼들의 몸짓에 맞춰 들썩이는 심장을 가까스로 주저앉히며 놈에게만 집중하려 애쓴다. 아직까지는, 놈은 꼼짝도 않고 그대로다. 오히려 잘 됐어. 어디 지갑 하나라도 훔치기만 하라고. 굴비 두름처럼 둘둘 엮어서 신고해 줄 테니까!
 

 

  운은 비보잉이 아니라, 무대 옆의 화단을 보고 있다. 높은 대리석 벽에는 신기한 표정의 하회탈들이 이름과 함께 새겨져 있다. 선비, 백정, 중, 할미, 각시? 미안하지만, 저렇게 생긴 여자라면 평생 같이 살긴 어렵겠어. 운은 지금 자신의 표정이 어떤 탈과 비슷할지 문득 궁금해진다. 윽, 모조리 쓸모없는 생각이야! 운은 무대와 화단 사이로 난 샛길을 살피고, 바짓단의 먼지를 터는 척하며 슬쩍 뒤돌아본다. 빼곡히 선 사람들 사이로, 저 멀리, 절대로 착각할 수 없는 주황색 체크무늬 남방이 보인다. 눈을 비비고 다시 봐도 그 옷이 맞다. 운은 제발 자신의 눈이 삐뚤어져서 다른 여자를 그 애로 착각했기를, 남방이 혹시라도 마음을 바꿔서 그냥 집으로 돌아갔기를 무지하게 빌었다, 아니라는 걸 알면서도. 역시… 싸구려 흙수저 인생에 그런 행운이 생길 리 없지. 이쯤 되면, 막가자는 거지? 운은 주머니에서 폰을 꺼내 카톡 메시지를 쓴 뒤, 무대 위에서 자기가 나설 차례를 기다리는 민우를 바라보며 폰을 두드린다. 민우가 폰을 보더니 알았다는 뜻으로 눈을 찡긋거린다. 파란불을 받은 구급차처럼, 운은 앞으로 내달린다.

  세상에! 이번에도 놓쳤어! 쉴 새 없이 움직이는 무대 위 춤꾼들에게 하수가 잠깐, 아주 잠깐 한눈판 사이, 놈은 바람처럼 사라졌다. 놈이 있던 자리는 서로 꼭 껴안고 앉아 박수를 치는 닭살 커플이 어느새 차지하고 있다. 하, 또다시 남자 때문에, 이번엔 ‘다른’ 남자‘들’이긴 하지만, 가방을 영원히 잃은 걸까? 은하수, 또 새 됐다.

  정류장으로 달려가, 막 떠나려는 버스를 잡아타고 운은 가쁜 숨을 내쉰다. 후아. 할머니가 또 없어져서 찾으러 간다며 민우를 속일 수밖에 없었다. 사실은 더스키돌핀 크루와 뭉치겠다는 말부터가 거짓말이었지만. 미안하다, 친구. 하지만 나도 어쩔 수가 없었어. 창가 자리에 앉아 마로니에 공원을 지나치며 보니, 주황색 남방이 여기저기 바쁘게 뛰어다니고 있다. 쳇, 나를 찾는 거야? 여기서 멈추고 제발 그냥 돌아가. 몸에 문신을 새긴 크루 형들과 함께 있는 날 보니 무섭지 않아? 나는 주인이 나타났다고 해서 겁먹고 가방을 돌려줄 순둥이가 아니야. 혹시라도 우리집까지 따라오려는 속셈이라면, 그것만은 어떻게든 반드시 막을 거야! 나도 내가 무슨 짓을 저지를지 몰라… 제발 꺼져! 
  후아, 여자애를 따돌렸으니 일단은 시간을 벌었다. 이대로 돈암동까지 가서 지하철로 갈아타고 서울역으로 간다. 거기서 가슴이 뻥 뚫릴 때까지,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할지 기똥찬 방법이 떠오를 때까지 귀가 터지도록 노래나 들어야지. 끊임없이 어딘가로 떠나는 기차나 보면서. 운은 이어폰을 꽂고 리쌍의 〈Run〉을 들으며 눈을 감는다.

  “운을 왜 찾음?”
  미키 마우스가 잔뜩 의심스러운 얼굴로 따지듯 묻는다. 하수는 싱긋방긋거리며 열심히 머리를 굴리는 중이다. 얘를 최대한 이용하자고. 그러려면 처음에 어떻게 대답을 하느냐가 중요해!
  조금 전, 놈을 놓친 하수는 공원을 이리저리 뒤졌지만 소용없었다. 덕분에 예상치 못한 역사 공부만 실컷 했다니까? 마로니에 공원은 1587년에 태어난 윤선도 시인의 생가가 있던 터로, 1923년엔 종로 경찰서에 폭탄을 던진 김상옥 열사가 일본 경찰 500여 명과 총격전을 벌이다가 마지막 총알로 자결한 곳이고, 1946년부터 1975년까지는 서울대학교가 있던 자리이기도 했다. 세상에, 그러고 보면 우리가 발 디디고 걸어 다니는 모든 곳이 실은 역사적인 장소일지도 몰라! 

  하수에게 가장 인상적인 건 김상옥 동상이었다. 영화 〈암살〉에서 본 여자 독립군 저격수처럼, 지금부터 거의 100년 전에 일제의 손발과도 같은 종로 경찰서를 폭파하고 집들을 넘나들며 총을 쏘고 싸운 조상들이 정말로 있었다는 사실에, 하수는 가슴이 벅차면서도 어쩐지 뭉클했다. 그때 김상옥의 나이가 겨우 서른 넷… 내가 그토록 어둡고 절망적인 시대에 태어났다면 이미 망한 조국을 위해 내 인생을, 내 하나뿐인 목숨을 기꺼이 바칠 수 있을까? 무언가 혹은 다른 사람을 위해 희생한다는 게 어떤 의미인지, 아직 하수에게는 잘 와닿지 않았다. 나라면 희망 없는 독립운동에 아예 뛰어들지 않았거나, 뜻을 같이했다가도 일본 경찰에게 잡히면 손톱이 뽑히는 끔찍한 고문을 당하기도 전에 아는 정보를 모두 불어 버렸을 거야. 춤꾼들의 공연이 끝나기를 기다리며, 하수는 이런 생각들을 했다. 그렇게 살짝 동떨어진 상태로 무대를 끝까지 지켜본 결과, 날치기 조직의 가짜 공연 같지는 않았다. 기억해, 이번이 마지막 기회야. 하수는 최대한 해맑은 표정으로 말을 꾸며내기 시작한다. 
  “너 민우지? 나 운이 여자친구야. 우리 사귄 지 아직 얼마 안 돼서 넌 모를 거야. 당분간 비밀 연애하기로 했으니까.”
  오전에 미키 마우스의 이름을 들은 게 이렇게 도움이 될 줄이야! 근데 내가 여자친구란 말을 믿을까? 스스로 꽤 어려 보이는 동안이라고 자신은 하지만, 길거리에 흔한 연상 연하 커플이라 여기고 제발 속아 줘. 생글거리는 표정과는 달리 하수의 심장은 미칠 듯이 벌렁거린다.
  “정말? 우리 브라더가 그런 중요한 사실을 둘도 없는 베프인 나한테 입도 뻥끗 안 했다 이거임? 언… 빌리, 버블! 아, 근데 여기는 무슨 일로? 운일 만나러 온 거면 조금 전에 집에 일이 생겨서 먼저 감.”
  하, 다행히 넘어갔다. 잠깐만, 역시 놈에게 들킨 걸까? 나를 피해 달아난 거 아니냐고. 에휴, 한심하다, 은하수! 아냐, 어쩌면 정말로 집에 무슨 일이 생겼을지도 몰라. 근데 왜 하필이면 지금이냐고! 하수는 속으로 한숨을 푹푹 내쉬면서도 겉으로는 자연스레 말을 잇는다.
  “알아. 여기서 만나기로 했는데, 갑자기 급한 일이 생겼다면서 집에 간다고, 내일 보자고 하더라고. 근데 아무리 물어도 자세히 말을 안 해. 걱정도 되고. 무슨 일인지 혹시 알아?”
  마지막 말은 괜히 물어봤다. 쓸데없이 대화를 길게 끌 필요는 없다니까? 놈의 집에 불이 났든 도둑이 들었든 나랑 무슨 상관이라고. 미키 마우스가 논리적으로 생각하거나 이상하다는 느낌을 갖기 전에 얼른 대화를 끝내고 국정원 직원처럼 흔적없이 사라져야 한다. 플랜 B를 미리 짠 것도 아닌데, 하수의 입에선 두루마리 휴지처럼 말이 술술 풀려 나온다.
  “나 이대로 가면 걱정하느라 밤새 잠도 못 잘 거라서, 운이에게 가 보려고. 근데 나 아직 운이네 집이 어딘지는 모르는데, 좀 가르쳐 줄 수 있을까? 너한테 들었다고 절대로 말 안 할게!”
  엄마 뱃속에서부터 타고났다! 나도 내가 이렇게 뛰어난 거짓말쟁이인 줄은 몰랐다. 사람은 과연 자신에 대해 얼마나 알고 살아가는 걸까? 눈치 없는 미키 마우스가, 듣고 보니 자기도 엄청나게 걱정이 된다며 같이 가겠다고 해서 말리느라 하수는 혼을 뺀다. 아니라고, 운이 불편할 수도 있다며, 오늘은 혼자 가 볼 테니 오늘의 만남을 비밀로 해 달라는 부탁도 잊지 않는다. 미키 마우스는 그제야 알겠다며, 대신 운의 상황이 안 좋으면 꼭 연락하라며 자기 폰 번호까지 친절하게 알려 준다. 나, 이참에 아예 연기자로 나설까? 아무것도 모르는 어린 청소년을 속이자니 이 누나의 양심에 난 한 가닥 털이 살짝 걸리기는 하지만, 깔끔하게 무시하고 돌아선다. 
  그럼 이제 슬슬, 내 남자 친구를 만나러 가 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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