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가사키는 일본 개화의 상징이다. 16세기부터 이곳을 통해 포르투갈과 스페인 상인이 들락거렸다. 규슈 남쪽 끝 가고시마에 가톨릭이 1549년에 전래되고 규슈 전 지역으로 확산했다. 곧이어 나가사키가 서구문물을 받아들이는 중심지로 떠올랐다.

17세기 들어 에도막부의 쇄국 통치에도 나가사키 항구만은 문을 열어 놓았다. 대항해시대의 후반부에는 네덜란드와 영국 상인이 나가사키 데지마 부두(長崎出島ワーワ·Dejima Wharf)로 몰려들었다. 명실공히 일본 무역의 창구였다.

18세기에는 유럽산 자기를 포함해 산업혁명 이후의 유럽 문명이 데지마를 통해 일본 각지로 퍼져나갔다. 하지만 태평양 전쟁 종료를 앞두고 원폭으로 도시가 피폐화됐다. 미군의 공군기지였던 후쿠오카 공항에 1951년부터 민간기가 이착륙하면서 나가사키는 규슈의 거점도시로서 지위마저 상실했다.

▲ 나가사키 거리 표지판과 데지마

데지마에서 3.5㎞ 북쪽에 지구 역사상 두 번째 원자폭탄이 떨어졌다. 첫 번째 원폭을 당한 히로시마에 세계의 관심이 집중되면서 나가사키는 일반인의 기억에서 사라졌다. 나가사키 원폭투하 뉴스는 같은 날 소련의 참전으로 그 비중이 반감됐다. 뉴욕타임스 아카이브를 검색해도 당시 나가사키 기사는 1단만이 나타날 뿐이다.

서애 류성룡 연구팀의 일원으로 나가사키의 외국인 체류지인 데지마 워프를 둘러봤다. 항구 언덕의 오우라 성당(大浦天主堂)에도 올랐다. 세계 유산으로 지정된 천주당은 강화 성당의 모습을 연상케 한다.

그곳에서 우라가미(浦上) 신강변도로를 따라 내륙으로 5㎞ 남짓 올라가니 원폭 진원지가 나타났다. 이곳에 평화공원과 추모 박물관이 세워졌다. 박물관 이름은 나가사키 원폭 자료관(長崎原爆資料館)이다. 지상 1층에 지하 2층 건물이다. 이곳에 노란색의 원자폭탄 모형과 폐허가 된 시가지 사진이 전시됐다.

여러 전시품 중에서 맨발의 소년이 유아를 등에 업은 사진이 눈에 확 들어왔다. 아기는 고개를 젖힌 채 깊은 잠에 빠진 듯이 보였다. 사진 설명을 자세히 읽어보니, 이 아이는 죽어있었다.

소년은 10살이고 어린 동생은 1살이다. 인부가 소년에게 아기를 받아서 화장터 장작 불길에 넣었다. 아이의 시신이 불길에 싸였을 때 소년은 입술을 꽉 깨물었다. 피가 났다고 한다. 그는 곧 화장터를 떠났다.

조 오도넬이란 미군 기자가 이 순간을 ‘맨발로 서 있는 소년’이란 사진으로 남겼다. 다카하타 이사오 감독의 ‘반딧불의 묘(火垂るの墓·Graves of the Fireflies)’라는 애니메이션의 소재가 됐다고 한다. (https://www.youtube.com/watch?v=qs88XQ7bxCU) 

▲ 맨발로 화장터에 선 소년
▲ '반딧불의 묘'

히로시마에 떨어진 원자폭탄 이름은 리틀 보이(Little Boy)다. 우라늄으로 제조했다. 나가사키에는 ‘뚱뚱보’란 이름의 폭탄(팻 맨·Pat Man)이 떨어졌다. 1만 파운드의 플루토늄으로 만들었다. 파괴력으로 따진다면 팻 맨이 리틀 보이보다 40% 이상이다. TNT 2만 1000t의 폭발력이다.

1㎞ 반경의 사람과 동물이 즉사했다고 한다. 시가지의 44%가 파괴됐다. 불바다였다. 대다수가 목조건물이어서 잿더미만 남았다. 그해 말까지 7만 3884명이 사망했고 7만 4909명의 부상자가 발생했다. 나가사키 시민은 당시 24만 명이었다. 전체 인구의 61%가 사상자였다. 당일 사망자만도 3만 5000명으로 추정된다.

▲ 팻 맨과 리틀 보이 비교(사망자는 원폭 당일 추산)
▲ 원자폭탄 ‘팻 맨’

도쿄 시간으로 1945년 8월 9일, 새벽 2시 47분. 복스카란 이름의 B-29 슈퍼포트리스가 사이판에서 24㎞ 남쪽인 티니안섬에서 이륙했다. 조종사는 찰스 스위니 소령이다.

목표지점은 2570㎞ 떨어진 규슈의 최북단 도시, 고쿠라다. 현재는 시 이름이 기타규슈(北九州)로 바뀌었다. 이곳에 대규모 군수산업이 소재했다. 일본군이 사용한 총알부터 화학무기까지 각종 무기와 보급품의 생산기지였다.

아침 10시 30분에 요시오 겐지가 고쿠라 상공의 B-29 꼬리에서 반짝이는 불빛을 봤다고 한다. 그는 14세로 하늘에서 새로운 폭탄이 투하되는지를 살펴보란 임무를 부여받았다.

복스카는 폭탄 투하 창구를 열어 놓은 채 목표지점을 세 번이나 배회했다. 짙은 구름이 덮였기 때문이다. 팻 맨은 이곳에 투하되지 않았다. (참조: 뉴욕타임스, Kokura, Japan: Bypassed by A-Bomb, 1995년 8월 7일)

미군의 신예기인 B-29는 1944년 말부터 일본 본토 67개 주요 도시의 1만㎞ 상공에서 재래식 폭탄을 융단으로 투하했다. 그 유명한 공습이다. 일본 공군기는 그 높이까지 날 수 없어 무방비였다. 그런데 미군은 원자폭탄 투하 예상지에는 공습을 자제했다. 고쿠라의 피해가 적었던 이유다.

복스카는 남서쪽으로 200㎞ 떨어진 제2의 목표지점으로 향했다. 연료 소진으로 더이상 고쿠라 상공에 머물 수 없었다. 결국 나가사키에 투하하기로 했다. 그곳에도 두껍게 구름이 덮였다. 눈으로 확인하고 원자폭탄을 투하하라는 명령이 있었다.

이번엔 미쓰비시 군수공장을 레이더로 찾았다. 임무를 완수하기 위함이었다. 그때 커밋 비한 대위가 목표지점이 보인다고 소리쳤다. 그는 전문 폭격수(bombardier)다. 두꺼운 구름에 8인치(21㎝) 구멍이 뚫렸다. 고도 9600m에서 아래 시계가 확보됐다. 투하 명령이 오전 10시 59분에 하달됐다. 팻 맨이 오전 11시 2분에 지상 500m에서 폭발했다.

뉴욕타임스 2005년도 12월 8일 부고 기사에 실린 프레드릭 애쉬워스 사령관의 회고이다. 비행의 지휘관이자 무기 전문가로 원자폭탄 개발에 참여했다. 해군 중장으로 전역해 93세까지 살았다.

비한 대위는 27세가 되는 생일날에 나가사키에 플루토늄 원자탄을 떨어뜨렸다. 원폭 당시 “버섯구름이 뭉게뭉게 피어올랐으며, 주황, 빨강, 초록색 섬광을 봤다”고 휴스턴 크로니클 기자와의 인터뷰에서 밝혔다.

드럼통이 길게 이어져서 구르듯 검은 연기가 시가지로 퍼져나갔다. 마치 ‘지옥의 그림’처럼 보였다고 한다. 후에 “나가사키가 파괴됐다”고 들었고 폭탄을 떨어트릴 때 “그 의미를 몰랐다”고 말했다.

▲ 나가사키 원폭 이후 시가지와 사상자

나가사키의 피해자는 히로시마 사상자의 절반이다. 언덕으로 둘러싸인 지점에서 터졌기 때문이다. 그래서 3㎞ 밖의 외곽지대는 상대적으로 피해가 적었다.

일본에선 원자병을 앓게 된 사람을 히바쿠샤(被爆者·Hibakusha)라 칭한다. 세계 공용어가 됐다. 이들의 피부에 자주색 점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또 머리가 빠지고, 열이 나고, 잇몸이 허물어지고 혈액암을 포함해 각종 암 발생 비율이 높아진다고 한다.

시사주간지 타임에 따르면 히바쿠샤가 2020년 3월 현재 13만 6682명이다. 대다수가 80세 이상이다. 지난 20년간 생존 피폭자의 70%가 사망했다.

나가사키 원폭 투하 날, 야마다 가주미는 12세였다. 오전에 수영하러 간 친구는 모두 즉사했다. 야마다는 조간신문을 배달하고 시가지 밖의 집으로 돌아와서 목숨을 건졌다. 내셔널지오그라피에 따르면 야마다와 그의 친구처럼 생사(生死)가 바뀌는 경우가 부지기수였다.

이러한 일이 76년 전, 부산에서 280㎞ 떨어진 나가사키에서 일어났다. 지금은 서울에서 195㎞ 떨어진 평양에서 조선인민군 최고사령관이 핵폭탄을 만지작거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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