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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후 아파트는 정전과의 전쟁 중 (상)
김유진·유경민·정윤경·최지은 기자 | 승인 2021.12.12 19:37

 

스토리오브서울 기자단의 김유진 유경민 정윤경 최지은 씨가 뉴스통신진흥회 제4회 탐사·심층·르포취재물 공모전에서 최우수상을 받았다. 수상작 <노후 아파트는 정전과의 전쟁 중>은 낡은 아파트 16곳의 주민이 정전으로 겪는 불편을 다뤘다. 심사위원회는 정전의 원인을 찾기 위해 한국전력공사, 전기안전공사, 전기 전문가를 광범위하게 취재했다고 평가했다. 진흥회 동의를 받아 수상작을 게재한다. 스토리오브서울 양식에 맞추면서 표현을 일부 고쳤다. <편집자 주>

“에어컨, 전자레인지, 다리미, 에어프라이어, 건조기도 쓰지 말라고 하고…. 이게 현실적으로 가능해 보이세요?”

9월 27일 오후 4시 서울 양천구 신정동에 있는 M아파트 주민 장미희 씨(37)는 ‘전력 사용 자제’ 안내문을 가리키며 목소리를 높였다. 관리사무소는 10월 9일까지 가전제품 사용을 줄이라고 했다.

취재팀이 장 씨를 만나기 전인 9월 13일 저녁, M아파트에서 10시간 동안 정전이 발생했다. 1300세대에 전기 공급이 끊겼다. 전력 사용량이 폭증하는 여름철도 아니었다. 당시 엘리베이터를 탔던 주민 10여 명이 꼼짝없이 갇혔다.

채모 씨(48)는 “긴급통화 버튼이 먹통이고 안내방송이 없어서 정전 상황인지도 몰랐다”며 “엘리베이터가 추락할까 봐 두려워서 아들과 함께 10여 분을 버텼다”고 회상했다. 그는 다신 겪고 싶지 않은 경험이었다고 했다.

수험생은 인터넷 접속이 끊기면서 저녁 내내 애를 태웠다. 김희서 양(19)은 “정전 사고가 난 후로 엄마가 ‘수능 전에 정전이 또 날 수도 있으니까 미리 대비를 해놔야 하지 않겠냐’고 물었다”면서 “집 대신 스터디 카페나 독서실에서 학교나 학원 수업을 들으려 한다”고 말했다.

관리사무소는 추가 피해를 막기 위해 정전 직후, 한 달간 절전해달라는 긴급 안내문을 8개 동에 부착했다. 전력 사용이 몰리면 또다시 정전이 발생할 수 있어서다.

장 씨는 “추석 때 인덕션 사용을 자제하라고 하길래 음식은 어떻게 해야될지 막막했다”며 “코로나19로 집 안에만 머무르는 사람이 많은데 추석 연휴 때, 불편한 게 이만저만이 아니었다”고 말했다. M아파트는 준공된 지 34년 됐다.

▲ 서울 양천구 신정동 M아파트의 안내문

올해 7월 전국 아파트에서 발생한 정전 사고는 210건이다. 하루 7번꼴로 작년 같은 기간보다 약 7.5배 증가했다.

한여름만이 아니다. 1~8월 정전도 2019년 183건, 2020년 235건, 2021년 312건으로 계속 늘었다. 인구 밀집도가 높은 아파트에 정전이 발생하면 1000여 세대 이상이 피해를 입는다.

정전은 노후 아파트에서 주로 발생한다. 한국전력연구원에 따르면 준공 25년 이상인 노후 아파트의 정전 발생률은 15년 미만의 아파트보다 7.4배 높다.

2020년 인구주택총조사에 따르면 국내 아파트 42.7%(497만 호)가 20년 이상 됐다. 취재팀은 올해 정전이 발생한 노후 아파트를 찾아가 피해 상황에 대해 들었다.

▲ 취재팀이 찾은 노후 아파트의 정전 현황

서울 강남구 압구정동 H아파트의 정전은 7월 21일 밤에 생겼다. 384세대의 전기 공급이 끊겼다. H아파트는 45년 전에 지어졌다.

정전 한달 후에 찾아갔더니 주민의 노이로제는 극에 달한 상태였다. 마트에서 장을 보고 귀가하던 박 모 씨(54)는 절반이 채 차지 않은 장바구니를 내밀며 “또 정전이 나면 냉장고의 음식을 다 버려야 하니까 장을 조금밖에 못 봤다”고 말문을 열었다.

박 씨는 20년 동안 이곳에 살면서 어림잡아 10여 건의 크고 작은 정전을 겪었다고 했다. “2~3년에 한 번꼴로 정전이 일어난다. 언제 또 정전이 일어날지 모르니까 하루 먹을 양만 장을 보는게 습관이 됐다.”

H아파트에는 가을에도 정전이 났다. 2018년 10월 30일, 13시간 동안 936세대가 피해를 겪었다. 박 씨는 “엘리베이터를 포함해서 모든 게 다 멈췄다. 주민이 아파트를 빠져나와 근처 친척 집이나 숙박업소로 피신하던 모습이 아직 눈에 선하다”고 했다.

▲ 경기 부천시 중동 Y아파트의 정전 당시 모습(주민 제공)

폭염경보가 발령된 7월 28일, 경기 부천시 원미구 중동 Y아파트. 918세대의 불이 꺼지고 전기가 나흘간 복구되지 않았다. 박춘희 씨(60) 가족은 전기가 들어오지 않는 집에서 사흘을 버텼다. 자녀들은 회사에서 휴대용 선풍기를 충전했다.

가족 모두가 열대야 속에 작은 선풍기를 손에 쥐고 잠들었다. 첫날에는 수도가 끊겼다. 윤종만 씨(68)는 자기 가게에서 물을 퍼 왔다. Y아파트에서는 1~2개 동 단위의 소규모 정전이 여러 번 반복됐다. 변압기 용량을 늘리기 전까지 안심할 수 없다.

▲ Y아파트의 18층 주민이 상하기 쉬운 냉장고 음식을 아이스박스에 담아 계단으로 옮기고 있다. (주민 제공)

겨울도 걱정이다. 한파로 인해 전력 사용량이 같은 시간대에 몰리면 정전이 반복될 수 있다. 노약자에게는 겨울 정전이 더 가혹하다.

서울 송파구 신천동 J아파트 입주민 윤영화 씨(64)는 재작년 2월 초, 한파주의보가 발령됐을 때 정전을 겪었다. 2000여 세대에 저녁부터 다음날 이른 아침까지 전기가 끊겼다.

그는 9월 27일 취재팀을 만나 “정전이 났을 때 난방이 안 돼 덜덜 떨었다”며 “올겨울에 정전이 나면 온수가 안 나오고 전기장판이 안 켜질 텐데 4살, 6살 된 손주들이 감기에 걸릴까 봐 걱정이다”라고 말했다.

노후 아파트가 정전에 취약한 이유는 무엇일까. 전기 사용이 늘지만 전력시설이 감당하지 못해서다.

취재팀이 한국전력공사(한전)에 정보공개를 청구해서 받은 자료에 따르면 서울 아파트의 호당 전기 사용량(연평균)은 1999년에 191.22㎾에서 2020년에 3381.11㎾가 됐다. 하루 평균 0.5㎾에서 9.3㎾로 늘었다. 에어컨 1대를 가동하려면 순간적으로 1.5㎾ 정도가 필요하다.

전기 사용이 급증한 이유는 가전기기 확대에 있다. 여름에는 특히 에어컨이 전력을 많이 사용한다. 한국전력거래소의 주택용 가전기기 보급 현황 조사에 따르면 가구당 에어컨은 1995년 0.13대에서 2019년 0.97대로 늘었다.

에어컨을 여러 대 사용하는 가구도 많다. 서울 송파구 신천동 J아파트의 강 모 씨(45)는 “요즘엔 거실 생활을 잘 안 해서 방마다 에어컨을 뒀다. 우리 집은 방이 3개인데 에어컨이 거실에 1대, 방에 2대 있다”고 말했다.

새로 생긴 가전제품도 많다. 공기청정기, 의류건조기, 에어프라이어, 식기세척기, 전기레인지(인덕션) 등이다. 인덕션은 순간적으로 많은 양의 전기를 소모한다.

홍준희 가천대 교수(에너지IT학과)는 “인덕션은 에어컨의 3배 이상 전기를 필요로 한다”며 노후 아파트의 세대당 전기 설계용량은 최신 가전제품의 전기 소모량을 감당하기엔 턱없이 부족하다고 지적했다.

이병준 고려대 교수(전기전자공학부)도 “가정에서 사용하는 전기 부하가 과거에 비해 크게 증가해 노후 아파트에서 정전 사고가 발생한다”며 “안정적인 전력 공급을 위해서는 가구에서 소모하는 전력량에 맞는 용량의 변압기 교체가 필요하다”고 설명했다.

▲ 가구당 가전기기 보급 현황(출처=한국전력거래소)

하지만 노후 아파트의 변압기 용량은 수십 년 전 그대로다. 주택건설기준 등에 관한 규정에 따르면 주택에 설치하는 전기시설의 용량은 세대별로 3㎾ 이상이어야 한다. 1991년 이전에 생긴 아파트는 1㎾ 수준이다.

용량이 1㎾인 아파트에서는 가전기기 2, 3대를 동시에 사용하면 변압기 용량을 크게 웃돈다. 여러 세대가 동시에 용량을 초과해 전기를 사용하면 변압기에 과부하가 걸려 정전될 수 있다.

▲ 경기 부천시 중동 Y아파트 변전실. 합선됐던 케이블이 보인다

취재팀이 갔던 서울 강남구 압구정동 H아파트, 경기 부천 중동 Y아파트의 변압기 용량은 세대당 각각 1.7㎾와 1.3㎾였다. 인천 미추홀구 용현동의 K아파트는 전력 과부하로 450㎾짜리 변압기 1대가 완전히 고장 나면서 7월 19일에 정전이 20시간 계속됐다.

홍 교수는 “근본 원인은 변압기 용량이 전기 사용량을 감당하지 못할 만큼 낮은 점”이라며 “변압기 설계 수명은 25년 정도인데 용량을 초과한 상태로 계속 사용하면 빨리 노후화하고 고장난다”고 설명했다.

용량 초과 상태로 전기를 사용하면 변압기 온도가 올라 화재가 발생한다. 경기 부천 중동 Y아파트에서는 변압기 온도가 76도까지 상승했다. 이로 인해 가정에 전기를 보내는 케이블이 합선되며 화재가 발생했다. 정전은 7월 28일부터 나흘간 계속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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