잔머리는 굴리지 않는다. 감정도 노골적으로 표현한다. 그의 글에는 가면은 없다. 가면무도회에서 언죽번죽 가면쓴 사람을 되술래잡는다. 혹자는 흰소리 내뱉지 말라며 사박스레 뜸베질이다. 억울한 치도곤에도 곰비임비 목곧이를 자처한다. 그의 매력이다.

'수습기자로 언론에 발을 들여놓은 1984년에 <1984년>을 다시 읽었다. 푸른 오월을 핏빛으로 학살한 전두환 정권이 '민주정의당'을 자처하던 혹한의 계절이었다. 언론 또한 단 한 줄도 학살의 진상을 보도하지 않았던  그 시절 <1984년>은 단순한 소설이 아니었다. 적어도 그에게 <1984년>은 온전히 1984년이었다.'(손석춘, 여론읽기 혁명, p.293)

80년 언론통폐합 때 비판적 언론마저 권력 앞에 고개를 숙이는 모습을 보고 언론사에 몸담게 되었다는 손석춘. 그의 여론읽기는 막힌 물꼬를 터 여론이 물처럼 흐르는 세상을 흐르는 세상을 꿈꾼다. 잿빛 여론읽기가 아니라 짙푸른 '여론 혁명'이야말로 저자의 여론읽기가 궁극적으로 걸어가려는 길이란다. 비판은 언제나 그러하듯 '비판의 무기'를 넘어 '무기의 비판'을 꿈꾼다. 꿈꾸는 자에게만 내일이 존재한다면 더욱 그렇다.

그가 꿈을 꾸어서일까? 글이 살아 움직인다. '나 살려줘'하며 펄떡이는 물고기와 같이, 냇물에서 발가벗고 첨벙이는 어린아이같이 힘차다. 그리고 때묻지 않았다. 무엇보다 그가 '점잖치 못한' 까닭이다. 화끈하게 드러낸다. 추상적으로 얼렁뚱땅 넘어가는 법이 없다.

"문제는 독자들이 개혁을 촉구하면 자성할 섟에 뜸베질인 신문권력에 있다. 분명히 해두자. 탈세를 밝힌 국세청장의 투기가 드러났다고 해서 신문사주의 죄가 면죄부를 얻는 것은 아니다.  공직자의 큰 재산은 비판받아 마땅하다. 재산형성 의혹을 파헤친 신문의 날카로운 칼날도 예찬할 만한다. 다만 그 잣대에서 자신도 예외일 수 없다. 조선.중앙.동아의 사주는 몰론 고위간부 가운데 재산형성에서 투기나 '촌지' 의혹이 없는 이는 과연 몇이나 될까. 정녕 '도깨비'를 사귀지 않았다면, 공개하라. 공직자가 재산을 밝히듯이 사주.주필.논설주간.편집국장 스스로 곳간을 열어라..."
                                                  -한겨레 2001년 10월 4일자 "누가 누굴 개혁하나" 중에서-

손씨는 언론계의 '침묵의 카르텔'에 일침을 가한다. 그 뿐인가. 그의 화살은 윤똑똑이들을 비롯하여 이회창, 수구언론, 국가보안법, 자본주의, 미국, 반통일세력도 과년으로 삼는다. 386세대, 노동자, 운동권 학생들, 언론개혁, 통일은 기쁨과 희망으로 그려진다. 강준만은 그의 저서 '인물과 사상'에서 변형된 객관주의를 실천하는 저널리즘 글쓰기를 비판한다. '저널리즘 글쓰기의 기본은 자기를 감추는 것이며, 그 누구로부터도 큰 반발을 받지 않게끔 일반화와 추상의 기교를 부리는 것이다. 우리 시대의 저널리즘은 기본적으로 토론과 논쟁을 배제하는 글쓰기를 미덕으로 삼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손씨는 '비저널리즘적인 너무도 비저널리즘적인 글쓰기'를 하고 있는게다. 이쯤되면 손석춘, 그의 글쓰기 방식이 궁금하지 않은가.

'매체는 메시지'라는 마샬 맥루한의 주장은 매우 유효하다. 글은 내용을 지배하는 도구이다. 즉, 형식이 내용을 얼마든지 지배할 수 있다는 말이다. 필자는 그의 글쓰기 형식을 '대자보 쓰기'라 이름하고 싶다. 그가 대자보를 어떻게 장식하는지 보도록 하자.

그는 '빠른 호흡의 스타카토 필법'으로 독자를 몰아간다. 이리저리 생각할 여유를 주지 않는다. 독자는 손씨의 논리에 마냥 이끌려간다. 손씨는 한문장에서 30글자를 넘기지 않는다. (우리나라 문장가들은 독이성을 위해 한 문장 안에 50자를 넘지 않게 쓰라고 권한다.) 15글자 이내의 문장이 반 이상이다. 복합문은 찾아보기 힘들다. 접속어도 최소화한다. 대신 '그렇다.', '아니다.', '그래서일까.' 등 자기주장에 장단을 맞추는 추임새의 사용이 잦다.

그랬다. 그 해 오늘이다. 1972년 10월 17일. 겨울공화국은 우리를 기습했다. 헌정 파괴였다. 더 큰 충격은 한달 뒤에 왔다. 사실상 총통제를 만든 유신헌법이 투표율 91.9%, 찬성률 91%로 통과됐다. 우매한 국민의 선택이었을까. 아니다. 찬성으로 여론을 몰아간 주범이 있다. 언론이다. 선포에서 투표까지 한달 내내였다. 신문과 방송은 줄지어 유신찬가를 읊어댔다. 선포 바로 다음날 (조선일보)는 '기쁨'으로 반긴다. "앞으로의 영광스러운 삶을 얻기 위하여"란다. 같은 날 "대통령의 충정을 충분히 이해'한 (중앙일보)는 "국민은 경거망동을 삼가라"고 경고한다. 국민을 상대로 집단 세뇌가 이어졌다.
                                                                                         -한겨레 2001년 10월 17일-

또한 자극적이다. 학내에 걸려있는 그 어느 대자보 이상으로. '사뭇 근엄한 한국언론의 썩어 문드러진 몸이 벌거벗고 있다.', '두부처럼 잘려나간 어여쁜 젖가슴이 증언하듯 그 날의 핏빛 학살은 엄연한 현실이다.' 이같이 강한 이미지 표현은 독자의 말초신경을 자극한다. 동시에 '∼해라, ∼하자'식의 명령형과 촉구형, 그리고 '∼가 아닌가' 하며 독자의 동의를 구한다.'함께' 하자고 꼬드긴다. 그의 단호하고도 끈질긴 제의에 독자는 반신반의 하면서도 그에게 강한 정서적 유대감과 동지의식을 가지게 된다.

과장일까. 아니다. 가령 구조조정을 앞두고 동료들과 벌이는 '살아남기 경쟁'은 약육강식이 아니던가. 두 아이의 고사리 손을 움켜쥐고 가을바다로 몸을 던진 30대 가장의 가슴은 어떤 빛깔이었을까...책임은 누구에게 있을까. 과연 노동자 탓일까. 전혀 아니지 않은가...마지막 당부다. 여론 앞에 성실하라.
                                                                                       -한겨레 2000년 11월 13일자-

우리 민중에게 돌아갈 청산은 없다. 흙먼지 휘날리는 현실만이 있을 뿐이다. 가슴 깊이 묻어두어 청동빛 이끼가 끼어가는 '무기'를 이제는 꺼낼 때다. 반민중적 보도를 일삼아온 언론권력에 민중의 힘을 보여줄 때다. 얄리얄리 얄라셩 얄라리 얄라
                                                                                        - 한겨레 2001년 3월 19일자-

그의 대자보가 여느 대자보와 다른 무엇인가가 있다면 생소한 우리말 사용일 게다. 그가 게제하고 있는 <손석춘의 여론읽기>를 보려면 튼실한 국어사전 하나쯤은 기본이다. 그는 아내를 '사름'이라 부른다. 사름이란? 모낸 지 4,5일 후에 모가 완전히 뿌리를 내려 푸른 빛을 생생하게 띤 상태를 말한다. 본명이냐 했더니 가명이란다. 대학 시절 연애편지를 쓰느라 문학에 심취했나? 아니라고 했다. 문학에 대한 열정은 대학시절 강했지만 학생운동으로 접었다. 그 때 국어사전을 처음부터 끝까지 통독했다는 손씨. '뜸베질, 몽니를 부린다, 몽따고 있다, 어리보기, 초꼬슴, 지분거리다, 윤똑똑이, 무릿매, 불쏘시개, 벗바리, 곰비임비, 모르쇠, 밑절미, 깜냥, 생뚱맞다...' 찬밥처지 단어들에게 자비로움을 베푸사, 그들에게 세상의 빛을 보여준다. 그게 보답이라도 하듯, 단어들은 그의 감정을 뚝뚝 담아낸다. 읽는 이의 입가에 게슴츠레한 웃음이 번질 수 밖에. '언어유희'를 즐기는 천진난만한 그의 모습이 천진난만하다. 그러나 모를 일이다. 그것이 '겨레얼'을 잃지 않으려는 그의 몸부림일지도.

'당신 돈키호테야?' 혹은 '몽상가'라 한다. 그를 향한 비판의 소리도 적지 않다. 그러나 필자는 그 누구의 이념적 색채를 가지고 시비할 생각이 없다. 다양한 사람이 있으니 다양한 생각이 있는 게 당연지사다. 각기 제 색깔을 가지고, 자신들의 계층과 이념을 대변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까닭이다. 필자는 손석춘의 '글쓰기 컬러'에 주목한다. 익명의 대자보가 실명의 신문지상에 올려졌다. 공격적이고 직설적이다. 그곳에 손석춘이 한자리하고 있다, 묻혀져 있던 것들이 세상으로 나오게 되면서 일어날 수 있는 여러 가능성들을 기대해 본다. 그의 주장에 '대안이 있다, 없다.'는 그 다음 문제이다. 그만의 컬러가 묻어나는 칼럼을 기다리며 글을 마친다. 대한민국의 '살얼음 같은 풍경화'가 봄볕에 소록소록 노는 날, 그의 젖은 눈은 슴벅이리라.  

임지은 객원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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