둘째날












 11. 운 : 수상한 기립 박수


 




 


 

  레인보우 뮤직을 연다. 음악의 바다를 떠돌다 〈Standing Ovation〉에 멈춘다. 이 곡이 실린 굿 샬롯의 5집 앨범엔, 자그만 녹색 이파리와 열매를 달고 식물처럼 뿌리를 내린 자줏빛 심장이 그려져 있어 언제 봐도 마음에 든다. 근데… 뭐지? 좌심방에 틀어박힌 한쪽 눈알이 오늘따라 뭔가 할말이 있다는 눈빛으로 나를 쳐다본다. 이럴 줄 몰랐나, 친구? 도둑질을 하고도 아무 일 없을 줄 알았나? 가방을 훔칠 때 무시해 버린 내 안의 목소리다. 쳇, 이제 와서 돌려줄 수도 없잖아? 어제처럼 반쯤 눈감고 닥쳐! 나는 대꾸한다.
  후아, 오늘 내 기분이 딱 이 노래 같다. 기립 박수! 아침까지만 해도 세상은 내게 윙크를 날렸다. 거리에서 마주치는 모든 사람에게 박수라도 받는 기분이었어, 가방을 훔치길 잘했다고 무지하게 칭찬하는 것처럼. 그러던 세상이 낮부터 갑자기 마음을 바꾸더니, 사람을 조마조마하고 안절부절못하게 만드는 수상한 기립 박수를 치기 시작했다. 윽, 심장 마비가 이러다 오는 거지? 가슴이 옴짝달싹 못 하게 조여든다.

  아직도 어리벙벙하다. 끝내주는 오전을 보내고, 점심시간에 언제나처럼 민우와 버거를 먹으러 갔을 뿐이다. 이상하게도 부모님이 돌아가신 뒤로 나는 늘 배가 고팠다. 점심에 급식을 먹고 빵이나 컵라면을 더 먹어도 뱃속의 허전함은 사라지지 않았다. 그러다 매점 음식에 물리던 올 여름, 학교 앞 패스트푸드점이 ‘청소년 할인’을 시작했다. 이 지점은 매일 오전 11시부터 오후 2시까지 단돈 천 원에 ‘착한 버거’를 팔기 시작했고, 덕분에 난 길에서 떡볶이 1인분도 못 먹을 돈으로 배를 빵빵하게 채울 수 있었다. 가끔은 3교시가 끝나고 쉬는 시간에 훌쩍 뛰어가서 먹고 오기도 한다. 물론 그런 날은 주로 배가 아니라, 마음이 텅 비는 날이지만. 햄버거 따위를 아무리 많이 먹어도 채워질 리 없단 걸 알면서도, 나는 무작정 달려간다. 그나마 배가 두둑하게 부르면, 배까지 고플 때보다는 덜하잖아? 그게 외로움이든 뭐든. 아님 말고. 그런데 내 굶주린 몸과 영혼을 채우는 이 신성한 곳에, 주황색 남방을 입은 저승사자가 나타났다. 윽, 세상에 때아닌 종말이라도 온 것 같다.

  처음에는 여자애를 알아채지 못했다. 기분이 하늘을 찌른 탓에 아무런 생각 없이 가게로 들어갔을 뿐이다. 줄을 선 다음에는 민우와 얘기를 나누느라 바빴다. 진학 상담이야 내게는 아님 말고 할 얘기였고, 더스키돌핀 크루 형들이 뭉치자고 했다는 말도 내게는 그저 꿈같은 소리였다. 나는 하루빨리 고등학교 졸업장을 따서 돈을 벌 생각밖에 없다. 하지만 마지막에 민우가 던진 한마디, ‘나를 위해 하고 싶은 게 뭐냐’는 물음은 지금까지도 나를 머뭇거리게 만든다. 
  부모님이 돌아가신 뒤로, 내게 그런 질문을 한 사람은 없었다. 나조차도 그랬다. 할머니와 린을 위해 돈을 벌어야겠다고 생각은 하지만, 고등학교를 나온다고 어디로 가서 무슨 일을 어떻게 해야 할지는 막막하다. 골이 빠개지도록 머리를 굴려 봐도, 모르겠다. 춤에 싫증이 나면 언제든 돌아갈 곳이 있는 민우와 나는 다르다. 민우는 종로에서 영어 학원을 크게 하는 능력자 아버지가 있잖아? 나는 한때의 호기심으로 여기저기에 기웃거리는 팔자 좋은 중학생이나, 전공과 대학까지 부모가 정해 주는 길로 아장아장 걸어가기만 하면 되는 철없는 놈들과 달라야 한다. 그래서 더 강하게 선을 그었는지도 모르지. 난 너와 달리 먹고 살기에도 헉헉댄다고 말하고 싶었지만, 막상 어떻게 가족을 지켜야 할지 모르는 애송이라는 사실은 들키기 싫었다.
  지금도 민우가 던진 말이 귓구멍에서 와글거리며 떠들어 대는 탓에 머리로 가져와 답을 찾지 못하고 있다. 그저 나는, 지겨울 정도로 현실적인 하루하루를 살아갈 뿐이다. 술을 병나발로 마시면서 스스로를 망가뜨리거나, 일진회에 들어가 남을 짓밟으면서 세상에 대한 분풀이를 하지도 않는다. 나에겐 삶을 있는 그대로, 날아오는 야구공처럼 똑바로 받아치는 수밖에는 다른 방법이 없다. 때로는 가스비와 전기세처럼, 계절마다 달라지는 변화구까지 막느라 정신이 다 나갈 지경이야. 하지만… 민우가 던진 담백한 물음표는 내 머리를 후려치며 그동안 애써 외면하던 질문을 남긴다. 기운, 앞으로 어떻게 살 거야? 다가올 날을 위해 뭔가를 준비하긴 해? 〈니가 진짜로 원하는 게 뭐야〉? 어느 틈에 신해철이 다가와 내 귀에 대고 진지하게 답을 캐묻는 기분이다. 

  부모님이 돌아가신 1년 전부터, 나는 가족에 대한 말을 되도록 아꼈다. 실어증이란 의심을 받을 정도로 말수를 줄이면서, 남들에게도 곤란할 질문은 안 했다. 나처럼 말하기 싫을 수도 있잖아? 입 밖에 내지 않으면, 인정하지 않으면, 부모님의 죽음이 없던 일이 되기를 기대했는지도 모르지, 후아. 
  뜻밖에도, 세상과 거리를 두면 편리한 점이 많다. 무엇보다, 시끄럽게 떠들면서 남의 일에 간섭하기 좋아하는 놈들과 자연스레 멀어진다. 같이 멍청한 사고나 치고 다닐 놈을 찾으면서 괜히 불행의 주변을 얼쩡거리는, 쓸모없는 녀석들과의 마찰도 피할 수 있어서 더할 나위 없이 자유롭기도 하다. 그런데 어이없게도, 바로 그래서 내게 속마음을 털어놓은 녀석이 있다. 김동진이라고, 심심하면 우리 반의 원일을 패고 버거 20개씩 빵 셔틀을 시키는 거친 놈이다. 아버지가 잘나가는 건물 부자로 강남에만 큰 빌딩이 8개고 이화동에서 알아주는 으리으리한 저택에서 도베르만을 4마리나 키우며 사는 놈이다. 정치판과 재계에 두루 영향력이 있는 아버지를 믿고 한정판 명품 시계를 찬 고귀한 손으로 그때그때 거슬리는 애들의 뺨따귀를 때리는데, 민우는 그럴 때마다 징그럽게 웃는 놈의 입가가 제일 소름 끼친다고 말했다. 글쎄, 난 제대로 본 적이 없어서. 동진이 담뱃불로 지져서 원일의 허벅지에 구멍이 뚫리든 그게 뭐, 나랑은 상관없잖아? 그런 괴상한 놈과는 그저 안 부딪치면 그만이다.
  나와 마음이 통했을 리는 없지만, 내가 학원 원장인 아버지에 더스키돌핀 크루란 든든한 배경이 있는 민우와 어울려서인지 놈도 좀처럼 나를 건드리지는 않았다. 그런데 하루는 이 녀석이 내게 받을 빚이라도 있는 양아치처럼 건들거리며 다가왔다. 그날따라 민우는 오후 수업을 빼먹고 마로니에 공원으로 비보잉을 가서 나 혼자였다. 나는 자리에 앉아 매치박스 트웬티의 〈Push〉에 빠져 있었다. 사랑하는 사람을 내 마음대로 하고 싶다는 가사가 야하다며 무지하게 욕먹은 곡이다. 문화적 차이인지 내 영어 실력이 달리는 건지, 달팽이관이 닳도록 아무리 들어 봐도 평범한 내 귀에 와닿는 건, 사랑해 달라며 무지하게 매달리는 남자의 마음 정도다.
  “얌마, 좋은 건 같이 좀 듣고 살자!”
  이러면서 동진은 말이 끝나기도 전에 내 귀에서 이어폰을 뽑아 자기 귀에 대충 갖다 걸었다. 원래 제멋대로인 놈이니 뭐, 아님 말고. 나는 말없이 시선을 돌려 가을바람이 부는 빈 운동장을 바라봤다. 성냥갑의 노래가 마음에 안 든 건지, 내 침묵에 질렸는지 몰라도 녀석은 머쓱한 표정으로 이어폰을 내던지더니 올 때처럼 휙 가 버렸다.

  며칠 뒤였나? 저녁에 학교 옥상에서 뮤즈의 〈Starlight〉를 들으며 가로등 불빛에 가려진 진짜 별빛을 찾고 있는데, 어디선가 불쑥 동진이 나타났다. 녀석은 허락도 없이 또 이어폰을 한 짝 빌리더니 다시금 말이 없었다. 하긴 무슨 말을 했더라도 도미닉 하워드가 내려치는, 두개골을 흔드는 드럼 소리와 가슴을 비집고 들어오는 매튜 벨라미의 비음 섞인 목소리에 묻혀 잘 안 들렸겠지만. 놈은 무슨 말을 할 듯 말 듯 한참 동안 입만 달싹거리더니, 어딘가 화난 사람처럼 갑자기 말을 퍼부었다. 
  “실은 말야. 우리 꼰대, 국세청에서 명성이 자자한 고액 체납자다? 건물은 위장 이혼한 엄마랑 친척들의 이름으로, 돈은 죄다 현금으로 쌓아 놓고 살아. 자기는 돈을 많이 버는 것만으로도 대한민국을 돕고 있다며 세금 따윈 땡전 한 푼 안 내도 된다느니, 나더러 자기처럼 살아야 한다면서 매일 밤 똥폼을 잡고 설교를 하셔. 그러면서 자기가 돈을 써야 세계 경제가 산다며 사치를 뿌려 대는 생활을 하신다, 킥킥. 씨팔, 꼰대들 존나 웃기지 않냐?”
  한쪽 귀로는 사랑을 외치는 뮤즈에게 사로잡혀 정신을 못 차리면서도 신기하게, 나는 동진의 말을 한 문장, 단어, 음절까지 몽땅 알아들었다. 심지어 욕 속에 숨긴, 녀석의 밑도 끝도 없는 답답함까지도 이해했다. 왜 이런 말을 나한테 하느냐고 묻고 싶었지만 이미 들어 버린 마당에 그런 질문은 별로 의미가 없어 보이기도 하고, 묻는다고 대답할 놈도 아닌 것 같아서 관뒀다. 다만 그 순간 문득, 알았다. 겉으로 드러내는 모습이 어떻든지 간에, 사람은 누구나 자신만의 슬픔을 안고 살아감을. 아님 말고. 귀찮은 말들을 모조리 삼키고 나는 그저 나답게 받아넘겼을 뿐이다.
  “개떡같은 세상이야. 아님 말고.”
  “킥킥, 아님 말고? 근데 더럽게 웃긴 건 그런 꼰대들이 우리더러 어린놈이 싹수가 없다는 둥, 요즘 것들은 다 틀려먹었다는 둥 함부로 나불댄다는 거야. 내 주위엔 내가 배우고 싶은 어른은 하나도 없는데 말이야. 닮고 싶은 어른이나 먼저 생기라고, 씨팔!”
  “그런 어른 나부랭이, 없음 말고.”
  “킥킥, 새끼. 은근히 마음에 든단 말이야, 아님 말고.”
  내 말투를 따라하며 일어서는 놈은 밀린 돈을 받은 건달처럼 가뿐해 보였다. 그 뒤로 다시 우리가 말을 섞은 적은 없다. 놈의 골목대장 노릇은 여전했지만, 내게는 예전처럼 역겹게 들리진 않았다. 
  아무튼 이런 별난 놈을 제외하고는, 요즘 내가 말이라도 나누는 친구는 민우뿐이다. 친구라고 부를 만한 유일한 녀석인데도 어쩔 수 없는 마음의 거리가 있어서, 때로 나는 고독하다. 세상 앞에서 어쩔 줄 모르고 헤매는 내 모습을 내보이며, 여자애의 가방을 훔쳤다고 민우에게 털어놓을 수는 없다. 나는 가끔 나 자신에 대해서도 잘 모르고 산다. 이런 마당에 친구라 하더라도 다른 사람이 어떻게 나올지 안다고 자신 있게 손들 놈은 아무도 없잖아?

  후아, 그나저나 운이 좋았다. 가방 주인을 발견한 건 옷 덕분이다. 그 애는 어제 입었던 밝은 주황색 체크무늬 남방을 입고 있었다. 그깟 가방 하나 잃었다고 집에도 안 들어간 건지, 쳇! 군데군데 주름이 잡힌 남방 때문에 여자애는 어제와는 다르게, 구겨서 버린 햄버거 포장지처럼 후줄근해 보였다. 교복 입은 놈들로 가득한 곳에서, 들어갈 때 못 본 게 더 신기하다. 다 틀렸어, 학교 앞에서 개망신을 당하겠지! 경찰서로 끌려가는 나와 울먹이는 린, 세상모르고 하루 종일 맨드라미만 보고 앉았을 할머니가 떠올라 눈앞이 캄캄했다. 장발장은 빵을 훔쳤다가 감옥에서 20년 가까이 썩었다. 여행 가방을 통째로 훔친, 힘없고 돈도 없고 부모님도 없는 싸구려 흙수저인 내게 그보다 더한 일이 벌어지지 말라는 법은 없잖아? 벌써 수갑이라도 채워진 것처럼 손이 자꾸만 아래로 무겁게 떨어졌다. 근데, 도대체 무슨 속셈이지? 그 애는 마치 나를 피하려는 사람처럼 어제 지하철에서 읽던 작은 책을 거꾸로 들고 자기 얼굴을 가리려고 용쓰고 있었다. 바로 달려들어 가방을 내놓으라고 소리치지 않으니 더 이상하잖아! 그럴 거면 왜 찾아온 거지?
  얼굴을 숨기는 걸 보면 나를 알아본 건 분명했다. 그 사실을 깨닫자 순간적으로 나도 모르게 발길이 우뚝 멈췄지만, 모른 척하고 다시 걸어나갔다. 도둑놈이라고 당장 몰아세울 생각은 아닌 것 같으니, 일단 그 자리를 벗어나야 했다. 나는 어깨가 아픈 사람처럼 손으로 주무르면서 자연스레 명찰을 가렸다. 이미 봤으면 어쩔 수 없어! 아님 다행이고. 가게를 나와 횡단보도를 건너면서 발걸음에 조금씩 속도가 붙어서, 어느새 나는 우사인 볼트도 제칠 것처럼 달리고 있었다. 사연을 알 리 없는 민우가 긴 다리로 껑충껑충 쫓아오며 더스키돌핀 크루와 함께할 생각이 없는지 끈질기게 물었지만, 나는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이대로 끝장날 순 없어. 여기서 벗어날 방법, 기똥찬 방법을 찾아야 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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