셋째날












 19. 린 : 눈 내리는 사막  


 

 



 

 

 

  아침에 짧은 가을 소나기가 내렸다. 학교로 가는 길, 낙엽이 구두 아래 부드럽게 밟히는 느낌이 좋은걸. 어젯밤은 꿈꾸듯 행복했다. 내가 오빠의 버팀나무라는 말은, 오늘 하루를 또 견딜힘을 내게 충전해 준다. 그렇다고 호떡이 뒤집히듯 삶이 확 바뀔 거라는, 장밋빛 내일을 바랄 나이는 지났는걸. 나는 이제 곧 중2거든. 이미 알고 있어. 인생은 결코 만만하지 않아. 


  예상대로야. 애들은 복도에서부터 나를 보며 수군거린다. 교실에 들어서자 술렁거리는 소리는 더 커진다. 오늘따라 웬일로 내 책상이 지나칠 정도로 깨끗하다? 그동안 애들이 공들여서 빽빽이 써 준, 모든 욕이 투명 인간처럼 사라졌다. 새삼스레 미안한 마음이 샘솟았을 리는 없고, 내가 뛰쳐나가서 자살이라도 했을까 봐 휘말리기 싫어서 지운 거야? 겁쟁이들! 그래 봤자 니들이 칼로 새긴 흔적은 뚜렷이 남았거든? 그럴 바엔 아예 새 책상을 갖다 놓지 그랬어! 
  문제는, 이제 필요 없을 거라며 두고 갔던 교과서까지 온데간데없다는 거다. 수학이랑 영어는 오늘도 수업이 있는데, 큰일이다. 다른 반에서 빌릴 수도 없는걸. 어제부터 전교 왕따로 찍힌 내게, 어떤 간 큰 애가 빌려주겠어? 할 수만 있다면 함께 숨쉬는 공기마저도 가져갈 애들인걸. 1교시인 국어는 집에서 교과서를 가져왔으니 괜찮지만, 수학이랑 영어는 어쩔 수 없이 다른 교과서를 펴놨다가 걸리면 책이 사라졌다고 말해야겠다. 수학 시간에 담임이 어쩌다 잃었냐며 다그치면, 이젠 예전처럼 쭈뼛거리거나 내 탓이라며 고개를 수그리는 꼴을 보여 애들에게 비웃음을 사진 않을 거야. 대신 교실에 있는 모두에게 다 들리도록 큰 소리로 물어봐야지. 쌤, 진짜 모르세요? 저 왕따라서 애들이 제 책을 다 버렸어요. 다시 사도 또 그럴 것 같은데, 어떻게 해야 책을 지킬 수 있을지 가르쳐 주세요!

  1교시가 시작할 즈음에야 살인 미수가 교실 앞문으로 다급하게 뛰어 들어온다. 뭐가 그리 신나는지 허물을 벗은 뱀 같다. 앓던 이 같은 내가 영영 사라진 기분에 아침까지 늦잠이라도 푹 잤나 봐? 기대가 산산이 부서지는 얼굴을 보니 은근히 통쾌한 걸! 살인 미수는 나와 눈이 마주치자 교실에 뿌려진 구정물이라도 본 것처럼 우뚝 멈추더니, 얼굴을 팍 구긴다. 어쭈, 아직도 학교에 붙어 있어? 정말로 끝장을 보자 이거지, 기린? 이런 느낌.
  다행히 그때 종이 울리며 하대세가 들어와서 수업이 시작된다. 일단은, 살았다! 하정우의 부담스러울 정도로 진한 쌍꺼풀을 닮아 별명이 ‘하대세’인 국어 선생은 자기만의 감각으로, 국어를 흥미롭게 가르쳐서 수업 분위기가 남다르다. 특히 첫 수업을 시작할 때 하대세가 한 말은 아직까지 기억날 만큼 인상적이었다. 
  “여러분, 문학에는 답이 없어.”
  그는 답이 정해진 시험 문제를 내는 선생답지 않게 말했다.
  “헤르만 헤세의 소설 중에 『화가』라는 단편이 있어. 그림을 그리지만 누구에게도 보여주지 않는 알베르트란 화가가, 주위의 등쌀에 못 이겨 친구에게 집 열쇠를 주고 여행을 떠나 버리지. 사람들이 그림을 볼 때 그 자리에 있고 싶지 않았던 거야. 그러거나 말거나 알베르트의 집에 몰려간 사람들은 그의 그림에 반해서 제멋대로 전시회를 열어 버려. 알베르트는 신문을 통해 이런 소식을 알게 되고 이상하다고 생각하지. 자기는 〈자화상〉이나 〈고요한 장미의 삶〉을 그린 적이 없는데, 신문에서 그런 그림에 대한 찬사가 쏟아졌던 거야. 전시회장으로 변한 자기집에 입장권을 끊고 들어가서 사람들이 그림에 붙인 제목을 보고 나서야 깨닫지. 사람들이 자신의 의도와는 완전히 다른 해석을 하면서 천재라고 우러러볼 수도 있다는 사실을 말이야. 그는 그대로 도시를 떠나 시골에 가서 계속 그림을 그리면서 즐겁게 살지만, 죽을 때까지 아무에게도 안 보여 줘. 웃기지? 여러분, 헤르만 헤세는 이 작품을 통해 무슨 말을 하고 싶었던 걸까?”
  갑작스런 질문에 모두들 멍한 표정으로 하대세를 쳐다볼 뿐이었다. 어떤 경우인지 몰라서이기도 했다. 정말로 우리의 머릿속 다양한 생각을 듣고 싶은 건지, 아니면 대부분의 선생처럼 이것도 모르냐고 우리를 구박하려고 답을 정해 놓고 묻는 건지, 어쩌면 자기가 하고 싶은 다른 말을 잇기 위해서 밑밥을 던지는 건지 헷갈렸는걸. 애들은 금붕어처럼 눈만 껌벅였다. 나 역시 도대체 어떤 얘기가 이어질지 궁금해서 하대세의 눈만 뚫어지게 바라봤던 기억이 난다.

  “또 어느 외국 작가는 우연히 지나치던 문학 세미나에서 자기 작품에 대한 유명한 평론가의 해설을 듣게 돼. 작가가 글을 쓴 의도는 이렇습니다, 이 표현의 숨은 의미는 이렇게 봐야 합니다. 평론가의 말에 사람들이 열심히 고개를 끄덕이는데, 작가가 보기에는 자기 글에 대한 헛소리만 늘어놓는 거야. 그래서 그는 어떻게 했냐? 그냥 조용히 가던 길을 갔어. 왜 그랬을까?”
  다들 입만 우물거릴 뿐, 여전히 나서는 사람은 없었다.
  “여러분, 글에 대한 평론가의 해석이나 화가의 친구들이 그림에서 본 것이 틀렸다고 말할 수 있을까? 알베르트나 외국 작가는 작품을 보는 사람들의 관점이 서로 다를 뿐이라고, 다르다는 건 누가 맞고 틀리고의 문제가 아니라고 생각해서 그냥 자신의 길을 간 거 아닐까? 물론 나의 이 해석도 헤르만 헤세나 외국 작가의 진짜 생각과는 다를 수 있어. 바로 그렇기 때문에, 우리도 앞으로 서로를 그렇게 대하면 좋겠다. 진실은 육면체나 팔면체 정도가 아니라 수백 면체니까, 나만의 시각에서 혹은 사회의 틀에 박힌 눈으로 글을, 사람을, 인생을 보지 말자는 게, 문학으로의 여행을 함께 떠날 여러분에게 부탁하고 싶은 말이야.”
  문학으로 여행을 떠나자, 부탁한다는 표현이 내 마음에 쏙 들었다, 여러분이란 말도. 나는 얼른 손을 들고 물었다. 그때의 나는 아직 왕따가 아니었으므로 가벼운 마음으로.
  “쌤, 그 어느 외국 작가는 누군데요?”
  “궁금하지? 나도 궁금해. 어느 인터넷 뉴스에선가 봤는데, 도무지 기억이 안 나.”
  그러더니 하대세는 진짜 하정우처럼 시원스레 웃었다.

  말만 그럴듯한, 번지르르한 사람은 많다. 사실 내가 아는 어른들은 대부분 다 그렇다. 근데 하대세는 좀 다른걸. 겉과 속이 다르지 않은 어른, 어른이라는 말이 어울리는 진짜 선생‘님’이다. 밥이나 몇 끼 더 먹고 잠이나 좀 더 잤으면서 박힌 주름살만큼 더 살았다고 세상을 다 아는 것처럼 굴지 않는다. 단지 자기보다 어리다고 거들먹거리면서 남을 무시하는 흔해 빠진 어른이 아니다. 완벽한 척 폼 따위 안 재고, 자기도 실수를 저지르는 인간이라고 솔직하게 인정하는, 닳아빠지지 않은 선생님이라 멋지다. 무엇보다도 나는, 수업 시간에 소설책을 보다가 걸려도 야단치지 않아서 하대세가 좋다!
  “국어 시간이니, 글을 읽는 거라면 괜찮아.”
  그가 나의 죄를 용서하는 이유다. 
  “여러분, 내 수업이 재미없나? 그럼 내 잘못이로소이다.”
  연극배우처럼 배에 힘을 주고 머리를 조아리며 익살스럽게 사과하는 하대세의 모습은 정말이지 존경스럽다. 그런다고 학생들 중 누구도 그를 우습게 보진 않는걸. 그래서 나는 오늘도 국어 교과서에 이사카 코타로의 소설을 끼워서 읽는다. 국어 시간이 더 길었으면, 하대세 같은 선생님이 더 많았으면 좋겠다.

  이어진 쉬는 시간, 이사카 씨의 『사막』을 책상에 펼친다. 어제까지 다 읽은 『피쉬 스토리』는 이사카 씨의 다른 작품, 『칠드런』과 『명랑한 갱이 지구를 돌린다』 사이에 소중히 꽂아 두었다. 이 책은 도시 위 하늘에서 흰 눈이 별처럼 떨어지는 파란 표지와 그 위에 적힌 글이 가슴에 훅 와닿아서 샀다. 


  사막에 눈이 내릴 수도 있다는 상상, 말투에 깃든 밝은 의지, 그러면서도 목에 힘을 안 주고 말할 줄 아는 담담함이 맘에 들거든. 설레는 마음으로 나의 『사막』을 읽으려는데, 갑자기 어디선가 눈송이 모양으로 뭉쳐진 하얀 종이가 날아든다. 교실이란 사막에, 눈이라도 오는 거야? 솜사탕처럼 폴폴 날리던 눈송이가 느닷없이 앞이 안 보일 정도의 눈발로 바뀌듯, 하나를 시작으로 동그랗게 구겨진 종이 폭탄들이 눈 깜짝할 사이에 온몸으로 날아든다. 이마에 맞고 『사막』 위로 떨어진 종이를 펴 보니, 이제야 알겠다. 꾹꾹 눌러쓴 내 글씨가 남아 있는걸. 사라진 내 교과서의 조각이다! 200% 확신에 차서 명예 살인을 하는 사람들처럼, 애들은 나를 매섭게 겨냥해서 던진다. 그래 봤자 종이 쪼가리일 뿐인데, 눈덩이처럼 시리고 아프다. 진짜 눈이라면 언젠가 멎기라도 하겠지만, 이 눈은 과연 그치기는 할지 모르겠다. 눈이 들입다 내리는 날처럼 주위가 온통 캄캄하기만 하다. 이사카 씨, 여기가 아무리 건조한 사막이라도 이런 눈은 싫어요! 
  두 눈을 꼭 감은 내 귓가에, 빗발치는 눈 사이로 두런거리는 목소리가 날아와 꽂힌다.
  “저 년, 이제 안 오는 줄 알고 속이 뻥 뚫렸는데, 다시 체할 것 같걸랑? 웩!”
  “유리의 이름까지 팔다니, 뻔뻔하기는 번데기보다 더해! 아우, 징글징글한 년!”
  “어찌나 잘나셨는지, 교과서 같은 건 내다 버리시지! 저건 소설만 있으면 돼!”

  내가 아무런 움직임이 없자 잠시 잦아드는가 싶던 종이 눈은, 꼬리를 펼치기 전의 공작새처럼 잠시 숨을 고르더니 그야말로 앞이 안 보일 정도로 퍼붓기 시작한다.
  “저년, 미친 할망구랑 달동네에 산다면서?”
  “오빠도 하나 있는데, 지질지질해서 똑같이 왕따래.”
  “풉, 왕따 유전자도 집안 내림인가 봐?”
  멈춰! 더러운 입들로 건드리지 마! 나를 욕하는 건 참아도, 우리 가족은 안 돼! 아빠, 엄마, 할아버지, 제발 도와주세요! 불현듯 어제 읽은 『피쉬 스토리』의 한 토막이 떠오른다. 


  이사카 씨, 이것도 용기일까요? 질끈 감았던 눈을 반짝 뜨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손을 들어 창밖을 가리키며, 나는 소리친다.
  “눈이다! 사막에 눈이 온다!”
  어이없게도 그 말에 교실 안의 눈보라가 순식간에 멈춘다. 너 나 할 것 없이 모두가 입을 헤벌리고 창밖을 쳐다보느라 정신이 없는걸. 그 모습이 너무 웃겨서 눈물이 다 날 지경이다. 나는 허리에 두 손을 얹고 그야말로 유쾌하게 말한다.
  “멍청하긴! 이 가을에, 눈이 올 리가 있어?”
  양치기 소녀라도 만난 것처럼, 애들이 도끼눈을 하고 다시 날 노려본다. 나는 스스로도 믿기 어려울 만큼 활짝 웃으며 태연하게 말을 잇는다. 
  “모르나 본데, 여기가 사막이거든. 인! 간! 미! 라고는 눈을 씻고 봐도 코딱지만큼도 구경할 수 없는 지독한 사막!”

  종잡을 수 없는 내 행동에 놀랐는지, 애들은 살짝 당황하는 눈치다.
  “쟤 돌았나 봐.”
  “우리가 너무 심했나?”
  갈피를 못 잡고 웅성거리기 시작하는 애들 속에서, 살인 미수가 발작이라도 난 것처럼 소리를 빽 지른다.
  “기린, 개… 개수작하지 마!”
  순간 따가운 감각이 얼굴을 할퀴고 지나간다. 살인 미수가 던진 종이 뭉치가 내 뺨을 스치고 교실 뒷문 앞, 때마침 들어오던 누군가의 발치에 날아가 떨어진다. 이 작은 교실에서 일어나는 무언가를 고발하듯이, 눈덩이는 말없이 웅크리고 있다. 아주 천천히, 모두가 숨을 죽이고 지켜보는 가운데, 유리가 종이를 들어올린다.
 
  어떡해, 유리다! 기린, 정신 똑바로 차려! 유리에게 깨갱 무너지는 순간, 넌 전교생의 밥이 되는 거야. 잊지 마. 차가움 따위에 지면 안 돼! 탭댄스, 공중그네, 탭댄스, 공중그네… 나는 눈물을 막는 주문을 외우며 혼자서 용기를 북돋아 본다. 유리는 손에 든 종이 뭉치와 내 자리에 쌓인 종이 더미를 보더니, 갸름한 얼굴을 절레절레 흔들며 내게로 다가온다. 어제 일로 한 대 후려치려는 거야? 생각할수록 화가 나서 못 참겠어? 어금니에 힘을 주며 지레 눈을 감지만 끼익, 의자를 빼는 소리가 났을 뿐이다. 살며시 눈꺼풀을 여니, 유리와 선아가 내 앞자리에 앉아 나를 빤히 올려다보고 있다.
  “기린, 뭐해?” 
  “너야말로, 뭐야?”
  덜덜 떨리는 손을 감추기 위해 팔짱을 끼면서 나는 센 척 말한다. 삐죽삐죽 가시가 돋은 내 말엔 아랑곳없이, 유리는 패션 잡지라도 보듯이 내 『사막』을 한 장씩 가뿐하게 넘긴다.
  “이 책 말이야, 재미있어?”
  “응. 응? 뭐?”
  학교 애들 중에, 이사카 씨의 책에 관심을 보인 건 유리가 처음이다. 아, 따듯함은 위험해! 사람을 무너지게 하거든… 부드러운 사람인 척 다가와서 얼음송곳으로 뒤통수를 찌를 거라면, 이젠 안 통할걸? 유리가 나를 가지고 노는 거라 생각한 애들이 키득거리는 소리가 여기저기서 들린다. 다 같이 짜고 엿 먹이는 거라면 난 하나도 재미없거든?
  “괜찮으면, 빌려서 읽으려고 그래.”
  투명 매니큐어가 칠해진 긴 손가락으로 내 『사막』을 톡, 톡 장난스럽게 건드리면서 유리는 말한다. 그러더니 자기 교복 주머니에 끼워둔 펜을 꺼내, 깨끗해진 내 책상에 뭔가를 오렌지색으로 또박또박 쓰기 시작한다. 

 

  이건 또 무슨 소리야. 초등학교 6학년? 영어 시간? 아! 혹시… 그때 우리는 영어 실력은 아는 단어량에 있다고 주장하는 김 쌤의 영어 수업을 함께 들었다. 매번 영단어 50개를 외워 가지 못하면 30cm 자로 손바닥을 5대씩 맞아야 하는 수업이었다. 김 쌤은 마음이 가는 대로 애들을 칠판 앞에 불러내선 단어를 적고 뜻을 물었다. 억울해서 제자리에서 방방 뛸 이유는, 나만 다 외운다고 되는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5명씩 1조를 만들어 주곤 누구 하나라도 못 외우면 같은 조 애들의 손을 모두 주물렀다. 공부는 같이 해야 하므로 공부를 못하는 친구를 도울 책임이 있다는 설명이었다. 하지만 자신의 생각을 그저 강요했기 때문에 우리에겐 울며 겨자 먹기로 따라야 하는 지겨운 명령일 뿐이었다. 김 쌤은 결국 학부모들의 항의로 다른 학교로 쫓겨 갔는걸. 이제 와서 생각해 보면, 나름대로 괜찮은 선생 같기도 하다. 공부 앞에서는 친구고 뭐고 모두가 적이니 밟고 일어서라고 가르치는, 독한 어른들보다는 훨씬 낫거든. 그래도 그때 우리는 도날드 덕처럼 입이 툭 튀어나와서 이러쿵저러쿵 말이 많았다. 자로 맞는 벌을 우리는 ‘마사지’라고 불렀는데, 한차례 당하고 나면 며칠이나 필기를 하기가 어려워서 애먹었는걸. 
  그러고 보면 나를 향한 애들의 근거 없는 미움처럼, 유리의 날라리 생활에 대한 소문은 어디까지가 진실일까? 그때의 유리는 모범생이 아니었지만, 날라리는 더더욱 아니었다. 지금 돌이켜보면, 유리는 이혼 직전의 부모님을 겪으며 힘겨운 시간을 보내던 중이었는지도 모르겠다. 몇 번인가, 유리 때문에 우리 조는 계속해서 집중 마사지를 받았고, 그러자 눈알이 팽팽 돌아가는 안경을 쓴 아이가 짜증을 내며 유리 앞에서 깐죽거렸다. 
  “돌대가리 하나 때문에 우리가 단체로 무슨 고생임? 재수없어!”
  다른 애들이 단어 공부를 하든 말든 신경도 안 쓴 주제에, 사람을 앞에 두고 그딴 소리를 하니 밉살스러워서 참을 수가 없었다. 
  “그만하시지? 같이 안 외운 우리도 잘못이거든?” 
  그런 비슷한 말을 내가 했던 것 같다. 맞아. 공부 좀 잘한다고 너무 심하게 군다는 생각에 발끈했거든. 유리야, 그걸 기억하고 있었던 거야? 그럼, 그래서 어제 내가 아니라고 한 거야? 날, 내 말을 믿은 거야? 가슴속으로 질문이 폭포수처럼 흘러내린다. 유리를 바라보자, 유리도 따듯하게 눈을 맞춰 온다. 감동이 물결치는 내 눈동자에서, 내가 이해했음을 알아차리기를… 나를 믿어 준 너의 진심을.
   
  유리는 입꼬리를 예쁘게 말고 웃으며, 이번에는 내게 믿음을 보여 달라고 한다. 자기가 내민 손을 용기 내서 마주잡으라며 나를 이끈다.
  “대답 한번 듣기 힘드네, 기린? 쉬는 시간, 다 끝나 가.”
  “대박이야! 이사카 씨 소설은 다 최고거든!”
  까짓거, 잡아 보자. 한 번 더 속는 셈 치지 뭐! 남들이 보기엔 바보 같더라도 나답게, 유리가 내게 보여 주는 모습을 믿어 보는 거야! 나는 이사카 씨의 엄마라도 되는 것처럼, 어마어마한 애정을 담아 나의 『사막』을 들어올린다.
  “이사카 씨? 작가 이름이야? 하여간 넌 달라.”
  이러면서 유리는 탄산수 속 공기가 튀어 오르듯 쿡쿡 웃는다. 아… 마찬가진걸. 유리도 내가 이상하다고 생각하는 거야. 유리의 장난기 어린 말투에, 정말로 이 아일 믿어도 되는 건지 어두운 의심이 모닥불처럼 피어오른다. 나는 주인에게 여러 번 버려진 강아지처럼 다시 풀이 죽고 불안해져서 조그맣게 묻는다.
  “내가 그렇게, 이상해?”
  “아니. 그냥 좀, 특별해.”  
  별나, 이상해, 짜증나가 아니라… 특별해? 오빠도 그렇게 말했는걸! 몸이 공중으로 두둥실 떠오르는 착각에 빠질 정도로 기분이 좋다. 2교시를 알리는 종소리가 내 사랑 진영 오빠의 목소리처럼 달콤하게 들릴 정도거든!
  “그럼, 너 다 읽고 나서, 부탁해도 될까?”
  유리는 눈을 찡긋하더니, 선아와 함께 서둘러 자기 반으로 달려간다. 내 주변에는 어떻게든 이 상황을 이해해 보려고 기를 쓰는 우리 반 애들만 남았다. 특히 정신에 나사가 100개쯤 풀린 것 같은 살인 미수와 현정의 모습은 두고두고 보고 싶을 정도다. 아님 말고.

  자박자박. 눈 내리는 사막을 걷는다. 유리로 인해, 내 사막을 가득 채운 모래알 같은 아이들 위로 촉촉한 눈송이가 하나둘 내려오는 기분이다. 아니, 사막에 눈이 내릴 수는 없는걸. 그건 불가능해. 유리는 전교에 소문난 날라리고, 앞으로 어떤 일이 나를 또 기다릴지는 아무도 모르는걸. 잊지 마, 인생은 만만치 않고, 꿈은 쉽게 깨어져. 알아, 잘 알고 있어. 나는 이제 곧 중2거든? 
  그렇지만 지금 나는, 기쁘다. 진심으로 기쁘다.








* 이사카 코타로의 『피쉬 스토리』 문장 인용을 허락해 주신 웅진지식하우스에 다시 한 번 감사드립니다.
* 이사카 코타로의 『사막』 문장 인용을 허락해 주신 현대문학에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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