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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소설 : 촛불 맨드라미] 첫째날 7. 린 : 꿈이 이루어지면
홍유진 작가 | 승인 2017.04.03 00:00

 

 

 






첫째날













 7. 린 : 꿈이 이루어지면


 


 

 

 

  꿈은 이루어진다!
  
보고 또 봐도 도저히 안 믿겨! 베개에 감춰 둔 일기장을 꺼내며 돌아보고 또 돌아봐도 가방은 그대로 있다. 기억이 가물가물할 만큼 오랜만에, 즐거운 마음으로 일기를 쓴다. 손에 쥔 노랑 꽃무늬 볼펜도 춤추듯 움직이는걸. 당장이라도 가방을 싸서 프라하로 떠나고 싶은, 참을 수 없는 내 존재의 가벼움에 지구 어디선가 지진이라도 난 것처럼 온몸이 살짝살짝 떨린다. 지금 이 순간만큼은 마음껏 꿈꿀 수 있어. 근사한 하늘 아래 자신만 알아볼 수 있는 특별한 그림을 늘어놓은 어느 젊은 화가와 실에 붙들린 앙증맞은 마리오네트로 인형극을 하는 털보 할아버지를 지나치며 카렐교 위에서 바람을 맞는 기린 한 마리… 낡은 바이올린에 몸을 맡기고 인생을 연주하는 길거리 예술가도 만날지 몰라. 아, 상상만으로도 담요를 덮은 것처럼 따스해진다.

 
  내가 
세상에서 제일 사랑하는 우리 오빠, 운은 이런 사람이다. 세상의 무게에 눌려 딱 죽어 버리고만 싶을 때, 기적처럼 나를 일으켜 세운다. 할아버지와 엄마, 아빠가 한꺼번에 돌아가시고 할머니가 쓰러졌을 때도 그랬다. 오빠가 없었다면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 거리를 비칠비칠 한참이나 헤맸을 거야. 제자리만 뱅뱅거리다 돌이킬 수 없는 실수를 했을지도.
  
그래서 나는 알아 버렸다. 지금 당신 곁에, 한 사람이라도 있나요? 이건 대통령 당선보다 더! 로또 당첨보다도 훨씬! 인생을 송두리째 뒤흔들 만큼 어마어마한 문제라는 걸. 살다 보면 누구나, 도끼로 자기 발등을 찍다 못해 망치로 마구 짓이기고 싶을 정도로 멍청한 실수를 저지르곤 한다. 그때. 그럴 수 있다고, 지금이라도 다시 일어서면 된다고, 기꺼이 손을 내밀어 무릎을 털어 주고 어깨를 두드리는, 하다못해 입에 발린 소리라도 따듯하게 건네는 단 한 사람이라도 있느냐에 따라서 인생은 365도 달라질 거야. 
  어쩌면 겨우 5도의 차이처럼 보일 수도 있다. 내가 아는 삶은, 지옥에서 천국으로 단번에 바뀔 만큼 그렇게 호락호락하지 않거든. 하지만 그런 삶을 한 바퀴 돌아서 5도를 더 간다는 건… 나 자신을 밑바닥까지 들여다보고 세상을 보는 자세를 바꿔서 다시 한 걸음을 내딛는 성장통을 오롯이 견뎌 냈다는 뜻이야. 그리고 그 한 걸음을 가능하게 만드는 건, 아무리 둘러봐도 메마른 모래뿐인 세상이라는 사막에서 눈앞의 현실에 풀썩 무릎이 꺾일 때조차 아직은 살아갈 만하다고 문득 고개를 들게 만드는 한 모금의 위로인걸. 누군가의 진심 어린 온기에 힘입어 우리는, 나를 반겨 줄 작은 오아시스가 여전히 이 세상 어딘가에 있을 거라는 믿음을 잃지 않을 수 있어. 
  그냥 5도와는 비교가 안 되는 365도를 움직이게 만드는 한 사람, 내겐 오빠가 그런 사람이다. 할머니는 하나도 도움이 안 되거든? 할머니는 어제도, 오늘도, 내일도 매일매일 맨드라미만 보고 앉았는걸.

  오후에 토마스란 새로운 친구를 사귄 뒤로, 또 다른 친구가 쪽지를 타고 더 날아오진 않았다. 그래도 다시 고개를 들어 이사카 씨의 물고기를 바라볼 용기 따윈 사라져서, 나는 그냥 가방만 생각하고 또 생각했다. 꼭 그 가방이어야 해. 가방을 들고 인천공항을 달려가는 나, 신나서 입이 찢어져라 웃는 비행기 속의 나, 프라하의 루지네 국제공항에서 기쁨의 도가니에 빠져 깡충거리는 나, 읽지도 못하는 체코어 표지판 앞에서 헤매면서도 마냥 샐샐거리는 나… 다양한 나를 수없이 그려 봤다. 어떤 모습의 나든, 꼴도 보기 싫은 이 학교와 하도 나를 째려봐서 눈이 돌아간 저 괴물들에 대한 기억조차 없었다. 그곳에서야 비로소, 나는 나 자신을 사랑할 수가 있었다.
  오늘은 너무나 괴로워서 책가방에라도 짐을 싸서 떠나고 싶었어. 그런 마음으로 마지못해 집으로 돌아왔는데, 이 가방이 거짓말처럼 내 눈앞에 나타난 거다. 이건, 당장 오늘밤에 떠나라는 하늘의 뜻이야!

  어느 작가더라? 사람이 일기를 쓰는 건 다른 사람에게는 말할 수 없는 생각과 느낌을 털어놓기 위해서라고 했다. 동감이에요, 기억나지 않는 작가님! 정말로 그렇다. 내 일기장을 몇 장만 앞으로 넘기면 누구나 알 거야. 하지만 왕따를 당한다는 말은 나의 키다리 아저씨, 우리 오빠에게도 차마 할 수가 없거든. 오빠는 내가 왜 이 가방과 프라하에 목을 매는지도 모르는걸. 
  언젠가 내게 물어보기는 했다. 
  “왜 하필 프라하야?”
  그런 오빠에게 나는 하늘 이야기만 했지만. 
  “유럽 방랑인가? TV에서 여행 프로그램을 봤는데, 체코의 수도 프라하가 나왔거든. 프라하를 가로지르는 블타바 강 위로 탁 트인 하늘이 비춰지는데… 가슴이 시리도록 좋았어. 다른 말은 안 어울려. 그냥, 슬프도록 아름다웠어. 하늘은 그 도시에 사는 사람들의 마음을 닮는 것 같거든. 서울 하늘은 높은 건물에 가려서 잘 안 보여. 가끔은 숨이 막혀.” 
  “그러니까, 고작 하늘 때문이란 말이지?”
  오빠는 오른손 검지를 까딱거리며 빙글빙글 웃었다. 철딱서니 없는 아이를 놀리는 것 같은 말투가 듣기 싫었다. 나는 입을 삐죽거리며 덧붙였다. 
  “뾰족한 갈색 지붕도 마음에 들어서 그래. 프라하는 도시 전체가 유네스코 문화유산일 정도로 최고거든? 방송이 끝날 때쯤 정신을 차리고 보니, 이미 프라하와 사랑에 빠져 버린 걸 어떡해!”
  오빠가 또 소리 없이 웃던 기억이 난다. 
  그땐 말하지 않았지만, 사실은 모든 건물이 다 비슷하게 낡았다는 점이 제일 마음에 들었다. 세련된 큰 건물이 눈부시게 늘어선 거리를 걸을 때면, 사방에서 내리누르는 존재감에 어질어질한 현기증마저 일어나는 서울과는 달랐다. 어디를 봐도 비슷하게 오래된 나지막한 건물들이 잘 어우러져서, 그곳에서는 다 같아 보일 것만 같았다. 부자도, 가난한 사람도, 나 같은 고아도 모두 별다르지 않은 사람처럼.
  배우 이수련이 드라마에서 이 가방을 끌고 나왔을 때는, 잠시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나의 프라하가 담겨 있었는걸! 노랑, 초록, 빨강의 세모난 지붕을 이고 선 올망졸망한 크기의 작은 집들. 그 순간, 결심했다. 저 가방만 내 손에 들어온다면 지긋지긋한 현실을, 희망이나 변화의 가능성이라곤 눈곱만큼도 찾아볼 수 없는 이 절망적인 삶에서 탈출하기로. 아니면 그러기 전에 지구가 멸망해서 내가 떠날 필요가 없어지거나.
 
  기억나지 않는 작가는 또 말했다. 인간만이 생각과 다른 말과 행동을 하며, 동물은 생각하는 대로 행동하기 때문에 일기 따윈 안 쓴다면서. 동물학자도 아니고 별다른 존재감도 없는 중1에 불과한 내가 동물들의 솔직한 머릿속까지 들여다볼 순 없지만, 인간에 대해서만큼은 고개를 끄덕끄덕하게 만드는 말인걸. 내 마음대로 했으면, 이렇게 소심하게 노트에다 저주를 퍼붓는 대신 실제로 미수를 죽여 버렸을지도 모르거든. 아니면 내가 진작 자살했거나. 

  이렇게 깔끔하게 일기를 마무리하고, 교실의 악마들로부터 오늘 받은 사악한 쪽지를 하나씩 펴서 일기장에 붙인다. 이 더러운 종이들을 공중에 찢어발기거나 이글거리는 지옥 불에 던져 버리고 싶은 마음은 굴뚝같지만, 어금니를 깨물며 참아야 한다. 만약 내게 무슨 일이 생기면, 그년들의 본모습을 폭로해 줄 증거가 필요하거든. 지금 잠시 내 입을 막더라도 소용없어. 내 일기장은 모두 알고 있거든!

  이제 오늘의 할 일이 모두 끝났다. 잠자코 내 결정을 기다리는 가방을 끌어안자, 갑자기 마음이 출렁거린다. 직장인들이 사무실 서랍에 넣어 둔, 손때 묻은 꾸깃꾸깃한 사표를 볼 때 이런 기분일지도 몰라. 어쩐지 가방이 나보다 큰 존재처럼 느껴진다. 내가 조금만 더 어린아이였다면, 지퍼를 열고 들어가 엄마 뱃속에서처럼 몸을 웅크리고 한숨 푹 자고 싶을 정도인걸. 보들보들하게 처리된 가죽, 빳빳하게 각을 세운 네 귀퉁이, 잡기 편하게 구부러진 손잡이는 볼수록 탐난다. 
  바로 떠날 사람처럼 일어서서 가방을 끌어 본다. 어라? 손잡이 밑, 손가락이 닿는 부분이 오돌토돌하다? 바닥에 가방을 조심스레 눕히자 이상한 자국이 눈에 들어온다. 영어 알파벳을 닮았는걸. 들여다보면 볼수록, 어쩌다 긁힌 자국이 아니라 누군가 정성 들여 새긴 글자 같다. S? 내 이니셜도 아니고 가방 회사 이름에도 ‘S’는 없거든? 그러고 보니, 오빠는 이 가방을 어떻게 구한 거야? 이유를 알 수 없는 불안감이 조금씩 뭉게구름처럼 솟아나지만 휘휘 저어 날린다. 어릴 때부터 남의 물건엔 손도 안 대던 바른 생활 사나이가 설마 어디서 훔치기라도 했겠어? 그래, 프라하로 떠날 준비나 하자. 근데 참 이상한걸. 두 손 모아 바라던 꿈이 이루어지면 마냥 행복할 줄 알았는데, 가슴이 불안하게 두근거리면서 오빠와 할머니가 마음 한편에 가시처럼 걸린다. 오늘은 내 품에 가방이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꿀잠을 잘 테니, 나머지는 내일, 내일이 오면 생각하는 걸로.








 

<저작권자 © 홍유진 작가,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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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 댓글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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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지나가다 2017-04-04 23:36:19

    저 가방엔 역마살이 꼈나봅니다.. 저 가방을 손에 쥐는 자, 완벽한 가출을 꿈꾸는 ㅎㅎ 하수도 린도.
    아, 학교폭력이나 괴롭힘을 막아내는 다른 방법은 없을지...   삭제

    • rmaxod 2017-04-03 19:09:56

      린한테 오빠가 있어서 너무 다행이란 생각이 드네요
      린의오빠같은 다른사람에게 1도라도 온기를 줄 수 있는사람이
      되고싶어지네요^^! 내옆에 힘이 되어 주는사람들에게
      감사함이 드네요~~! 린 홧팅~작가님도 홧팅!!^^   삭제

      • Gen Paik 2017-04-03 18:38:45

        여중 1년생 린...
        프라하의 하늘과 오래된 집들 꿈꾸는 그 얼굴,
        어찌 생겼을까 보고 싶네용~^^
        그 나이땐 세상이 다 그렇게 보이죠~~
        저 건너 프라하에 사는 여중 1년생 누군가도 린이 처럼
        미지의 서울거리를 꿈꾸겠죠?^^*
        린이의 꿈이 자신의 현실을 도피하는 수단으로만 그치지 않았으면 좋겠네요.
        잠시의 방황은 나름 필요하지만 '막가는 아이돌'이 되지 않았으면 합니다....
        그나저나, 가방 도둑 맞은 "S"는 지금 뭐하고 있는지?..
        그 친구도 처지도 궁금하네용~~~^^::::   삭제

        • MrLee 2017-04-03 13:02:14

          여행 다닐 때 가장 감성에 젖게 했던 도시가 프라하였는데..
          여행 내내 비가 올 듯한 하늘이 더욱 아련한 기억으로 남아 있거든요ㅡ
          작가님의 글 한 줄 한 줄 마다 탐미적이고 감각적으로 표현된
          프라하에 대한 묘사가 그때의 기억을 되살리게 합니다.
          늘 관심깊게 챙겨보고 있습니다. 좋은 글 계속 기다릴게요♡   삭제

          • Lizza 2017-04-03 11:07:15

            '365도보다 5도를 더 갈수 있도록 만드는 그 무언가'가 마음에 와 닿습니다.
            가방으로 이어진 네 사람의 이야기를 기대해봅니다.
            좋은 글 감사합니다.   삭제

            • drumi 2017-04-03 11:06:47

              365도 전진.
              기대됩니다.

              월요병과 함께 한 주를 시작했었는데,
              이젠 촛불 맨드라미와 함께
              월요일을 시작해서 좋네요.^^
              작가님, 파이팅입니다!!   삭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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