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일본 처음 가봐"
인천공항을 떠난 지 한 시간 반이 채 안되어 일본 간사이공항에 도착을 알리는 방송이 나오자 기내가 몇몇 한국 소년들의 흥분된 목소리로 들썩해졌다. 드디어 착륙을 하고 차례로 줄을 서서 내리는 소년들의 가슴에서 우연히 "한일 청소년 문화 교류단"이란 명찰을 보게 되었다. 일본으로 떠나기 며칠 전 신문에서 "한일간의 교사, 학생 교류를 전면 재검토하겠다"는 교육부의 발표를 보고 피식 웃었던 기억이 났다. 이는 "한일 군사 교류 중단"이나 "일본문화 개방 연기"와 맥락을 같이하는 정부의 교과서 '왜곡' 문제에 대한 대처방안이었다.

갈등 해결을 위해서 교류를 중단하겠다는 발상에는 실소가 절로 나온다. 우리가 화가 났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 이상의 소득을 얻을 수 없는 감정적인 대응이다. 여러 가지 문제가 불거져 나와 한일 서로에 대한 이해와 설득이 더욱 필요한 시점에서 교류 자체를 중단해서 어쩌자는 것인지… 비행기에서 만난 "한일 청소년 문화 교류단"의 한 인솔 교사는 "중단된 것은 국가 예산으로 지원을 받는 교류에 국한될 뿐 민간차원의 교류는 꾸준히 계속되고 있다"고 말했다. 하지만 5박 6일 동안 학생당 100만원이 가까운 비용을 모두 사비로 부담해야만 교류가 가능한 현실이 안타까웠다.

공항에서 이들과 헤어져 기차를 타고 오사카 시내의 난바역에 내렸다. 상업도시답게 끝없이 이어진 쇼핑가의 입구와 맞닿아있는 역 앞이 마이크 소리로 시끄러웠다. 낯선 땅에 내리자마자 쏟아지는 뙤약볕 아래 쩌렁쩌렁한 마이크를 통해 울리는 낯선 언어에 왠지 이질감이 들었다. 나흘 뒤에 있을 일본 참의원 선거의 후보자가 거리 유세 중이었다. 투표 날은 4박 5일간의 배낭여행 마지막 날이기도 했다. 우연찮게 일본 참의원 선거의 마지막 나흘간을 직접 목격한 셈이다.

짧은 기간이었지만 선거를 즈음했기 때문이었는지 고이즈미 열풍은 확실히 느낄 수 있었다. 골목골목마다 고이즈미 총리가 팔을 걷어붙이고 "새로운 일본"을 약속하는 자민당 포스터가 가장 눈에 띄었다. TV에도 곧잘 볼 수 있었던 고이즈미 총리에게서는 말발 좋고 성질 급한 다혈질이란 인상을 받았다. 특히 뭔가 화가 나 있는 듯한 표정과 제스추어가 충분히 도발적이었다. 굉장히 동적이라고 할까?

일본이 추구하는 새로움의 함정

일본에서의 마지막 밤에 재미있게 본 코미디 프로 중 하나가 "21세기형 안경" 개발을 둘러싼 에피소드였다. 21세기의 안경은 뭔가 새롭고 혁신적이어야 한다는 강박관념을 안고 둥근 회의용 테이블에 둘러앉은 네 명의 남자. 이들은 각기 머리를 쥐어 짜내는 고통을 겪으며 안경의 새로운 기능에 대한 건의안을 내놓는다. 하지만 6가지가 넘는 신 기능이 알고 보면 안경다리를 귀지 파는데 쓰거나 칼처럼 스테이크를 자르는 데 쓰는 등 거의 허무개그 수준이다. '안경을 벗었을 때 미인이 된다'는 기능 역시 폭소를 자아냈다.

이렇게 탄생한 신세기 안경에 걸맞는 새로운 이름을 지어야한다면서 또 한번의 헤프닝이 벌어진다. 결국 우연히 나온 "미루미루 (見る見る, 즉 본다라는 뜻)"라는 단어를 갖다 붙여서 "새로운 21세기 안경"이 완성된다. 등장인물들의 진지한 표정과 대비되는 엉뚱한 상상력에 마냥 웃으며 봤지만 이들이 추구한 새로움이 결국 허상이라는 속뜻이 문득 의미심장하게 느껴졌다.

선거를 하루 앞두고는 전통의 도시 교토의 거리까지도 미니트럭을 개조한 유세용 차를 타고 간곡히 한 표를 부탁하는 선전원들의 마이크 소리로 시끄러워졌다. 하지만 더 이상 낯선 땅의 무의미한 지껄임만은 아니었다.

일본에 머무는 동안 나를 외국인이라고 단번에 알아보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오히려 상점에서 물건을 구경하고 있으면 점원이 자연스럽게 다가와 일본어로 말을 건다. 경찰이나 지하철 역원에서 간단한 일본어로 길을 물으면 그냥 타지의 관광객 정도로 생각하고 열심히 알려준다. 호텔 프론트에서 밤에 놀만한 곳을 물어보고 한 직원이 즐겨 가는 이자카야(일본의 술집)를 소개받기도 했다.

지하철에서 수군거리는 커플들의 모습, 선 채로 핸드폰 문자 메세지를 보내는 데 열중한 사람들, 숙제인 듯한 뭔가를 열심히 쓰고있는 교복 입은 남학생…4박 5일간의 짧은 일정이었지만 일본의 보통 사람들과 부딫히며 지내는 동안 이방인이라는 느낌은 점점 사라졌다. 오히려 한 발작 더 안으로 들어가서 보니 허상마저도 느낄 수 있었다.

처음 공항에서 느꼈던 한일 간 교류의 필요성을 더욱 절감하며 한국을 향했다. 여행 기간동안 내가 머문 오사카와 교토에는 비 한 방울 내리지 않았는데 인천 공항에 착륙하자 한국 땅은 젖어있었다. 돌아온 다음날 홍수 소식과 함께 신문에서 접한 일본 참의원 선거의 결과는 새로움을 온몸으로 발산하는 고이즈미 총리가 이끈 자민당의 압승이었다. 10년 넘게 계속되는 경기 침체 속에서 뭔가 새로움을 갈망하는 국민들의 민심을 반영한 결과다.

일본 내에서도 교과서 왜곡을 비판하는 시민운동이 일고 있다고 한다. 교과서 왜곡 등 한일간의 문제에서 완고하게 버티는 일본 정부도 자국민들의 의식 앞에서는 움직일 수밖에 없다. 그런 의미에서도 일본을 다녀와서 느낀 것은 "제대로 알고 제대로 알려야만 한다"는 당위다. 정부 주도로 중단되고 있는 한일간의 교류가 다시 이어지고 나아가 민간차원의 교류 역시 더욱 활발해 지기를 바란다

김재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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