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로 3가 피카디리 극장에 나란히 걸린 <박하사탕>과 <철도원>의 기차는 반대 방향으로 달린다. <박하사탕>의 기차는 햇빛 가득한 풍경을 거꾸로 지나치며 시간을 되돌린다. <철도원>에서는 내내 눈이 내린다. 희다 못해 파르스름한 눈발 사이로 기차가 달린다. 시간축은 수시로 엇갈리고 기차는 앞으로만 내달린다. 영화의 마지막, 호로마이 역장 오토마츠의 관을 싣고서도 기차는 여전히 앞으로 달린다.

지난해 일본에서 흥행 1순위를 기록하고 한국에서 2월 4일 개봉한 이 영화는 22일 현재 서울관객 18만 명을 동원했다. 시사회 때부터 차근차근 입소문이 난 <철도원> 공식 홈페이지의 게시판 글은 한 달 사이에 900건이 넘었다. 담백하고 아름다운 영상에 호평이 쏟아지는가 하면 '너무나 일본적'인 내용에 거부감을 나타내기도 한다. 하지만 "가장 한국적인 것이 가장 세계적인 것"이라는 한국문화의 캐치프레이즈를 떠올리면 거부감 섞인 비난은 오히려 칭찬이 된다.

영화의 원작인 아사다 지로의 단편집 <철도원>은 일본에서 140만부가 넘게 팔린 베스트 셀러. 97년 '일본 문학 최고의 엔터테인먼트' 나오키 상을 수상했다. 여덟 편의 단편 중 <철도원>과 <러브레터>는 영화로, <츠노하즈에서>와 <백중맞이>는 텔레비전 드라마로 만들어지는 등 나오키 상 제정 이래, 또 단일 작품집 중에서 가장 많은 작품이 영상화되는 기록을 세웠다.

일본에서나 한국에서나 <철도원>을 보고 눈물을 흘리는 사람들의 공감대는 잃어 가는 것에 대한 그리움이다. 한때 탄광 노선으로 크게 번성했지만 이제는 곧 폐선될 호로마이 선의 종착역 호로마이, 그 역장 오토마츠. 진부한 표현으로, 곧 정년 퇴임을 앞둔 그는 뼛속까지 철도원인 사람이다. 아는 것이라곤 삽자루로 맞아가며 어깨 너머로 배운 기차 일이 전부인 철도원. 그는 호로마이 역이 없어지면 자기와 함께 터미널 빌딩 간부로 들어가자는 친구의 억지 섞인 부탁을 고집스레 외면한다. "철도 말고는 내가 아는 게 뭐 있어야지."

천직으로 생각하는 철도원이지만 그 직업으로 인해 잃어야 할 것이 그에게는 많았다. 마흔 줄에 어렵게 얻은 딸아이는 태어난 지 두 달만에 찬바람을 못 이겨 죽었고, 언제나 밝게 웃던 아내는 몇 년 전 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가족들의 무덤 앞에서 동료 철도원들이 부르는 '철도원의 노래'를 들으며 그는 눈물을 흘릴 수 없었다. "슬플 때는 울음 대신 기적 소리를" 내뿜는 그는 철도원이기 때문에.

그는 아까운 나이에 땅 속에 묻힌 딸을 언제나 생각했다. 지금쯤이면 초등학교에 다녔을 텐데. 이젠 고등학교 교복을 입을 나이가 됐겠다. 제 엄마를 닮아 예쁘게 컸을 테지. 기차역에서 시내에서 또래 아이들이나 옷가지를 볼 때면 참을 수 없이 그리워지기도 한다. 그러나 그런 마음들을 드러내지는 않는다. 그는 철도원이니까. 차디찬 시체가 된 아기도 역사에 서서 깃발 흔들며 맞아야 했던 그는 어쩔 수 없는 철도원이므로.

어느 날, 생의 마지막 날 딸이 찾아온다. 오후에는 유치원 아이의 모습으로, 밤에는 머리를 땋은 초등학생, 다음날 저녁엔 교복을 곱게 입은 고등학생. 설이라 놀러온 이웃집 손녀딸 자매로 오해하는 아버지에게 유키코는 그저 웃어 보일 뿐이다. 유키코는 아빠에게 뽀뽀도 하고, 이야기도 나누고, 나란히 앉아 웃기도 한다. 된장찌개를 끓여 소담한 밥상도 차려낸다. 이웃 지주의 안부 전화로 이 여자아이가 이웃집 손녀가 아니란 것을 알게 된 오토마츠는 돌아서서 직감적으로 묻는다. "유코?"

다음날 새벽 첫기차를 몰고 온 기관장이 역사에 쓰러져 있는 오토마츠를 발견한다. 한 손에는 깃발을 들고, 모자와 복장을 단정히 갖춘 모습이다. 45년 동안 호로마이 역을 지켜온, 역을 떠날 수 없다던 그는 그렇게 기차와 함께 숨을 거두었다.

영화는 처음부터 끝까지 아름답다. 시종 눈이 흩날리는 배경도 그렇고, 마음이 따뜻한 사람들도 그렇다. 진짜가 아니라서, 영화라서 그렇게 보이는 걸까? 아니다. 영화가 끝나고 시간이 지날수록 곰곰이 되새겨 보는 한 마디는, 삶은 아름다운 것. 아름답지 않은 순간에도 삶은 아름답다. 먼 훗날 언젠가 돌아보면.

영화의 마지막에는 힘차게 달려가는 오토마츠의 기차와 시야 가득 채워오는 흰 눈을 배경으로 짤막한 글이 흘렀다. 자막의 끝까지 기억하는 분이 있으십니까?

그리우면 만나러 가야 한다.
저 산을 넘어
그리운 사람을 만나러 가야 한다.

슬퍼지면 여행을 떠나야 한다…….

조혜원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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