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에선 임진왜란을 ‘도자기 전쟁’으로 여긴다고 전편에 소개했다. 그렇다면 조선 도공은 어떻게 외부인 차별을 극복하며 일본에서 사회적 적응과 문화 변용을 이루었을까.

조선 도공의 기술은 일본에 넘어가 활짝 폈다. 이때의 도자기는 17~18세기 동서양 문화 교류의 주요 상품이었다. 도자기 판매를 통한 자본축적과 국제 교류로 일본은 서양의 개화사상을 일찍 받아들였다. 이웃 나라보다 근대화에 앞선 동기이다. 그 과정을 살펴보자.

▲ 하기 다완(국립중앙박물관 소장품)

개야 짖지 마라. 밤 사람이 모두 도둑인가? 주목지 호고려님이 계신 곳에 다녀오련다. 그 개도 호고려의 개로구나. 듣고 잠잠하노라(정광, <조선가> 2020, 189쪽)

일본에서 건너온 하기(萩) 다기를 국립중앙박물관이 전시 중이다. 다기의 정식 명칭은 철회시문차완(鐵繪詩文茶碗)이다. 정광 고려대 명예교수가 자기에 적힌 글귀를 뜻이 통하게 해석해 냈다. 여기서 ‘호고려’는 조선을 뜻한다. 이 글귀로 조선 도공은 주로 밤에 마실 다녔음을 알 수 있다. 타향살이의 설움을 조선식 시조 운율로 찻사발에 적어놓았다.

경상지역 도공들은 임진왜란 때 히로시마 출신의 다이묘인 모리 데루모토(毛利輝元)가 이끄는 왜군에 끌려갔다. 모리는 침략군 최대병력인 3만의 제7군 수장이다. 이들 왜군은 선봉군보다 열흘 정도 늦은 임진년 4월 하순에 김해의 죽도에 상륙해 경상도를 점거해 나갔다. 전투보다 약탈에 치중한 듯이 보인다. 경상도 도자기로 유명한 성주(星州)에 5월 18일에 들어가 “9일간 머물면서 이곳의 도공 등을 납치해” 히로시마로 보냈다. (정광, 190쪽)

이들 도공이 경상도의 동편제 다기 기술을 일본에 전수했다. 이들의 도자기는 전라도 서편제보다 질박(質朴)하고 실용적이다. 당시 끌려간 이작광(李勺光), 이경(李敬)과 그들의 후예가 모리 다이묘를 따라 히로시마 서쪽의 야마구치현으로 옮겼다. 그곳에서 일본에서 인기를 끌게 된 하기 도기를 제조하기 시작했다.

정유재란 중에 가장 잔인했던 시마즈 요시히로(島津義弘)가 이끄는 왜군 좌군이 전라도 남원성 외곽의 도공 80여 명을 잡아갔다. 이때 피랍된 도공들이 지금의 가고시마현 히오키시에 소재한 나에시로가와(苗代川)에 정착해 사쓰마야키(薩摩燒)라 불리는 도자기를 제조했다.

우리가 방문했던 규슈 아리타 마을의 인근 산에는 이삼평이 일본에 건너온 과정과 도조라 불리는 이유가 기념비 아래에 적혀있다. 그는 사가현에서 출병한 왜군에 잡혔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이 시작한다.

아리타 도자기의 시조인 이삼평 공은 조선국(현재의 대한민국) 충청도 금강 출신으로 전해지며 1592년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조선에 출병했을 때 나베시마군에 붙잡혀 길 안내 등의 협력을 명령받은 것으로 추정한다. 이삼평 공은 사가번의 시조인 나베시마 나오시게가 귀국할 때 일본으로 데리고 왔다. 그 후 귀화하여 출신지의 이름을 따서 그 성을 가나가에라고 지었다.

이삼평은 사가현에서 ‘가나가에 산베에(金ケ江三兵衛)’라는 이름을 받았다. 그는 1616년 백토 광산을 발견, 이 흙으로 아리타야끼(有田燒)라 불리는 일본 내 첫 백자를 제조했다. 그 후에 이 지역의 항구 이름을 딴 이마리야끼(伊萬里燒)라는 자기로 유럽에 대량 수출된다. 이삼평이 일본에서 도조로 추앙받는 이유이다.

▲ 이삼평 후손의 다기 진열과 이삼평 기념비석

▲ 이삼평 스토리

서애 류성룡 연구팀이 아리타 마을을 방문해 이삼평의 직계 후손이 운영하는 도자기 상점을 찾았다. 그곳 가계 벽에는 ‘복고창신(復古創新)’이란 사자성어 아래 “아리타 도자기의 초창기인 초기 이마리 양식에 따른 소재·도안·양식을 14대의 손으로 새로 만든 작품들”이라고 히라가나로 써놓았다. 그 아래에 찻잔을 진열해 놓았다.

이삼평의 가업은 오랫동안 중단됐다가 다시 이어졌다고 한다. 가고시마현의 심수관 가계와 비교해 소규모였다. 가격도 아리타 요업 공장에서 생산되는 ‘후카가와세이지(深川製磁)’의 다기와 비교해 비싸다.

심수관 가문은 중단없이 400년 동안 사쓰마야끼(薩摩燒)를 제조했다. 이들 조선인은 규슈의 최남단인 가고시마현에 정착했다. 한가위인 양력으로 9월 15일에는 단군을 모신 옥산궁(玉山宮)에서 청구영언(靑丘永言)에 나오는 조선 노래와 춤을 추면서 고국을 향해 제사를 지냈다. 그들의 선조가 잊지 못했던 고향을 그리며 사쓰마야키 도감(圖鑑)에 적힌 아래 노래를 부른다고 한다.

오날이 오나리쇼서(오늘이 오늘이소서)
마일에 오나리쇼서(매일이 오늘이소서)
졈그디도 새디도 마라시고(저물지도 새지도 마시고)
새라난(새더라도)
마양 당직에 오나리쇼서(늘 변함없이 오늘이소서)
(유홍준,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 일본편1 규슈, 2013, 272~273쪽)

이는 정광 교수가 최근 <조선가>에서 밝힌 ‘조선 도공의 망향가’ 가사와 거의 같다.

올 날이 오늘이다(來日今日)
매일이 오늘이소서(每日如今日)
날은 저물었어도(日者暮亦)
샐 때까지는 오늘이다(曙益如今日)
오늘이 오늘과 같으면(今日如今日)
무슨 세상과 같을 것인가?(何世如也)
(정광, 195~205쪽. 어문을 현대어로 옮김)

▲ 러시아 국립미술관에 소장된 12대 심수관의 대화병

임진왜란 때 끌려간 조선군 포로는 3만~4만이다. 민간인과 노약자까지 합쳐서 5만~6만이다. (참조: 나이토 슌스케(內藤雋輔), <분로쿠·게이초 전쟁에서 잡힌 포로들의 연구(文禄慶長役における被擄人の研究)>, 1976)

이들 중 상당수는 도공과 활자공, 철공, 목공이다. 이들의 기술 전수로 일본은 “도자기와 활자 인쇄술, 건축 기술, 철기 제조” 등에서 혁신적인 발전을 이룩했다. 나아가 근대화의 기초를 다졌다고 한다. (정광, <조선가>, 2020, 14쪽)

조선으로선 이들 피랍인(被拉人) 인력이 큰 손실이었다. 왜란이 끝나고 그들의 생환을 위해 통신사를 보냈다. 하지만 대다수가 일본에 잔류했다. 이들 조선인은 일본에서 외부인에 대한 차별을 감수해 내며 문화 변용과 동화(acculturation & assimilation)의 과정을 거친다.

일본은 조선 도공의 기술을 받아들여 에도 막부시대에 도자기 산업을 발전시켰다. 조선 도공이 만들기 시작한 도자기의 대량 생산체제를 구축해 일본 각처에 공급했다. 또 유럽으로 대규모로 수출한다.

이 요업의 중심지는 부산에서 200㎞ 남짓 떨어진 규슈와 혼슈의 최남단 주코쿠(中国) 지방이었다. 그 지역의 지배층은 이때 축적한 자본으로 유럽과 교류하며 개화사상을 받아들인다. 이 혁신 세력이 19세기 중반 이후에는 메이지 유신의 주역으로 활약한다.

이들의 팽창 지향적 제국주의는 임진왜란의 데자뷰처럼 청일과 노일전쟁으로 이어진다. 진주만 기습 폭격으로 태평양 전쟁까지 일으킨다. 미국은 종전을 앞두고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원자폭탄을 떨어뜨린다.

히로시마는 조선 도공을 일찌감치 데려간 모리 데루모토 왜군의 본거지였고 일본 군국주의의 상징 도시이자 병참기지였다. 나가사키는 임진왜란의 진원지인 히젠 나고야 성터에서 남쪽으로 123㎞ 떨어진 일본의 개화 창구(艙口)이자 주요 무역항이었다.

일본 제국주의의 마지막 외무대신이었던 도고 시게노리(東鄕茂德)가 강경파 군부와 맞서 일본 천황으로 태평양 전쟁의 종결을 선언케 한다. 패전에도 불구하고 일왕제를 유지할 수 있도록 외교적 기여가 컸다. 그는 정유재란 때 잡혀간 도공 박평의의 13대 후손이다.

박평의는 심수관 가계의 선조인 심당길과 함께 사쓰마 도자기를 만들어 일본 근대화의 씨앗을 뿌렸다. 그의 후손이 현대 일본 국가체계의 기초를 다졌으니, 역사의 아이러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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