늦가을의 쌀쌀함이 옷 깊숙이 파고들어 몸이 절로 움츠러들었다. 약속시간보다 20여 분 일찍 온 탓인지 동네에 도착해서 다시 연락하라던 그녀는 전화를 하자 당황하는 기색이었다. 번거롭게 하고 싶지 않은 마음에 혼자서도 길을 잘 찾을 수 있다고 말했건만 그녀가 끝까지 사양하던 이유를 그제서야 알 것 같았다. 전화로 알려주는 간판을 보면서 겨우 도착한 약속 장소. 그녀를 기다리면서 걸어온 구불구불한 골목길을 돌아보니, 어떻게 되돌아 가나 은근히 걱정이 됐다. 멀리 한 여자가 이쪽을 향해 열심히 손을 흔드는 모습이 보였다.

그녀의 이름은 유명옥(35). 흔히 말하는 무녀다. 황토색 몸뻬 바지에 질끈 묶어 핀으로 고정시킨 머리가 매우 서둘렀음을 보여주지만 그 와중에도 깔끔하게 화장을 해서 손님 맞는 예의를 다하려는 듯 했다. 엷은 속쌍꺼풀이 진 작은 눈은 약간만 옆으로 돌리면 이내 날카로워진다. 그러나 웃을 때는 얼굴 전체가 보름달같이 둥글어져 눈과 입, 그리고 코까지 웃는 것처럼 보였다.

형형색색의 종이로 꾸며져 있고 신상이 놓인 제단이 있지 않을까 겁먹었던 나는 집에 들어서는 순간 놀라고 말았다. 가스렌지 위엔 은색 주전자가 올려져 있고 잘 말려 놓은 파스텔톤 꽃다발들이 벽면에 가지런히 걸려있었다. 또 그녀가 두르고 있는 앞치마에는 유행하는 캐릭터 테디베어가 그려져 있고 테이블 위의 열쇠고리에는 스티커 사진이 예쁘게 붙어 있었다. 전통적 양식이라고는 그녀가 차를 담아 내 온 찻잔, 그리고 5개의 흰 항아리와 '소원성취'라고 적힌 2개의 촛대가 놓인 작은 제단 뿐이었다.

은은한 붉은 빛이 도는 감잎차를 권하며 말을 시작한 유씨는 순탄치 않은 삶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전혀 어두운 기색이 없었다. 이미 과거가 정리된 것일까. 무녀가 되기 전 그녀는 경희호텔전문대를 수석 입학하고 후에 독일문화원과 한국외국어대학교 외국어연수원 과정을 거쳐 독일인 회사에 취직했다. 그러나 특별한 일을 하고 싶다는 생각에 촉망 받는 대리를 그만두고 제과·제빵 기술을 배우기 시작했다.

어릴 때부터 이유없이 시름시름 앓기도 하고 꿈의 일이 현실로 나타나 의아해 하기도 했던 유씨는 나이가 들어 결혼 택일을 위해 찾아간 한 박수에게서 신이 내렸다는 말을 들었다. 그 후 여러 무속인들을 찾아가 같은 말을 듣고서도 설마 하던 그녀는 우연히 모 방송국의 다큐프로를 보게 되었다. 우리나라 최고의 무당으로 꼽히는 김금화(68·중요무형문화재 제82호) 만신을 특집으로 다룬 것이었다. 유씨는 그 길로 무작정 김금화 만신을 찾아갔고, 김씨는 그녀를 보자 대뜸 "니가 내 자리에 앉아야겠다"며 자신에게서 내림굿 받기를 권했다. 유씨는 피할 수 없는 것이라는 생각과 함께, 유명한 만신으로부터 그런 이야기를 들으니 마음이 뿌듯하더라며 웃었다. 97년, 유씨는 김금화씨로부터 내림굿을 받아 신딸이 됨으로써 무녀의 길을 걷게 되었다. 결국 그녀는 특별한 삶을 살게 된 것이다.

현재 유씨는 모악산 산신님을 몸주신으로 모시고 있다. 그러나 만신이 되기 전 그녀는 독실한 기독교인이었다. 무속인의 길로 들어선 후, 사람들은 그녀를 이해하지만 그녀의 생활을 수용하지는 않았다고 한다. 그러나 신념의 차이를 떠나 그녀는 모든 만남을 중요하게 생각했다. 유씨는 주위 사람들을 "굉장한 방해꾼인 동시에 지지자"라고 말하며 탁자 위의 사진에 눈길을 주었다.

만신이 된 후 주변 사람들의 미래부터 보기 시작했는데, 그녀는 개인적으로 점 보는 것을 좋게 생각하지 않았다. 사람들은 샤머니즘을 미신이나 주술로 생각하면서도 자력으로 해결하지 못하는 문제가 생길 경우 무속에 의지하는 경향이 있다. (유씨는 이 경향을 모태로의 회귀본능과도 같다고 했다.) 그러나 유씨는, 점은 단지 문화거울로서 존재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녀는 지금 첫 자서전 <애기무당 타지마할(가제)> 준비에 한창이다. 무녀가 되기 전의 이야기와 무녀가 된 후 샤머니즘에 대한 자신의 입장을 정리한 책이라고. 그녀는 자신의 저서에서 무엇을 말하고 싶은 걸까. "네오 샤머니즘이죠." 2권의 책으로 낼 예정이라기에 망설일 법도 한데, 유씨는 거침없이 대답했다.

그녀는 샤머니즘을 하나의 종교라고 생각했다. 굿과 점만이 샤머니즘의 전부가 아니다. 그녀가 지향하는 것은 사회와 실생활에 도움이 되게 고도의 테크닉으로 운용되는 '네오 샤머니즘'이다. 과거 점과 굿 등의 신기로 사람들의 공감을 이끌어 내는 것은 신어머니(그녀는 김금화씨를 신어머니라 불렀다) 세대로 끝나고, 이제는 샤머니즘의 과학화를 위해 노력해야 할 때라고 강조했다. 그래서 유씨는 컴퓨터를 이용해 자료를 정리하고 샤머니즘의 체계화를 위한 학문적 접근을 시도하고 있다. 그 과정의 하나로 빠르면 내년 3월, 늦으면 9월쯤 독일로 유학을 갈 계획이라고. "전통적인 것을 부정하지는 않아요. 현대적인 것과 병행되어야 한다고 생각하되, 현대적인 요소가 덜 발달되어서 제가 주력하는 것 뿐이죠."

그녀는 옷걸이에 걸린 한복 두 벌을 가리키며 자신이 디자인한 것이라고 말했다. 기존의 생활한복과 달라 살펴보니, 사람들에게 편하게 다가가기 위한 이미지 만들기 차원에서 조선시대의 직선배래와 고려시대의 긴배래를 복합한 새로운 형태의 생활한복을 만들었다고 했다. 가끔 친구들이 한복을 탐내 빌려가기도 한다고.

몇 통의 전화가 걸려 왔는데, 전화 받는 그녀의 말투가 제법 거칠어졌다. 곧이어 조각가 친구 한 분이 집에 찾아왔다. 그녀의 인터뷰에 방해가 될까봐 구석에서 조용히 듣고만 있던 남희씨는, 유씨가 간만에 온 손님을 대접한다고 부엌에서 수선을 떠는 사이 웃으며 말했다. "타지마할이 뻥빨이 좀 세죠?" 웬만큼 친하지 않고서는 그런 말을 하지 못할 것 같은데, 둘 사이에 오가는 말이 꽤 거친 것으로 보아 허물없는 친구지간이 분명했다. 클래식 음악이 집안 가득히 울려 퍼지는 가운데 음식 준비로 흥얼거리는 그녀의 모습을 보자니 절로 웃음이 나왔다.

많은 종교 전문가들이 샤머니즘의 체계화에 노력하고 있지만 접신이 불가능하다. 그런 한계를 자신의 연구가 뒷받침 해줄 수 있을 것이라며 유씨는 강한 자신감을 보였다. 그녀는 암흑 속에서 모든 것을 버리고 봉사해야 하는 소명을 좀더 발전적 형태로 변화시키고 있었다. 미신과 주술의 영역으로 인식되는 샤머니즘을 기독교의 성경과 같은 경전으로 체계화해서 한국인에게 맞는 종교로 만들어야 한다는 그녀. 더불어 훌륭한 제자를 양성하고 힘이 닿는 대로 책을 내고 싶다고 했다.

샤머니즘의 르네상스를 꿈꾸며 전통에 새 깃대를 세우겠다고 말하는 그녀의 눈이 반짝였다. 친구 남씨가 얘기하듯 만신 유명옥, 그녀는 언제나 즐거운 무당 타지마할이었다.

이유진 객원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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