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하기시는 메이지 유신의 태동지이다.

요시다 쇼인(吉田松陰). 그는 30세에 참형을 당한다. 죽기 전에 〈유혼록(留魂錄)〉을 남겨 일본 국가주의의 야마토 다마시(大和魂)가 된다. 그는 형장의 이슬로 사라지기 전에 다음과 같은 말을 남겼다고 한다.

“내 몸은 비록 무사시의 들녘에서 썩더라도, 영원히 남겨지는 야마토 타마시!” (참조, 김세진, 2018, <요시다 쇼인 시대를 반역하다>, 86쪽; 타마시는 원래 다마시로 써야 하지만 여기서는 원문 그대로 표기했다.)

야마토 다마시는 '일본의 혼’ 혹은 국가 정신을 뜻한다. 태평양 전쟁에서 수많은 일본 군인이 야마토 다마시를 외치며 무모한 돌진을 감행했거나 ‘천황 만세’를 외치며 옥쇄했다.

요시다 쇼인의 짧은 일생을 살펴보면 불굴의 투지 이외에는 그렇게 특별난 것이 없다. 야마구치현의 옛 이름인 조슈번에서 에도 막부의 허가증 없이 일본 동북 지역의 여행을 했다는 정도가 그가 이룬 성취이다. 그만큼 여행을 좋아했다. 외국 문물을 배우기 위해 여러 차례 불법 도항에도 나섰으나 실패했다.

그의 일생을 통해 불가능에 도전했던 돈키호테와 같은 성향을 발견할 수 있을 뿐이다. 그가 ‘광기의 유학자’로 불리는 이유이다. 일본이 군국주의로 나아가는 길목에서 제자와 후학들에 의해 ‘만들어진 영웅’이란 생각까지 들었다. (참조, 이희복, 2019, <요시다 쇼인 – 일본 민족주의 원형>)

마치 백제의 결사대에 홀로 돌격한 화랑 관창처럼 요시다 쇼인은 여러 차례 투옥에 죽을 줄 알면서도 추구하는 바를 실행에 옮겼다. 다케시마(울릉도) 개척론이나 정한론 그리고 대동아공영론의 원조 격이나 한국에는 잘 알려지지 않은 인물이다.

하기시(萩市)에 소재한 요시다 쇼인의 역사관을 둘러본 후 곰곰이 생각해 봤다. 야마구치현에서 이토 히로부미부터 아베 신조까지 어떻게 9명이나 총리대신이 나왔을까. 그중 8명이 사실상 요시다 쇼인의 계보를 잇는다. 아베는 왜 그를 가장 존경한다고 밝혔을까. 그는 제자들에게 지성(至誠)을 다하라고 가르쳤다. 아베의 좌우명도 지성이다.

▲ 요시다쇼인역사관 외부(왼쪽)와 내부

쇼카손주쿠를 찾아가니 15평 정도의 일본식 전통 가옥에 작은 방으로 나누어진 교실과 동쪽에 1평 정도의 공간이 있다. 그 옆 역사관에 요시다 쇼인의 일생이 연대기별로 20개 장면으로 나뉘어 밀랍 인형으로 재현됐다. 이곳에 일본인보다 한국인 관광객이 더 많이 찾는 기현상이 일어날 때였다.

우리에게는 낯익은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가 요시다 쇼인의 제자였다. 그런데 쇼카손주쿠를 찾았을 때 이토는 하기시의 수많은 인물 중의 하나에 지나지 않았다.

1980년대 중반에 미국 시애틀에 소재한 워싱턴대 강당에서 신상옥 감독이 총지휘하고 최은희 영화배우가 감독한 <돌아오지 않는 밀사>를 관람한 적이 있다. 이 영화 상영을 두고 시애틀 한인 커뮤니티와 워싱턴대 한인 학생회에서 의견이 분분했다.

한쪽에서는 영화를 상영하지 말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다른 쪽에서는 그래도 북한을 알기 위해서는 봐야 한다는 논리가 우세했다. 이 영화를 만든 신상옥과 최은희가 당시에는 북한에 있을 때였다.

이 영화의 테마는 헤이그에 밀사로 간 이준 열사의 일생이었다. 북한에서 만든 선전물이었다. 메시지는 간단했다. 혼자의 애국심만으로는 기울어가는 국운을 바로 세울 수 없다. 위대한 수령 지도자의 리더십을 따라야 한다는 내용이었다.

하기시에 이토 히로부미의 생가가 있다. 하지만 관광객은 이곳보다 다카스기 신사쿠(高杉晋作)의 동상을 찾는다. 다카스기는 메이지 유신 초기의 주역이었다. 가이드는 그가 “평민 출신으로 동네 건달이었다”고 소개한다.

그가 쇼인의 문하생이 되면서 개과천선한다. 김세진에 따르면, 다카스기는 쇼인의 수제자가 된다. 구사카 겐즈이(久板玄瑞), 이리에 구이치(入江九一), 요시다 에이타로(吉田栄太郞)와 함께 ‘쇼카손주쿠의 4대 천왕’으로 불렸다.

일본은 영웅이 많은 나라처럼 보인다. 그중에서 특별히 다카스기는 신분에 상관이 없이 누구나 입대할 수 있는 기병대를 창설했다. 에도 막부의 제1차, 제2차 조슈번 정벌을 막아냈다.

이어 임진왜란 때 조선 도공을 납치해 도자기 판매로 부를 형성했던 가고시마현의 사쓰마번과 삿초 동맹을 형성했다. 하지만 그는 삿초 동맹을 성사시킨 사카모토 료마(坂本龍馬)와 비슷하게 메이지 유신의 성공을 앞두고 요절했다.

▲ 야마구치현 하기시 전경(출처=KBS 역사한방)

다카스기 신사쿠가 창설한 기병대는 쇼카손주쿠에서 동문수학했고 부하였던 야마가타 아리토모(山縣有朋)에게 지휘권이 넘어가 일본제국 육군의 모형이 된다. 야마가타는 제3대와 9대의 내각총리대신을 지냈다.

그는 일본군 총사령관으로 청일전쟁을, 육군 참모총장으로 러일전쟁을 승리로 이끌었다. 일본제국 육군의 창설자이며 1904년 한일의정서 체결을 강요해 조선을 식민지로 만들었다.

이토 히로부미와는 경쟁자와 조력자의 관계를 유지하다가 이토가 안중근 의사에 암살된 후 일본제국의 권력을 독차지한다. 김세진에 따르면 야마가타의 조선관은 다음과 같다.

“조선은 우리나라처럼 신문명을 흡수하는데 필요한 소양과 역량이 없다. 그 국민들은 모두 임시변통에 능하고 구차하고 당장의 안락만을 챙기려 한다.” (김세진, 162쪽)

이에 반해 이토는 조선의 미래 가능성을 훨씬 ‘낙관적’으로 평가한 것으로 알려졌다. 하지만 조선 엘리트의 ‘부패와 후진성(corruption and backwardness)’을 문제시했다(참조, Duus, The Abacus and the Sword, pp. 198~199; 김세진, 162쪽). 21세기 다이내믹 코리아 시대에 사는 한국인에게 적용할 수 없는 평가이다.

하급 무사 출신의 이토 히로부미나 야마가타 아리토모가 요시다 쇼인으로부터 쇼카손주쿠에서 일본식 양명학에 근거한 교육을 받지 못했다면 19세기 중반부터 시작된 서세동점(西勢東漸)의 시대에 일본의 근대화에 나설 기회를 얻지 못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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