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화여대 언론홍보영상 00학번 정순화


새는 알에서 나오려고 버둥거린다.
그 알은 새의 세계이다.
알에서 빠져 나오려면 하나의 세계를 파괴하지 않으면 안 된다.
『데미안』, 헤르만 헤세

알에서 나오려고 버둥거리는 새- 나를 비롯한 2000학번 새내기 모두의 모습이 아닐까! 바로 몇 달 전까지만 해도 우리는 학교와 가정이라는 울타리 안에서 '주어진' 역할만을 해왔다. 이제 대학이라는 사회에 '내던져진 존재'가 된 나는 지금 얼마쯤 와 있는 것일까. 알에서 나오려고 버둥거리기는 하는지, 아니면 아직도 잠들어 있는지….  항상 분주했지만 뚜렷하게 한 일도 없었던 한 달간의 대학 생활을 돌아본다.

'내던져진 존재'는 대학생이란 이름으로 그 누구의 간섭도 거부할 수 있는 권리를 갖게 되었음을 의미한다. 지난 수년간의 제도권 교육에서 벗어나 자유인이 되었다고 할까? 사소한 일부터 자신의 선택 사항이 많아지고 선택 권한도 강화되었다. 예전에는 금지되었던 일들도 이젠 할 수 있게 됐다. 아침에 늦게 일어나든, 머리에 빨간 물을 들이든, 담배를 피든, 친구나 선배와 밤늦도록 술을 마시든 대학생이란 보증서만 대면 그러려니 하며 봐준다. 이렇게 내 맘대로 행동하고 싶은 욕구는 우리 인식 속에 잠재된 '대학생은 성인'이라는 명제 안에서 허락받는다. 그러나 이 명제는 과대 포장되어 있다. 나 역시 과대포장된 내 자아를 느끼고, 그러기에 내가 부끄럽다.

예를 하나 들자. 요즘 한창 교육 투쟁-등록금 투쟁이 대학가의 핫 이슈로 주목받고 있다. 입학 초기부터 '민주 납부'에 동참하자는 전단지를 받았었고 입학 후 지난 한 달여 동안 학교 곳곳에서 총학생회의 등록금 투쟁을 볼 수 있었다. 무심히 스쳐지나가는 수많은 학생들 앞에서 목이 쉬도록 외쳐대는 선배, 검은 옷 입기 운동, 본관 항의 방문 중 교수님들과의 마찰, 철야 천막 농성, 의견이 다른 학생들과의 대자보 논쟁, 채플 후 선전전과 이를 보는 둥 마는 둥 강당을 떠나는 학생들, 그리고 총학생회의 삭발식. 많은 일들을 지켜보면서 나는 어떤 생각을 했는가? 등록금 투쟁의 한 방법으로 등록을 유보한다던데 우리는 판단 유보, 행동 유보를 하고 있다. 기껏해야 화장실에 쪼그리고 앉아 '언니들, 파이팅!' 같은 몇 마디의 낙서를 했을 뿐이다. 아직 어떤 기준도, 주관도 세워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내 판단의 결과에 따른 행동을 두려워하는 것. 이는 앞서 말한 명제에 정면으로 배치되는 증거다. 성인이란 최소한 자신을 둘러썬 사회 현상을 적극적으로 관찰하여 생각하고 행동하는, 그리고 그 결과까지도 책임질 수 있는 사람을 의미하니까.

'투쟁이라는 것이 과연 필요하고 정당한 것인가? 대학생들이 단지 순수하다는 이유로 기성세대에 대해 맹목적으로 반항하는 것은 아닐까? 저럴 시간에 학과 공부나 영어 공부하는 게 더 낫지 않나? 총학생회장단의 삭발이 우상이 되는 건 아닐까? 학생들이 요구하는 3년 간의 결산 자료를 학교측이 공개한다고 해도 그 자료를 신뢰할 수 있을까? 이것은 근본적으로 상호 불신의 문제일 텐데. 더 좋은 방법이 없을까? 진심으로 투쟁하는 선배들을 보면서 적극적으로 동참하지 않는 나는 비겁하고 이기적인 존재가 아닐까?'

'어휴~ 복잡해. 에라 모르겠다. 어차피 내가 고민한다고 해서 해결될 일도 아니니 가만히 보고나 있자. 투쟁이 실패해도 나는 손해 볼 것 없고, 또 성공한다면 그냥 얻는 이득이니까.' 그리고 이어지는 일상의 대화. "어제 미팅 어땠어? 애프터는 받았냐? 너 오늘 화장발 짱이다. 영어 숙제 어디까지야?"

1학년 때는 놀아도 된다는 선배들의 말에 따라 열심히 미팅을 하고 꾸미기에 바쁘다. 지금이 7, 80년대도 아닌데 사회비판 같은 무거운 생각들을 굳이 할 필요가 있을까 싶기도 하다. 그러나 우리의 인식이 지극히 개인적인 영역에 국한되어 있는 것은 경계해야 한다. 모두가 투쟁에 발벗고 나서자는 이야기가 아니다. 대학이라는 사회에서 우리가 접할 수 있는 많은 일들을 유심히 보고 몸으로 부딪혀가며 세상을 보는 법을 만들어가는 일을 해야 한다는 이야기를 하고 싶다. 자기 자신을 활짝 열고 다가오는 또다른 세상에 당당히 맞서는 배짱을 갖자. 지금까지의 단단한 세계를 파괴하는 것은 용기가 필요한 일이다.

자유와 낭만을 기대하며 대학에 왔지만 막상 우리가 책임져야 할 것들이 너무 많다. 그러나 나는마치 강한 태양빛에 작아진 동공으로 무기력하게 세상을 응시하는 고양이처럼 보인다. 그러나 '내던져진' 우리는 스스로 일어서야 한다. 어느 책에서 본 글귀 하나. "내가 진정 원하는 것은 남에게 보여지는 '나'가 아닌, 나를 맘껏 꺼내 나 자신에게 당당하게 펼치는 '나'가 되는 것. 또, 타인을 배려할 줄 아는 넉넉한 주관 속에서 스스로를 책임지는 자유와 자연스러움을 갖는 것". 하나의 세계를 파괴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러나 알에서 빠져 나오면 새가 되어 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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