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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재철 교수의 세계 여행기 ㉙ 일본의 대전환 - 시모노세키와 군국주의
심재철 고려대 미디어학부 교수 | 승인 2021.12.30 17:07

 

▲ 히노야마공원 전망대에서 내려다본 간몬교. 혼슈와 규슈를 잇는 다리로 길이가 1068m이다. (출처=trip.com)

한 나라를 이해하려면 지리와 인물을 알아야 한다는 말이 있다. 지리와 인물 속에 그 사회의 문화와 정치경제의 유산이 남아있기 때문이다. 일본 군국주의의 역사적 흔적을 고스란히 담고 있는 야마구치현도 그런 곳 가운데 하나이다.

필자는 고려대 언론대학원 최고위 43기 과정생과 2015년 6월 19일부터 사흘간의 일정으로 후쿠오카(福岡)와 시모노세키(關) 그리고 하기시(市)를 찾았다. 시모노세키를 가기 위해서는 예전이나 지금이나 대한해협을 건너야 한다. 일본의 강점기에는 관부 연락선을 타고 대한해협의 일본 측 수로인 쓰시마 해협을 건너 시모노세키에 도착했다. 이 때에 ‘현해탄을 건넌다’라는 표현이 사용됐다.

조선인에게 현해탄(玄海灘)은 한숨과 후회와 연민의 검은색 바다이다. 조선 반도를 떠날 때 필연적으로 통과해야 하는 물살이 센 바다의 물길이기도 하다. <상록수>의 저자인 심훈은 조선인의 상상 속 후회의 바다를 ‘현해탄’이란 제목으로 아래처럼 노래한다.

바다 위에 바람이 일고 물결은 거칠어진다/우국지사(憂國志士)의 한숨은 저 바람에 몇 번이나 스치고/그들의 불타는 가슴 속에서 졸아붙는 눈물은/몇 번이나 비에 섞여 이 바다 위에 뿌렸던가/그동안에 얼마나 수많은 물 건너 사람들은/「인생도처유청산(人生到處有靑山」을 부르며 새 땅으로 건너 왔던가 (중략)/동포의 꼴을 똑바로 볼 수 없어/다시금 갑판 위로 뛰어 올라서/물속에 시선을 잠그고 맥없이 섰자니/달빛에 명경(明鏡)같은 현해탄 위에/조선의 얼굴이 떠오른다!/너무나 또렷하게 조선의 얼굴이 떠오른다/눈 둘 곳 없어 마음 붙일 곳 없어/이슥토록 하늘의 별 수만 세노라 (심훈, 2016, <그날이 오면>, 100쪽)

20세기 초 나약한 조선의 지식인이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일본의 식민지배를 인정하고 군국주의를 좇아가거나 반도를 떠나면서 마음을 붙일 곳이 없어 하늘의 별 수만 세고 있었다.

인천에서 비행기를 타고 후쿠오카공항에 내려 규슈와 혼슈를 잇는 간몬교(關門橋)를 건너 시모노세키에 도달하는데 자동차로 1시간 남짓 걸렸다. 시모노세키는 일본 본토에 해당하는 혼슈의 남서쪽 끝자락에 위치하며 규슈의 최북단 도시인 기타규슈(北九州) 바로 위에 소재한다.

간몬교를 건너자마자 시모노세키 해안도로를 타고 왼쪽으로 2.3㎞ 정도 가면 일청강화기념관이 나온다. 이곳에서 일본 내각 초대 총리를 지낸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가 리훙장(李鴻章)과 청일강화조약을 체결했다. 일본은 청일전쟁 승리를 기념하기 위해 숙박업소로 사용됐던 강화회담 장소를 유적지로 꾸며 관리하고 있다.

▲ 일청강화기념관의 내부. 1895년 4월 17일에 조약을 체결했다.

일본은 조선 내 동학혁명을 진압하러 왔던 청나라와 일전을 벌였고, 전쟁을 승리로 이끌면서 시모노세키에서 일청강화조약을 맺었다. 러시아는 독일과 프랑스와 함께 삼국간섭으로 일본의 조선과 만주 진출을 저지한다. 러시아는 부동항인 뤼순(旅順)항을 조차하며 랴오둥반도(遼東半島)에 군사를 배치한다. 재주는 곰이 부리고 실제 이익은 러시아가 차지한 꼴이 됐다. 당시 일본에서는 반러시아 감정이 크게 일었다.

일청강화조약이 주는 교훈은 약소국의 운명은 늘 강대국의 이해관계에 따라 결정된다는 사실이다. 강성학 고려대 정치외교학과 교수의 진단은 약육강식의 국제질서가 한 나라의 운명을 어떻게 바꿔놓을 수 있는지 잘 보여준다.

강 교수는 “전쟁에서 누가 언제 승리하느냐”가 전후 세계질서 재편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친다”라고 말한다. 일본은 청일전쟁에서 쉽게 승리를 거두었다. 여기서 자신감을 얻어 제국주의의 야욕을 드러낸다. 러시아는 청일전쟁 이후 제3국 개입을 주도해 청나라로부터 뤼순항의 조차권을 얻었고 북중국에 특별한 철도부설권을 확보했다.

일본은 청일전쟁의 승리로 ‘서양국가에 일본의 위력을 과시’했다. 나아가 러시아와의 일전을 준비한다. 청일전쟁의 배상금으로 영국의 장갑 선박을 대규모로 주문해 놓았다.

러시아는 조선반도를 39도로 나누어 지배권을 확보하려 했으나 일본은 이를 거부한다. 러시아와의 협상이 결렬되자 일본은 드디어 1904년에 신의주 왼쪽의 뤼순과 랴오둥반도 공격에 나섰다.

일본의 침략 전략은 일관성이 있다. 타국과의 전쟁에서 선제 기습하고 선전포고를 나중에 하는 방식을 택한다. 역사적으로 임진왜란이 그랬고, 청일전쟁이 그러했다. 러일전쟁의 개전과 진주만을 기습 공격한 태평양 전쟁의 시작도 전투를 시작한 후 선전포고를 나중에 하는 방식을 택했다. 우리의 국력이 쇠한다면 언제 다시 일본으로부터 기습공격을 당할지 모른다. 그때는 후회해도 너무 늦다.

▲ 러일전쟁 전투 지형도(출처=나무위키)

얄궂지만 러일전쟁의 종지부를 찍은 승리도 시모노세키 앞바다인 쓰시마 해전에서 이루어졌다. 일본의 도고 헤이하치로(東郷 平八郎) 제독은 남아프리카의 희망봉을 돌아온 러시아의 발트함대를 이곳에서 격파해 완벽한 승리를 거두었다. 일본이 동양에서는 칭기즈칸 이후로 최초로 백인 국가와의 전쟁을 승리로 갈무리했다.

1905년 러일전쟁 이전까지만 해도 서구 열강은 아시아인을 깔보며, 원숭이 보듯이 미개한 종족으로 간주했다. 일본이 러일전쟁에서 승리하자 아시아인을 경계하는 백인의 ‘황화(黃禍‧yellow peril)’가 나타났다. 황인종을 대하는 서구의 인식 변화가 일어났다.

여기서 일본 육군의 뤼순의 러시아군 포위 공격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일본인에게 뤼순은 청일전쟁에 승리했음에도 러시아가 훔쳐 간 기지였다. 이곳에서 일전이 러시아와의 전쟁의 승패를 상징했다. 러시아는 다롄과 뤼순 사이에 두 개의 외곽 방어선을 구축해 놓았다.

노기 마레스케(乃木希典) 육군 사령관은 1904년 여름에 일본군 3개 사단과 2개 여단 병력을 지휘했다. 이 방어선을 뚫고자 줄기차게 공격해 러시아군을 후퇴시켰다. 하지만 대규모 희생을 감수해야 했다. 일본군은 이 전투에서 약 2만 명의 사상자가 발생했다.

노기 장군은 1894년에 반발했던 청일전쟁에도 참전했다. 당시에는 한차례 공격으로 뤼순을 점령했다. 그때는 16명의 사병을 잃었을 뿐이다.

일본군 사상자는 러일전쟁에서 203고지를 포함한 1, 2차 방어선을 뚫는 뤼순의 점령 작전으로 6만 명이 넘었다. 노기 장군의 두 아들도 이 랴오둥반도 전투에서 사망했다. 반면에 러시아군의 사상자는 일본군 피해의 절반에 해당하는 3만 명이다. (강성학, 1999, <시베리아 횡단열차와 사무라이> 참조)

▲ 노기 마레스케 부부 동상

일본 육군은 러시아와의 지상 전투에서 이처럼 고전했다. 하지만 쓰시마 해전은 일방적인 일본 해군의 대승이었다. 도고 장군의 완벽한 승리에 영군의 해군부는 쓰시마를 트라팔가(Trafalgar)에 비견했다.

반면 뤼순과 묵덴 전투를 힘들게 승리로 이끈 노기는 도쿄의 거대한 승전 퍼레이드에서 늙은 말을 타고 자신을 한껏 낮추었다. 뤼순 전투에서 입었던 제복을 입은 노기는 일왕 앞으로 나아가 눈물을 흘리며 목이 메어 죽고자 함을 호소했다.

메이지 일왕은 노기의 할복을 승인하지 않았고, 자신의 사후까지 기다려야 한다고 말했다. 승전 퍼레이드 이후 7년이 지난 1912년 9월 13일 메이지의 영구차가 황궁을 떠났다. 그 순간에 노기는 자신의 검으로 할복(腹切‧hara kiri) 한다. 이에 앞서 노기의 처도 먼저 자결했다.

노기 장군은 셋푸쿠(切腹‧せっぷ)로 불리는 사무라이 방식으로 죽어서 전쟁 신(神)이 됐다 (Connaughton, 1988, 278쪽; 강성학 재인용). 쓰시마 해전에서 완벽한 승리를 거두고 전역해 86세까지 장수한 도고 제독보다 수많은 병사를 잃은 노기 장군을 일본에서 더 상위에 놓는 이유이다.

그렇다면 대동아 공영권을 내세우며 태평양 전쟁을 일으킨 일본 제국주의의 정신적 지주는 누구인가. 다음 편에서는 이토 히로부미의 스승이자 아베 신조 전 총리가 존경해 마지않았던 요시다 쇼인(吉田松陰)의 발자취를 찾아서 하기 시의 쇼카손주쿠(松下村塾)로 향한다.

하기시는 메이지 유신의 개화사상이 태동한 땅이자 아베 전 총리의 정치적 마음의 고향이다. 그는 잃어버린 일본의 10년 아니 20년을 되돌리고자 이른바 ‘아베노믹스’를 들고나와 재기에 성공한다.

21세기 일본의 정치체제는 아베 정권의 연속선상에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메이지 유신의 성공과 군국주의의 등장, 그리고 전후 일본의 보수우익 사상이 야마구치현의 하기시에 뿌리를 두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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