셋째날












 21. 운 : 한 걸음


 

 

 

 

 

  다시 따분한 하루다. 수업마다 선생들은 칠판을 한가득 채우고, 쉬는 시간에 야한 동영상을 돌려보거나 치고받으며 노는 놈들도 무지하게 한결같다. 나 역시 창가에 삐딱하게 앉아서 귀에 이어폰을 박은 폼이 하나 별다르진 않겠지만. 아침에 눈을 뜰 때마다 고등학교 졸업식 날이기를, 또 하루가 가기만을 기다리며 하수도의 물처럼 느릿느릿 흐르는 오늘을 원망하던 어제와는 다르다. 시간의 물살이 눈에 보일 정도로 세차고 빨라진 기분. 때아닌 폭우에 남해까지 물길이라도 뻥 뚫린 것 같다!
  돌아보면, 이 작은 변화의 시작은 가방이었다. 가방을 훔치면서부터 이틀 동안 나는 위험한 주식처럼 천국과 지옥을 하루에도 수십 번 오르내리고, 늘 한발 떨어져서 세상을 바라보느라 끼고 있던 팔짱을 풀어 젖혀야 했다. 훔치기 위해 도망치기 위해 가족을 지키기 위해 숨가쁘게 달리고 머리를 당구공처럼 굴렸다. 후아, 순간순간에 최선을 다한 건 정말 오랜만이었어! 숨이 턱까지 차올라 기절하기 직전의 현기증 나는 경험은 생각보다 나쁘지 않았다. 1년 만에 린과 진짜 속내를 나눌 수 있었잖아? 그렇다고 다시 도둑질을 할 생각은 없지만. 이번에 배운 점이 많다. 무엇보다 동생과 할머니가 얼마나 소중한 존재인지 다시금 깨달았다. 린에겐 차마 말하지 못했지만, 매일매일 가출을 꿈꾼 건 나도 마찬가지였어. 린과 나 중에 누가 더 가슴속 깊이 도망치고 싶었는지, 마음속에서 누가 더 멀리 떠났었는지는 아무도 모르겠지만.

  롤러코스터의 맨 앞자리처럼 피하고만 싶었던 현실은, 막상 부딪쳐 보니 별 거 아니다. 도저히 앞이 안 보여서 할머니의 치매를 모른 척했고 린은 내 앞에서 아무 일도 없는 얼굴로 마냥 웃어 주기만을 바랐다. 서로가 진짜로 어떤 생각을 하며 살아가는지, 나는 제대로 보지도 듣지도 말하지도 않았어. 어제까지의 나는 무엇을 할지 어디로 갈지 하고 싶은 일은 도대체 뭔지조차 찾지 못하면서 어찌할 바 모르는 내 모습을 비추기 싫어 가족이란 거울을 가리고 돌아선 철부지였다. 
  이번에 알았다. 앞으로 나아갈 수 없게 만드는 건, 두려움이다. 하늘에 닿을 것처럼 높아 보이던 벽은 넘으려고 힘껏 땅을 박차고 오르자 보잘것없이 낮아서, 그 앞에서 울부짖고 절망하던 내가 우스울 정도다. 나를 막아선 수많은 벽 중에 고작 하나를 넘었을 뿐이지만, 다음번엔 좀 더 멋지게 날아오를 수 있을 거란 자신감도 제법 생긴다. 진짜지? 귓가에서 오프스프링이 멋들어지게 기타를 튕기며 내게 묻는다. 기운, 버틸 수 있겠어? 헤쳐 나갈 수 있겠어? 잃어버린 것을 되찾으려 애쓰느라 삶을 낭비하지는 마.
  따듯하게 마음을 어루만지는 가사와 리듬이 마음에 든다. 뉴 펑크? 그게 뭔지 몰라도 상관없어. 아마 오프스프링도 마음이 가는 대로 연주하고 노래할 뿐, 그런 말에 얽매여 음악을 하진 않을 거야. 아님 말고.

  내가 늘 이어폰을 끼고 다녀선지, 반갑답시고 아는 척을 하는 놈이 오나가나 꼭 있다. 그런데 음악을 좀 한다는 놈들은 왜 하나같이 펑크록이 뭐니, 정통 힙합이 뭐니, 밴드계의 갑이 누구니, 이러쿵저러쿵 골치 아픈 소리만 지껄이는 건지, 그럴 때마다 무지하게 진절머리가 난다.
  “N.W.A의 〈Fuck Tha Police〉는 들어 봤지?”
  “난 JAY Z가 갑이라는 데, 백 억 건다!”
  이런 말에 잘 모른다거나 관심 없다고 답하면, 단체로 짠 것처럼 똑같은 말이 튀어나온다.   
  “랩을 좋아한다면서 이 노래를 모른단 말이야?”
  “오 지저스! 넌 얀마, 힙합 공부 좀 더 해야겠다.”
  이런 놈들은 얄팍한 음악 지식을 하나라도 더 드러내고 싶어서 몸살이라도 난 것 같다. 쳇, 뇌 주름에 똥만 들어찬 판박이들! 단체로 남의 어이를 가출시키는 놈들이다. 네가 아는 노래를 내가 모른다고 해서, 네가 좋아하는 래퍼를 내가 별로라고 생각한다고 랩을, 힙합을, 음악을 한다고 말하면 왜 안 되지? 내가 아는 노래나 래퍼를 네가 다 아는 것도 아니잖아?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힙합 음악과 래퍼를 네가 다 아는 것도 아니야. 반박 불가지? 좀스러운 싸움 같아서 이젠 일일이 따지지도 않는다. 귀찮아서 그냥 한마디만 한다. 
  “음악은 내가 즐기면 그만이지, 꼭 다 알아야 하나?”
  내가 이렇게 말하면, 납득이 안 간다는 얼굴로 꼭 토를 다는 녀석들이 있다. 사실 대부분이 그렇다.
  “무식하면 용감하다고. 한물간 노래만 파는 진지충 새끼!”
  “R.I.P.”
  Rest In Peace, 편히 잠드소서. 이 정도까지 말하면 열에 아홉은, 말이 안 통한다고 슥 무시하면서 알아서 제 갈 길을 간다. 실은 가끔은 눈앞에서 제발 좀 꺼졌으면 하는 놈한테 일부러 그렇게 말하기도 한다. 그래도 계속 들러붙으면? 내가 자리를 뜨면 그만이지. 아님 말고.

  모르는 놈들이 뭐라고 떠들건, 나는 있는 그대로의 진심을 솔직하게 전하는 음악이면 다 좋다. 약간은 부족하고 조금은 서투르며 왠지 모르게 첫사랑에 빠진 사람처럼 수줍어도 괜찮아. 남의 시선을 의식해서 화려하게 꾸미거나 다듬지 않은 힙합과 모든 음악을 사랑한다. MC 스나이퍼, 크라잉넛, 지난 1년 동안 들을 때마다 내 심장을 찢은 〈Grand〉를 부른 R.P… 인생을 시처럼 노래하는 힙합이 울리던, 조금은 남다른 우리의 맨드라미 꽃집. 내 음악 세계는 거기서부터, 가족과 함께 자라났다. 


  그중에서도 아빠가 좋아하던 오프스프링의 이 노래 〈Kristy, Are You Doing Okay?〉는, 고막에 천둥이 내리꽂히는 느낌이라 나도 즐겨 듣는다. 뮤직비디오도 괜찮았다. 사람들과 웃고 떠들다가 혼자가 되면 무너질 것처럼 외로운 검은 머리의 여자애가 주인공이었지. 검은 눈물을 흘리는 눈동자를 잔뜩 그려 놓았던, 주인공의 찢겨진 노트가 떠오른다. 학교 사물함엔 친구들과 함께한 사진이 무지하게 많지만, 사진 속 주인공의 얼굴은 다 긁혀져 있었어. 자연스레 동생이 생각난다. 린아, 오늘은 괜찮은 거지?

  점심을 먹고 와서 민우와 힙합 정신을 살리고 있는데, 갑자기 교실 뒤쪽이 시끌벅적해진다. 김동진이 심심할 때면 매일 어김없이 반복되는 일이다. 나는 웬만해선 창가에서 눈을 돌리거나 귀에서 이어폰을 빼거나 음악을 줄이지 않기에 제대로 보거나 들은 적은 없다. 그냥 오늘도 또 패는구나, 생각하고 마는 거지. 아님 말고. 어제까지는 그랬다, 린이 왕따라는 사실을 알기 전까지는. 당연히 내 동생과는 완전히 차원이 다르지만. 추원일은 내가 봐도 왕따를 당하게 생겨서, 그놈이 맞건 말건 쓸데없는 일에 낄 생각은 없어. 윽, 근데 왜 오늘따라 자꾸 신경이 쓰이지? 남중과 여중의 학교 폭력은 좀 다르겠지만, 린이 떠올라 이어폰에서 자유로운 한쪽 귀를 슬쩍 열어 본다.
  후아, 등 뒤로 꽤 팽팽한 긴장감이 느껴진다. 추원일을 사물함 앞에 몰아넣고 여럿이서 둘러싼 거? 이제 막 시작된 데다 김동진이 추원일을 어떤 식으로 쥐어짜는지 모르니 상황 파악이 전혀 안 되잖아? 예전에 민우에게 들은 말로는, 주로 가방이나 나이키 운동화 같은 비싼 물건을 뺏는다고 했다. 추원일의 부모가 동대문 시장에서 옷 장사하느라 바빠서, 어릴 때부터 용돈을 쥐여 주고 여기저기 학원으로만 애를 돌리다 보니 패스트푸드 과다 섭취로 소아 비만이 왔다지? 원일이 동진의 밥이 된, 첫 번째 이유다. 이미 서늘한 가을에 접어들었는데도 교실에서 진땀을 흘리는 100Kg의 추원일을 보면 나도 그다지 유쾌하진 않아, 후아. 이제 제대로 시작인가? 누군가 원일을 툭툭 치며 지저분한 주둥이를 뗀다. 

  “븅신아, 체육복을 먼저 벗으라고! 한쿡말도 못 알아들어요? 아, 씨! 북극에서 왔나? 퉤.”
  몇 명인지 모를 패거리가 바보 형제처럼 다 같이 낄낄거리며 웃는다. 추원일은 체육 시간이 끝난 지가 언젠데 아직도 체육복을 입고 있지? 놈들도 그냥 때리면 되잖아? 체육복은 왜 굳이 벗으라는 거지? 윽, 그렇다고 돌아보고 확인하긴 귀찮다.
  “어, 이, 이걸, 여, 여기서?”
  원일은 변비에 걸린 굼벵이가 똥이라도 싸는 것처럼 아주 더뎌서 듣는 사람의 속을 터지게 하는 말투로 대답한다. 녀석이 맞는 두 번째 이유다. 맨날 자기를 뚜들기는 김동진 앞에 서면 얼어서 더 그럴 수도 있지. 쳇, 그래도 남자답게, 덜 쪽팔리게 말할 수도 있잖아?
  “그래에. 좆팔계 주제에 그렇게 존나 멋진 빤스를 입으면 안 되지이! 그건 존나게 천재적인 디자이너이신 캘빈 클라인 님에 대한 예의가 존나 아니지. 안 그래, 얘들아?”
  “앙!”
  바보 형제들이 우렁차게 대답하며 킬킬거린다.
  “니애미! 돼지 새끼한테 명품이라니! 하여간 요즘은 개새끼나 사람 새끼나 가릴 것 없이 살기 좋은 세상이라니깐, 쌍!”
  윽, 얘기가 이상하게 돌아간다. 지금 벗으라는 게 팬티 맞아? 환한 대낮에 다른 놈들은 다 교복을 차려입은 교실에서 팬티를 벗어서 달라는 거야? 윽, 아무리 덜떨어진 놈이라도 그런 짓은 할 리가 없잖아!
  “내, 내가… 내일 새, 새로 사다, 줄게.”
  “내일! 지금 우리랑 장난하냐? 니애미!” 
  “이건 입, 입어서 좀 그렇고… 또….”
  원일의 반응은 예상대로다. 쳇, 남자 새끼가 저렇게 물러 터져서야! 듣는 내가 다 기가 찬다. 후아, 저런 꼴을 보면 저놈 부모는 또 얼마나 속이 뒤집어질지. 하긴 추원일은 저팔계가 형님으로 모시겠다고 달려들 정도로 온몸에 살이 뒤룩뒤룩한 데다, 머리가 둔해서 공부도 그저 그렇고, 얼굴이 잘생긴 것도 아니니 뭐 하나 내세울 게 없잖아? 부모는 장사 때문에 늘 바빠서 저녁에 별을 보고 나가서 새벽에 별을 봐야 집에 들어오지. 원일이 동진의 밥이 된 결정적인 이유다. 못살게 굴어도 누구 하나 신경을 쓰는 사람이 없잖아? 김동진 패거리가 허벅지나 옆구리처럼 옷을 입으면 안 보이고 멍도 잘 안 드는 곳을 가려서 지능적으로 때리다 보니, 빨가벗기지 않는 이상은 부모도 모르는 거다. 솔직히 그게 어디 그분들의 잘못이겠어? 때리는 놈들 탓이지!
  “쌍! 좀 그런 수준 좋아하네! 킁킁! 아오, 구린내! 더러워라.”
  “에이, 더럽긴 뭐가 더러워. 우리 원일이가 지금 화장실에 가서 새것처럼 존나 깨끗이 빨아올 건데. 안 그러냐, 원일아?”
  “…….”
  “이 새끼, 대답 안 해? 동진이가 묻잖아, 니애미!”
  “아, 씨! 그냥 조용히 벗지? 우린 바쁜 몸이라 내일까지 못 기다려. 퉤!”
  “원일아, 요즘 존나 쉬었지이? 벗기 싫으면, 간만에 몸이나 존나게 풀어 볼까?”
  이제 보니 악질이잖아? 추원일이 아무리 병신이라도 팬티를 벗어줄 리 없다는 걸 알면서 손바닥에 올리고 이리저리 굴리며 지우개 따먹기를 하듯 갖고 노는 거지. 왼쪽 귀에선 이런 상황을 전혀 모르는 블랙 아이드 피스가 혀에 땀나게 외친다. 〈Where is the love〉, 세상이 뭔가 잘못됐다며 사람들은 폭력으로 가득 차 있다고 사랑은 도대체 어디에 있냐며 하늘에 대고 열심히 묻기만 하고 있다. 윽, 대답은 누가 하라는 거야?
  “내, 내가, 내일 꼬, 꼭….”
  “내일은 존나게 늦는다니까안!”
  말이 끝남과 동시에 공중을 날아가 꽂히는 주먹 소리가 들린다. 퍽퍽퍽퍽퍽퍽. 1초라도 더 살아 보겠다고 덜덜덜 기어가서 잡초를 잡고 안간힘을 쓰는 베짱이를 발견한 개미떼처럼, 동진과 똘마니들이 달려드는 게 느껴진다. 지금 원일은 눈알, 팔과 다리, 날개를 하나씩 잡아 뜯기는 곤충이다. 불쌍한 자식! 맨날 뭘 가져오기만 하면 동네북처럼 두드려 맞고 뺏기니까 제딴은 속옷에 욕심을 부렸나? 멍청하게, 하필이면 체육이 든 날에 입고 와서 딱 걸리는지. 그렇게 머리가 안 돌아가? 무지하게 지질해서 나도 모르게 고개를 그쪽으로 돌리다가, 하필이면 원일과 눈이 딱 마주치고 만다. 윽, 오늘따라 운도 더럽게 없지.

  “김동진!”
  입을 열고서야 그게 나라는 걸 알았다. 옆에 앉은 민우가 내게 두 손을 휘젓는다. 민우가 보기엔 하찮은 남의 싸움에 뭐 하러 나서냐는 거겠지. 나는 걱정하지 말라는 눈빛을 보내고 고개를 들어 교실 앞을 바라본다. 칠판 옆 교훈이 적힌 액자가 눈에 들어온다.


  저런 말이 우리 반 교훈이었나? ‘배려’가 무슨 뜻인지 곰곰이 생각해 보면서, 앞으로 일이 어떻게 흘러갈지 되어 가는 대로 두고 잠시 기다린다. 동진 패거리는 막 벌어진 잔칫상에 감히 양잿물을 들이부은 시건방진 놈을 찾으려 법석이다. 
  “아, 씨! 한참 분위기가 좋은데, 어떤 븅신이야? 퉤!”
  “니애미! 미친 조울증 새끼, 빨랑 안 나오냐!”
  동진의 똘마니들이 오랜 시간 길들여진 개새끼처럼 사납게 으르렁거린다.

  “김동진, 지금 이거 학폭이지?”
  나는 천천히 고개를 돌려 동진을 똑바로 쳐다본다. 평소의 내 말투대로 물으려 애를 쓰는데, 먹힐지는 모르겠다. 지금 내가 믿을 구석이라곤 녀석이 내게 진, 작은 빚뿐이다. 자기 꼰대에 대한 뜬금없는 고백을 들어 줬잖아? 더스키돌핀 크루란 백을 둔 민우의 존재도 든든하긴 마찬가지지만. 그제야 겁대가리를 복도에 내다 버린 놈이 나란 걸 알고, 동진 패거리가 씹어 먹을 것 같은 눈빛으로 나를 노려본다. 5 대 1? 사물함 앞에서 배를 감싸고 엉거주춤하게 움츠린 원일을 동진과 양아치들이 빙 둘러싸고 있다. 뭐야 이거, 알고 보니 무지하게 치사하잖아? 
  “이 새끼가 골로 가고 싶어 환장했나? 쌍!”
  아버지가 군인인 신승현이 숨을 씩씩 몰아쉬며 물소처럼 달려오더니, 책상 위에 놓인 내 폰을 집어 바닥으로 냅다 던진다. 충성심이 강한 폰은 주인을 대신해 할리우드 액션을 선보이며 의자 밑으로 마구 나뒹굴어 준다. 밥지랄하는 성격에 날 바로 안 후려친 게 다행이라고 해야겠지? 마른침을 삼키며 속으로 되풀이한다. 쫄지 마! 그래 봤자 이놈은 따까리일 뿐이야. 나는 눈도 깜빡이지 않고 김동진만 뚫어지게 쳐다본다. 녀석의 뒤로, 눈만 꿈적거리는 원일이 보인다. 커다란 머리를 든 얼빠진 모습에 나도 모르게 짜증이 울컥한다. 아직 상황 파악도 못하고 어리삥삥한 눈빛으로 몸을 흐느적거리는 모습에.
  “야, 이 찐따 새끼야! 어디 봐? 여기 봐! 내 말 안 들려? 쌍!”
  뚜껑이 열린 신승현이 내게 씹어뱉는 소리다.

  어젯밤, 린이 알려 줬다. 
  “애들이 나를 찐따라고 부르길래, 인터넷에 찾아봤거든? 스브스뉴스에 나오더라. ‘절름발이’를 뜻하는 일본말 ‘침바(ちんば)’에서 왔대. 일제 강점기에 생겨난 말로, 6․25전쟁 때 지뢰를 밟아서 다리를 잃은 사람이 많았는데 잘 안 살피고 다니다가 멍청하게 지뢰나 밟았다는 뜻으로 군대에서 많이 사용됐고, 소아마비를 앓아서 한쪽 다리가 부자연스러운 사람을 그렇게 부르기도 하나 봐.”
  그러더니 린은 말없이 발치의 분홍 맨드라미 꽃잎을 하나씩 세기 시작했다. 
  “쳇, 단체로 걸레를 씹어 먹었나! 그렇게 치면 진짜 찐따는 병이나 전쟁으로 다리가 불편해진 사람들이 아니라 그런 말을 만든 사람들, 정신이 절뚝거리는 그놈들이지! 제대로 알지도 못하고 그런 말을 나불대는 멍청이한테나 어울리는 단어잖아? 아님 말고.”
  내 말 끝에 우린 같이 시원하게 웃어 버렸다. 더는 말하지 않았지만, 다수라는 방패를 두르고 약자인 소수에게 함부로 던지는 말, 잔인하게 상처를 주는 말을 보면 인간은 원숭이만큼도 진화하지 못한 짐승이라는 생각이 든다. 온갖 잣대로 뿔뿔이 나눈 세상의 소수를 모두 끌어모으면, 다수를 넘을지도 모르잖아?

  그사이 이 기회에 동진에게 충성심을 보이려는 양아치 나부랭이들이 내게 하나, 둘 더 다가선다. 내 옆에선 민우가 금방이라도 맞붙어 싸울 것처럼 흥분하고 있다. 김동진의 애완견 신승현이 나를 축구공처럼 집어 차려는 순간, 애매하게 웃으며 나를 바라보던 동진이 입을 열어 놈이 가까스로 멈춘다.
  “그게, 갑자기, 왜? 존나 궁금하실까아?”
  김동진은 의외로 지금 이 상황이 재미있다는 표정이다?
  “알고 보니, 내 동생이 왕따라서.”
  공책에 쉼표를 하나 찍을 정도로 아주 짧은 순간, 동진과 민우뿐 아니라 원일까지 모두가 한 방 맞은 얼굴을 하고 나를 쳐다본다. 
  “아하!”
  뜻을 알 수 없는 한마디를 끝으로, 동진은 야릇한 미소를 지으며 침묵한다. 그러자 정지했던 필름이 돌아가면서 모든 게 다시 움직이기 시작한다.
  “니애미. 그게 우리랑 무슨 상관이야!”
  사람의 모습을 한, 동진의 도베르만 4마리가 나를 물어뜯으려 달려든다. 맞서 싸워야 하나, 말아야 하나? 이번이 처음이자 끝이라면 적당히 맞아 줄 수 있어. 하지만 오늘을 시작으로 새로운 개껌이라도 얻은 것처럼 굴면 무지하게 곤란하지. 쳇, 의자를 던지거나 형광등이라도 뽑아서 싸워야 하나? 윽, 무지하게 골치 아프다! 

  “헐! 정원일, 뭐하는 거임!”
  그때 갑자기 민우의 뜨악한 목소리가 교실을 뒤흔들어서 나를 비롯한 모두의 시선이 뒤쪽으로 쏠린다. 원일이 옷을, 그러니까 팬티를 내렸다. 잽싸게 눈을 감아 보지만… 윽. 젠장! 괜히 쓸데없는 일에 끼어들어서, 내가 오늘 별꼴을 다 본다.
  “내가 지금 당장 빨아 올게!”
  원일이 단숨에 말한다. 뭐야, 이제 보니 더듬거리지도 않잖아? 그나저나 저거 정말로 바보지? 원일은 넘치는 허벅살에 걸려 더이상 내려가기를 거부하는 캘빈 클라인의 자존심을 부여잡고 무릎으로 끌어 내리려 끙끙거리며 용쓰고 있다. 
  “아, 이 답도 안 나오는 정신병자 새끼! 안 올려? 에이, 존나 못 볼 꼴 봤네!”
  동감이야. 이 문제만큼은 모두가 같은 생각이겠지. 나는 헤드뱅잉할 때처럼 열심히 고개를 끄덕인다. 동진은 계속 맞는 말을 잇는다.
  “이 존나 변태 새끼야아, 누가 네가 입던 빤스를 입냐? 내일 아침까지 새로 다섯 장 사 갖고 와. 아니면 바나나처럼 존나게 벗겨서 여중 앞에 세워 줄 테니까. 알았냐?”
  “어, 어!”
  원일이 똥똥한 목 위로 고개를 주억거린다. 윽, 예감이 안 좋아. 안 돼. 하지 마! 버둥거리며 다시 팬티를 끌어올리던 원일이 내게 눈을 맞추더니 멍청한 미소를 날린다. 이건 아님 말고, 할 문제가 아니잖아!
  “기운, 이 새꺄! 앞으로 조심해라, 쌍!”
  승현이 손바닥에 강한 애정을 담아 내 뒤통수를 거칠게 쓰다듬더니, 건들거리며 동진에게로 걸어간다. 그깟 명품 팬티 몇 장 얻는다고 나까지 바로 세트로 용서하는 걸 보니, 애들은 애들이다. 윽! 수고했다며 승현의 어깨를 툭툭 치며 복도로 나가던 동진이 불쑥 돌아본다. 나와 눈이 마주치자 녀석은 섬뜩하게 웃으면서 〈다크 나이트〉의 조커처럼 오른손 엄지를 들어 오른쪽 귓불부터 왼쪽 귓불까지 죽 긋는다. 그날 일에 대해 무덤까지 입을 다물라는 뜻이지? 걱정 마. 그건 그렇고 이 상황에서 무지하게 말이 안 되는 건 잘 아는데, 지금 녀석의 눈동자엔 중학생다운 장난기가 가득하다? 명품 팬티를 얻어선지, 그저 뜻밖의 상황에 약간 기분 전환이 된 건지는 모르겠지만 이상하게도 지금 녀석은 즐거워 보인다. 아님 말고.

  나는 아무 일 없던 것처럼 바닥에 늘어진 폰을 들어 올려 손으로 먼지를 턴다. 다행히 안 망가졌다. 민우랑 다시 음악이나 들어야지. 재생 목록을 연다. 이럴 때는 드럼 소리만 간간히 추임새를 넣는, 잔잔한 밴드 음악이 당긴다. 밀키스처럼 살짝 느끼하면서도 맑고 시원한 목소리를 지닌 덴마크 그룹, 마이클 런스 투 록처럼. 반복되는 가사가 많고 영어 발음이 느린 편이라 알아듣기 쉬운 〈25 Minutes〉, 〈That's Why〉를 넘기다 〈Sleeping Child〉를 누른다. 민우는 조금 전의 상황에 대해 나와 무슨 말이든 나누고 싶은 눈치지만, 내가 잠자코 귀에 이어폰을 꽂자 자기도 억지로 음악에 집중하는 시늉을 한다. 고맙게도.
  그나저나 흘끔거리며 나를 자꾸만 쳐다보는 원일의 눈빛이 무지하게 부담스럽다. 나는 영웅 놀이를 한 게 아니야. 잠시나마 네게 관심을 가졌다면, 모두 린 때문이지. 그리고 우리 반 악역이 김동진이라서. 미안하지만, 녀석이 전교 수준으로 싸움을 잘하는 일진이었으면 절대로 안 나섰어! 솔직히, 네가 ‘배려’하고 싶은 ‘친구’는 아니잖아? 같은 반 친구끼리 오손도손 사이좋게 지내야 한다는 담탱이식 설교라면 집어치워. 요즘처럼 하루하루 먹고 살기도 힘든 세상에, 인디언처럼 내 슬픔을 등에 지고 가는 자까지는 안 바라더라도 민우처럼 음악이라도 나누는 사이를 친구라고 하는 거지. 그러지도 않으면서 아무한테나 친구랍시고 어깨를 내어 달라거나 엉겨 붙으면 안 되잖아? 대신 이거 하난 약속한다. 친구가 아니더라도 괴롭히진 않아.

  다시 창밖을 본다. 어제와 다를 바 없는 선선한 가을 오후다. 하지만 지난 이틀을 떠올리자 다시금 어디선가 따듯한 바람이 가슴으로 불어온다. 내 귓가엔 어느새 MC 스나이퍼가 나타나 〈봄이여 오라〉며 몰아치는 빗줄기 같은 랩을 쏘다가, 래퍼 연승의 〈한 걸음〉으로 잔잔하게 나아간다. 내 폰은 확실히 주인님의 기분을 읽는 재주가 있어! 민우와 나는 어깨동무를 하고 함께 노래하기 시작한다.


  할머니는 오늘도 목욕탕 의자에 앉아 하염없이 맨드라미를 바라보고 있겠지. 늘 같은 자리에서 할머니가 머무르도록 지켜 주고 내 비밀의 무덤이 된 촛불 맨드라미… 어쩌면 할머니와 린과 나, 우리는 서로에게 촛불 맨드라미 같은 존재가 아닐지, 그런 생각이 부드럽게 머리를 스친다.
  이따가 1시간만 일찍 조퇴를 하고, 집으로 달려가야지. 오들오들 떨면서 방에 들어갈 생각도 못하고 있을 할머니에게 점퍼를 입히고, 린을 데리러 가야겠다. 그러고 보니 린이 다니는 여중은 엎어지면 이마가 깨질 거리인데도 아직 가 보질 않았잖아? 할아버지나 아빠, 엄마라면 달랐을 거야. 나는 실제로는 가장이라고 할 만한 일을 하나도 안 하면서, 상상 속에서 다른 사람의 인생과 저울질만 하며 스스로를 불쌍하게 여겼는지도 모르겠다. 수업종이 울리기를 기다리며, 나는 오늘도 뚜벅뚜벅 한길을 걸어가는 래퍼 연승과 함께 천천히 내딛는다. 
  한 걸음, 한 걸음. 또 한 걸음, 한 걸음.

 

 

 

 

* 비보이 크루에서 활동하는 래퍼에 대해 소중한 조언을 주신 엠비(마룻바닥비보이) 크루의 R.P 님과 라쿤 팍 님께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 〈한 걸음〉 가사 인용을 허락해 주신 래퍼 연승 님께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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