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열도가 성립되자 배에 의한 왕래가 시작되고 조선반도나 중국대륙의 사람들은 새로운 기술과 지식을 전했다. 그 가운데서도 야요이(弥生)시대의 시작이 된 벼농사의 전래는 그 후 일본 문화의 기반이 되었다.”

임진왜란 진원지인 히젠(肥前) 나고야성의 박물관에 있는 글귀다. 이곳은 일본열도와 한반도 교류의 상설 전시관이다. 상호이해와 선린우호(善隣友好)로 미래를 함께 개척하자는 선의로 1993년 10월에 전시가 시작됐다.

▲ 히젠 나고야성 모형도

사가현의 특별사적인 ‘나고야성터 및 진영터’가 발굴되면서 박물관이 설립됐다. 일본열도에는 10만~20만 년 전부터 사람이 살았다고 한다. 그때는 반도와 열도가 연결됐다. 빙하시대가 끝나면서 1만~2만 년 전에 일본열도가 분리됐다. 바다를 건너온 대륙의 문물로 일본 문화가 생겨났다고 ‘나고야성 이전’의 전시실에 적시(摘示)됐다.

한반도에 통일국가가 성립된 후로는 교류가 거의 중단됐다. 역설적으로 임진왜란을 통해 대규모로 인적교류가 이뤄졌다. 일본 측 최근 추산에 따르면 5만에 달하는 조선인이 왜란 이후 일본으로 이동했다고 한다. 침략군은 왜 수만 명에 달하는 조선인을 잡아갔으며 이들을 통해 무엇을 얻었을까.

일본에서는 임진·정유왜란을 합쳐서 ‘분로쿠·케이쵸의 역(文祿·慶長の役)’으로 부른다. 왜(倭)라는 한자어에는 ‘복종심 강하고 체구가 작고 다리가 구부러졌다’는 함의가 있다. 인종적으로 비하하는 단어다. 그런데도 박물관에서는 임진·정유왜란(壬辰·丁酉倭亂)이라고 적어놓았다.

왜란은 1592년 4월에 시작해 7년간 지속됐다가 1598년 겨울에 종료된다. 일본에서는 도자기 전쟁이라고도 부른다. 도자기(陶磁器)는 히라가나로 야끼(やき)라 발음한다. 흙을 굽기에 불사른다는 뜻의 소(燒)자를 쓴다.

침략군은 조선에서 전투보다 도자기를 긁어모으는데 더 열심이었다. 규슈 지역의 다이묘인 나베시마 나오시게(鍋島直茂, 사가현),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 구마모토현), 시마즈 요시히로(島津義弘, 가고시마현)가 이끄는 침략군 주축이 조선의 도공을 주로 납치해 갔다.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 구마모토현)는 우토성(宇土城)과 아마쿠사 제도(天草諸島)의 다이묘로 상인 출신이라 더 말할 필요가 없다. 이들이 잡아간 도공이 기록만으로도 수백이 넘는다.

▲ 임진왜란 참전 다이묘. 왼쪽부터 나베시마 나오시게, 가토 기요마사, 시마즈 요시히로, 모리 데루모토, 가토 요시아키

지금은 고인이 된 신일철 고려대 교수의 논문(임란 때 잡혀간 한국 도공들)은 ‘임진왜란은 도자기 전쟁’이란 머리글로 시작한다. 그는 철학과 교수였는데 <고향을 어이 잊으리까>라는 일본 중견작가 소설집에 게재한 해설로 임진왜란 때 끌려간 조선 도공의 일본 내 활동을 소개했다. (참조: 시바 료타로(司馬遼太郎), 김소운 역, <고향을 어이 잊으리까>, 1977, 289~298쪽)

그에 따르면 심, 신, 박의 세 성의 도가는 지금의 가고시마현에서 사쯔마야끼(薩摩燒)를 만들었다. 이삼평은 아리타야끼(有田燒)를 처음으로 제조해 일본에선 도자기 제조의 시조인 도조(陶祖)로 불린다.

이삼평은 일본에 건너가서 20년이 지난 1616년에 아리타(有田) 동쪽의 이즈미야마(泉山)에서 고령토(백토) 광산을 발견, 일본 최초의 백자를 생산했다. 당시 이삼평 밑에는 조선 도공 155명이 있었다고 한다. (참조: 신일철, 1977, 293쪽)

이 백자는 1650년대에 들어서면서 이마리(伊萬里) 항구를 통해 유럽에 대량 수출돼 ‘이마리야끼’로도 불린다. 5만여 점이 1659년에 수출됐다. 그중 2000점이 터키의 토프카프(Topkapi) 궁에 소장돼 있다.

이삼평이 1655년까지 생존했으니 이러한 대량생산은 그의 기술을 이어받은 조선 도공과 일본인 후예의 합작으로 봐야 한다. (참조: 유홍준,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 일본편1 규슈, 125~155쪽)

▲ 아리타 마을 전경. 후카가와세이지(深川製磁)란 글자가 오른쪽에 보인다.

서애 류성룡 연구팀은 도조 이삼평의 고장 아리타를 찾았다. 첩첩산중이다. 아리타 마을에 도착하니 국제적 자기 회사인 후카가와세이지(深川製磁) 푯말이 보인다. 후카가와 가문은 1650년에 아리타에서 첫 번째 자기를 구워낸 이후 1894년에 근대적 자기 회사를 설립했다.

이 회사는 6년 후인 1900년 파리에서 열린 만국박람회에서 일본 자기를 전시해 대상을 수상한다. 일본 황실에 자기를 공급하는 회사로 1910년에 공인을 받았다. 이삼평의 기술 전수가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도자기 유럽 수출로 근세 일본 경제발전의 초석이 된 조선의 도공들. 일본이 이들을 잡아간 계기는 무엇이었을까.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조선 4도를 넘겨 달라는 명(明)과의 강화협상이 결렬되자 정유년(1597년)에 다시 대규모로 조선 침략에 나섰다. 일본군이 그해 7월 칠천량 해전에서 승전한 후, 전라도 지방으로 진격해서 남원성을 함락시키고 전주성에 무혈 입성한다.

이어 한양을 향해 북상하다가 천안 아래 직산 전투에서 명군에 저지당했다. 때마침 명량해전에서도 이순신에 패해 바다의 제공권을 빼앗겼다. 전쟁은 다시 소강상태에 빠졌다.

▲ 정유재란 침략도

이때부터 일본군은 전투보다는 조선 도자기 긁어모으기에 혈안이었다. 경상도 지방에서는 개밥그릇으로 쓰인 막사발까지 빼앗아갔다고 한다. 당시 일본에는 사기그릇이 귀했다. 다이묘까지도 나무로 된 밥그릇을 사용했다고 한다. 침략군에게는 조선의 투박한 접시가 보물이었다. 조선의 찻잔, 다완(茶碗)이 일본에서는 작은 성 하나와 바꿀 정도로 귀하게 여겨졌다고 한다.

정유재란에서 좌군(左軍)의 수장이었던 시마즈 요시히로(島津義弘)가 남원성 외곽의 만복사(萬福寺)터 뒤쪽에 살던 도공을 집단으로 사로잡아 배에 태워 규슈로 보냈다. 이들 조선 도공은 가고시마현 사쓰마(薩摩)반도에 정착했다. 남원성에서 끌려온 조선인은 박평의와 심당길 등 17성에 80여 명이었다.

심당길은 심수관의 선조다. 후손이 현재 15대까지 심수관이란 이름을 쓴다. 박평의는 일본 군국시대 마지막 외무대신이었던 도고 시게노리(東鄕茂德)의 선조다. 제2대 박평의는 다이묘 전용의 히바카리(火ばかり) 다완을 구워냈다.

히바카리는 ‘불(火) 만’이라는 일본어다. 즉 불만 빼놓고 조선 도공이 조선 방식으로 만든 자기라는 뜻이다. 이 백자에 금수(錦手)와 금란수(金襴手)의 색채가 입혀져 국제적으로 인정을 받게 된다. 심당길이 시작한 히바카리 전통이 심수관 가계에 의해 오늘날까지 이어진다.

이삼평은 나베시오 나오시게의 부하에게 잡혀서 사가현으로 보내졌다. 한일 우호의 상징으로 ‘도조 이삼평 비(陶祖 李參平 碑)’가 사가현 아리타 마을이 내려다보이는 산꼭대기에 2005년 7월에 세워졌다. 아리타 마을 끝에서 오른쪽 급경사로 오르면 이 기념비가 나타난다.

▲ 도조 이삼평 기념비

2002년 한일 월드컵 개최, 그리고 그해 초에 상영된 KBS 2의 ‘겨울연가’가 일본에서 큰 인기를 끌었다. 마침 2005년은 국교 정상화를 위한 한일기본조약 체결 40주년이었다. 이런 분위기였던 양국이 현재의 외교 난맥상을 극복하고 21세기를 함께 헤쳐나갈 수 있을까.

조선이 천시했던 도공은 일본에서 사족(사무라이)으로 대우를 받았다. 이 장인들이 빚어낸 도예품은 서구사회에서 일본 문화를 알리며 대량으로 팔려나갔다.

400년이나 조선 방식을 고수했던 14대 심수관이 2019년 6월 작고했다. 향년 93세다. 그는 한일회담 반대로 캠퍼스가 들끓던 1965년 서울대 강연 후 청중을 오열케 한 다음 말로 고인의 뜻(遺旨)을 남겼다.

“당신들이 36년의 한을 말한다면 나는 360년의 한을 말해야 한다. 하지만 그렇게 해서는 미래로 나아갈 수 없는 것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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