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시다 쇼인(吉田松陰). 그는 30세에 참형을 당한다. 죽기 전에 〈유혼록(留魂錄)〉을 남겨 일본 국가주의의 야마토 다마시(大和魂)가 된다. 그는 형장의 이슬로 사라지기 전에 다음과 같은 말을 남겼다고 한다.“내 몸은 비록 무사시의 들녘에서 썩더라도, 영원히 남겨지는 야마토 타마시!” (참조, 김세진, 2018, , 86쪽; 타마시는 원래 다마시로 써야 하지만 여기서는 원문 그대로 표기했다.)야마토 다마시는 '일본의 혼’ 혹은 국가 정신을 뜻한다. 태평양 전쟁에서 수많은 일본 군인이 야마토 다마시를 외
한 나라를 이해하려면 지리와 인물을 알아야 한다는 말이 있다. 지리와 인물 속에 그 사회의 문화와 정치경제의 유산이 남아있기 때문이다. 일본 군국주의의 역사적 흔적을 고스란히 담고 있는 야마구치현도 그런 곳 가운데 하나이다.필자는 고려대 언론대학원 최고위 43기 과정생과 2015년 6월 19일부터 사흘간의 일정으로 후쿠오카(福岡)와 시모노세키(下關) 그리고 하기시(萩市)를 찾았다. 시모노세키를 가기 위해서는 예전이나 지금이나 대한해협을 건너야 한다. 일본의 강점기에는 관부 연락선을 타고 대한해협의 일본 측 수로인 쓰시마 해협을 건너
“미래의 저널리스트는 여러 가지 기술을 잘 알아야 합니다. 모바일 저널리즘, 팟캐스트, 멀티미디어를 잘 알아야 하고 이들 기술은 하나로 융합할 것입니다. 많은 정보가 쏟아지는 시대에 기자는 공익을 위해 진정으로 중요한 정보가 무엇인지 가려주는 역할을 하게 될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진실을 다루는 사람으로서 독립성, 공정성, 신뢰성, 공익성 같은 저널리즘의 기본원칙은 여전히 중요하지요.”미디어 교육 전문가 엘리라 창가가 말하는 미래 저널리스트를 위한 제언이다. 그는 신문기자 출신이다. 유럽안보협력기구(OSCE)에서 공영언론 현대화와 저
워싱턴DC에 있는 하워드대는 흑인들의 하버드라는 별명이 붙을 정도로 미국에서 흑인 지도자 양성에 앞장선 대표적인 흑인대학(HBCU)이다. 대표적인 동문이 카멀라 해리스 부통령이다. 하워드대 구내 서점에 가면 입구에서 해리스 부통령의 자서전을 확인할 수 있다.학교 인근 지역에서는 하워드대 티셔츠와 가방을 착용한 학생의 자부심을 어렵지 않게 느낄 수 있다. 마찬가지로 ‘흑인 생명은 소중하다’ 운동 등 사회 정의 문제에서 하워드대는 목소리를 높이고 앞장섰다.미디어‧저널리즘‧영화 전공은 캐시 휴즈 커뮤니케이션대학에 개
웨스트버지니아대는 미국 동부 웨스트버지니아주의 모건타운라는 도시에 있다. 인구 3만의 소도시다. 하지만 웨스트버지니아대 미디어대학은 미국 저널리즘 현업자 사이에서 꽤 회자된다. 지역신문 발행인을 육성하기 위한 ‘미디어 솔루션‧혁신’ 전공 석사과정을 운영하기 때문이다. 코로나 19 초기인 2020년 초 코스를 개설해 더 관심을 모았다.12개월 동안 수업을 듣고 개별 프로젝트를 진행한 뒤 지역신문을 창업하거나 기존 지역신문을 인수하는 것이 이 과정의 목표다. 지역신문 발행인 육성 그 자체를 위한 석사과정을 개설하고 운영하는
뉴욕시립대(CUNY)에서 저널리즘 연구와 교육을 담당하는 크레이그 뉴머크 저널리즘스쿨은 전 세계 기자와 디지털 저널리즘 실무자 사이에서 ‘100일 특훈’으로 유명하다. 교육은 ‘기업가정신 저널리즘 크리에이터’ 프로그램이라는 이름으로 진행된다.미국을 비롯해 캐나다 독일 싱가포르 등 세계 각국의 교육생이 온라인으로 실시간 접속해 수업과 토론을 하는 방식이다. 또한 현직 기자는 자기 회사에서 진행하는 실제 프로젝트를 바탕으로 교수진 및 다른 학생과 토론하고 의견을 교환하면서 프로젝트 완성도를 높여간다.수업 내용을 한마디로 요약하자면 ‘니
애리조나주립대는 미국에서 유일하게 국무부가 주관하는 중견 전문가 교환 방문 프로그램(험프리 프로그램)의 저널리즘 분야를 운영하는 학교다. 험프리 프로그램은 1978년 휴버트 험프리 전 부통령의 뜻을 기려 생겨났다. 풀브라이트 프로그램의 일환으로 매년 100명이 넘는 공무원, 시민단체인, 변호사, 언론인, 교육자를 대상으로 10개월 동안 연수를 진행한다. 올해는 90여 개국에서 펠로우 161명이 미국을 찾았다.저널리즘 분야에서는 지난 10여 년 동안 해마다 기자 10여 명이 애리조나주립대 크롱카이트스쿨을 찾아 개별 프로젝트를 진행하고
애리조나주립대의 월터크롱카이트 저널리즘앤드매스커뮤니케이션스쿨(크롱카이트스쿨)은 미국 서부 애리조나의 주도 피닉스에 있다. 미국의 전설적인 앵커인 월터 크롱카이트의 이름을 붙였다.당초 본교가 있는 도시 템피에 있었는데, 10여 년 전 학교 측이 피닉스 다운타운 캠퍼스를 개발하면서 이동의 선봉에 섰다. 덕분에 다소 슬럼 같았던 피닉스 도심은 활기찬 대학가로 탈바꿈했고, 다운타운 중심가에는 크롱카이트스쿨을 비롯해 애리조나주립대의 건물 10여 동이 포진해 있다.크롱카이트스쿨의 교육은 ‘병원식 교육’이라는 말로 대변된다. 의사를 육성하면서
뉴욕의 컬럼비아 저널리즘스쿨은 1912년 설립됐다. 세계 최고의 권위를 자랑하는 기자상인 퓰리처상을 심사해 시상하는 곳이기도 하다. 명실상부한 세계 최고 저널리즘스쿨 중 한 곳으로 꼽힌다. 건물명은 퓰리처홀이다. 학생이 입는 티셔츠에는 ‘퓰리처가 만든 집’이라는 문구가 새겨지기도 한다.이곳은 매년 여름, 미국 등 주요 국가의 언론인 사이에서 다른 이유로 관심을 받는다. 미국 및 해외 주요 언론사의 간부급 기자가 모여 수업을 듣는 ‘설즈버거 이그제큐티브 프로그램’이 시작하기 때문이다. 아서 옥스 설즈버거 전
미주리는 미국 중부에 있다. 한인은 대도시인 세인트루이스나 캔자스시티에 많지만 한국 언론인 사이에서는 컬럼비아가 친숙한 도시로 꼽힌다. 미국 대표 저널리즘스쿨로 꼽히는 미주리대 저널리즘스쿨이 있기 때문이다.미주리대는 저널리즘스쿨의 시조새 격으로 꼽힌다. 1908년 설립돼 세계 최초 저널리즘스쿨 중 하나로 꼽히는 이곳에서는 그동안 내로라하는 언론인이 배출됐다.필자는 미주리대를 견학하고 교수와 면담하기로 했었다. 하지만 인연이 닿지 않았다. 우버를 타고 60㎞를 달려간 캔자스시티 버스 정류장에서 하필 그날 컬럼비아행 버스가 취소됐다.
저널리즘 실무자로서 캔자스대 윌리얼 앨런 화이트 저널리즘스쿨을 살펴보면서 학생의 진로가 궁금했다. 윤세영저널리즘스쿨(YJS)의 많은 학생이 주요 매체에 기자나 프로듀서로 취업을 하고 있지만 언젠가는 새로운 분야에서 자신의 영역을 개척할 수도 있다.미국에서도 저널리즘스쿨 졸업생이 언론 외 분야에도 많이 진출한다. 윌리엄 앨런 화이트 저널리즘스쿨이 졸업생 진로에 대해서 밝혀놓은 수치만 보더라도 이런 경향이 두드러진다.우선 졸업생이 진출한 주요 기업의 이름을 살펴보자. 뉴욕타임스, ESPN, CBS스포츠, 월스트리트저널 등 언론사가 눈에
일선 기자로서 늘 궁금했던 점이 있었다. 세계에서 가장 저널리즘 교육이 발달했다고 하는 미국의 저널리즘스쿨은 어떻게 인재를 육성할까.어떤 기자는 직접 유학을 떠나 학위를 취득한다. 필자는 그럴 상황은 되지 못했고 기회가 닿아 일부 저널리즘스쿨을 취재반 곁눈질반 하면서 지켜보기로 했다. 첫 번째로 최근 다녀온 미국 캔자스대의 윌리엄 앨런 화이트 저널리즘스쿨에 대해 이야기를 풀어본다.캔자스대는 1865년 설립돼 156주년을 맞이한 미 중부 지역의 주립대다. 캔자스의 유력 학교로서 많은 인재가 졸업한 뒤 지역에서 활약한다.실제로 캔자스주
말 많고 말썽 많던 2020 하계 올림픽이 남자 마라톤 대회를 끝으로 최근 막을 내렸다. 케냐 남녀 선수가 메달을 휩쓸었던 이번 마라톤 대회의 실상을 들여다보면 코로나 19로 1년 연기된 이번 올림픽의 설왕설래를 엿볼 수 있다.도쿄의 8월 초 날씨는 고온다습으로 마라톤 경주에 적당치 않다. 도쿄의 오다이바 해변공원 마라톤 코스에 지열을 차단하는 도로 코팅 공사를 하다가 2019년에 여러 인부가 사망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도쿄 올림픽 위원회는 IOC 강권을 받아들여 500마일 북쪽의 삿포로시(札幌市) 오도리 공원(大通公園)에서 출발하
제32회 도쿄 하계올림픽에서 성화 봉송의 마지막 주자는 오사카 나오미(大坂 なおみ)였다. 미국에서 테니스 선수로 활동하는 나오미가 일본을 대표해야 하느냐에는 이견이 있었다. 나오미가 일본인 여성과 아이티계 미국인 사이에서 태어났기 때문이다.스포츠를 통해 인류가 서로 다른 모습의 다양성을 존중하며 ‘이제 우리 함께’ 힘을 합쳐 세기적인 코로나 정국을 극복하자는 주최 측의 의도가 엿보인다. 이번 올림픽의 모토(motto)가 ‘더 빨리, 더 높이, 더 힘차게 - 함께(Faster, Higher, Stronger – Together)’이다
망부석(望夫石). 최근 미스트롯 선의 홍지윤이 갈라쇼에서 불렀다. 국악 연주와 함께 ‘간밤에 울던 제비’로 시작해 ‘내 꿈마저 떠가라 두리둥실 떠가라 오매불망 내 님에게로’까지 춤이 곁든다. 제법 흥겹지만 슬픈 설화가 깔려있다.신라의 충신 박제상의 부인이 울산 치술령에서 동해를 바라보며 일본에 간 남편을 기다리다가 바위가 됐다는 설화다. 삼국사기에 따르면 박제상은 왜국에 볼모로 간 눌지왕의 아우인 미사흔을 탈출시키고 잡혔다.처음에 신라를 배반하고 도망왔다고 속였기에 왜국의 신하가 되라는 회유를 받았다. 이를 거부하며 충절을 지키다
나가사키는 일본 개화의 상징이다. 16세기부터 이곳을 통해 포르투갈과 스페인 상인이 들락거렸다. 규슈 남쪽 끝 가고시마에 가톨릭이 1549년에 전래되고 규슈 전 지역으로 확산했다. 곧이어 나가사키가 서구문물을 받아들이는 중심지로 떠올랐다.17세기 들어 에도막부의 쇄국 통치에도 나가사키 항구만은 문을 열어 놓았다. 대항해시대의 후반부에는 네덜란드와 영국 상인이 나가사키 데지마 부두(長崎出島ワーワ·Dejima Wharf)로 몰려들었다. 명실공히 일본 무역의 창구였다.18세기에는 유럽산 자기를 포함해 산업혁명 이후의 유럽 문명이 데지마를
일본에선 임진왜란을 ‘도자기 전쟁’으로 여긴다고 전편에 소개했다. 그렇다면 조선 도공은 어떻게 외부인 차별을 극복하며 일본에서 사회적 적응과 문화 변용을 이루었을까.조선 도공의 기술은 일본에 넘어가 활짝 폈다. 이때의 도자기는 17~18세기 동서양 문화 교류의 주요 상품이었다. 도자기 판매를 통한 자본축적과 국제 교류로 일본은 서양의 개화사상을 일찍 받아들였다. 이웃 나라보다 근대화에 앞선 동기이다. 그 과정을 살펴보자. 개야 짖지 마라. 밤 사람이 모두 도둑인가? 주목지 호고려님이 계신 곳에 다녀오련다.
“일본열도가 성립되자 배에 의한 왕래가 시작되고 조선반도나 중국대륙의 사람들은 새로운 기술과 지식을 전했다. 그 가운데서도 야요이(弥生)시대의 시작이 된 벼농사의 전래는 그 후 일본 문화의 기반이 되었다.”임진왜란 진원지인 히젠(肥前) 나고야성의 박물관에 있는 글귀다. 이곳은 일본열도와 한반도 교류의 상설 전시관이다. 상호이해와 선린우호(善隣友好)로 미래를 함께 개척하자는 선의로 1993년 10월에 전시가 시작됐다. 사가현의 특별사적인 ‘나고야성터 및 진영터’가 발굴되면서 박물관이 설립됐다.
‘태합이 노려본 바다의 안개로구나 (太閤が 睨みし海の 霞かな)’서애 류성룡 연구팀이 팬데믹 직전인 2019년 11월에 사가현의 나고야(名護屋) 성터를 방문했을 때 발견한 비석의 단가이다. 여기서 태합이란 일본말로 타이코이며 도요토미 히데요시(豐臣秀吉)를 칭한다. 도요토미가 노려본 나고야성 앞바다는 한반도와 어떤 역사적 관계가 있을까? 바로 이곳 나고야성은 도요토미가 조선을 침략하기 위해 1592년 1월 5일 병력 동원령을 내린 장소다. 우리 한국인에게는 쓰라린 역사의 현장이다. 나
일본을 제대로 소개할 수 있을까. 일본 여행기를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할까. 스페인 여행기를 탈고하면서 지난 한 달간 자문했던 고민이다. 일본인의 태도와 행동, 사고방식이 우리와 너무 다르다고 여겨졌기 때문이다.사회과학자로 인간의 태도와 행동, 희로애락의 표현은 근본적으로 같다고 가정해 왔다. 그렇게 학습했고 또 가르쳤다. 그런데 직접 만난 일본인의 모습은 너무 달랐다. 우리와 다르게 행동하는 듯 보였다. 이외에도 수많은 관광객이 일본을 다녀갔기에 여행 칼럼 쓰기가 까다롭게 느껴졌다.처음 가본 여행지를 소개하기란 쉽다. 본 대로 자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