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어령 이화여대 명예교수

자장면과 스파게티를 합쳐 '짜파게티'라는 인스턴트 식품이 등장한 적이 있다. 자장면은 중국음식이고 스파게티는 이탈리아 음식이다. 그러나 스파게티의 역사를 살펴보면 결코 그것이 이탈리아의, 더구나 서양의 고유 음식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다 아다시피 서양의 면(麵) 문화는 마르코 폴로에서 비롯된 것으로, 그 고향은 중국이다. 거기에 그 주류를 이루는 스파게티의 토마토 소스는 남미의 산물이다. 그러고 보면 이탈리아를 상징하는 스파게티에서는 막상 이탈리아 문화가 보이지 않는 아이러니가 있다.

그러나 스파게티는 역시 이탈리아의 맛이요, 서양문화가 키운 요리다. 스파게티가 같은 면문화이면서도 우리의 국수와 본질적으로 다른 것은 국물이 없다는 점이다. 그렇기 때문에 스파게티를 담는 그릇은 접시다.

우리는 스파게티처럼 국물이 없는 면 요리인 자장면도 국물 있는 음식을 먹을 때처럼 사발에 담아 젓가락으로 먹는다. 그러나 같은 면이라도 스파게티를 먹을 때는 육식을 할 때처럼 포크를 사용하는 것이다.

국수와 스파게티

사람이 살고 있는 이 세상에는 수백, 수천의 요리와 제각기 다른 맛들이 있지만 그것을 차이 나게 하고 체계화하는 것은 그 요리의 소재나 맛보다 그것을 담고 먹는 방법에 의해 결정된다. 이러한 음식문화의 본질을 가장 먼저 꿰뚫어본 사람은 이솝이었다.

심술궂은 여우가 황새를 초대해 놓고 모든 음식을 납작한 접시에 담아 내놓는다. 황새는 부리가 길어 접시에 담긴 음식을 보기만 하고 여우 혼자 그것을 다 먹어치운다. 앙갚음을 하기 위해 이번에는 황새가 여우를 초대한다. 그러고는 모든 음식을 병처럼 목이 좁은 항아리 속에 담아 내놓는다. 황새는 긴 부리로 음식을 찍어 먹을 수 있었지만 여우는 구경만 할 수밖에 없었다.

이 우화에서 보듯 모든 음식은 접시에 담는 여우형 음식과 항아리에 담는 황새형 음식의 대립항으로 나눌 수 있다. 서양 사람들은 스파게티를 포크로 돌돌 말아 고기처럼 덩어리를 만들어 먹는다. 선이 입체로 바뀐다. 같은 면이라도 서양음식은 대개 접시에 담는 여우형 음식으로, 국물이 없다. 그러나 한국의 음식은 황새형으로, 항아리처럼 움푹 팬 사발에 담는 음식이 주종을 이룬다. 국물이 많기 때문이다.

여러 사람들이 지적하듯 한국음식의 특성은 탕이다. 그런데 이 탕문화를 기호학적으로 말하면 탈(脫) 코드적 음식이라고 할 수 있다. 탕은 국과 밥의 혼합으로, 유동식과 고체식의 경계를 파괴한 음식이기 때문이다. 탕뿐만 아니라 한국의 음식에는 거의 예외 없이 국물이 있다.

우리의 김칟깍두기에 해당하는 일본의 '오싱꼬'와 '다꽝'(단무지)에는 물기가 전혀 없다. 없는 것이 아니라 국물을 씻어내고 건더기만 남긴다. 우리의 경우에는 발효 과정에서 국물이 생기면 그것을 버리지 않고 오히려 그 국물 맛을 이용해 맛을 살린다.

불필요한 것, 부수적인 것, 잉여적인 것을 제거하지 않고 포섭한다. 그렇기 때문에 국물김치가 아니라도 김칟깍두기에는 국물이 꼭 따르게 마련이다. 무엇보다 "국물도 없다"는 말이 욕으로 쓰이는 것을 보더라도 한국인의 '국물문화'가 어떤 것인지 짐작할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같은 젓가락문화권에 속해 있으면서도 유독 한국만이 젓가락과 함께 숟가락을 겸용하는 이른바 '수저문화'의 특성을 만들어 내게 된 것이다. 수저란 숟가락과 젓가락을 한데 묶은 복합어인 것이다.

밥과 국, 건더기와 국물이 함께 뒤섞여 있는 탈 코드의 음식문화는 바로 음식이라는 말 그 자체 속에도 들어 있다. 음식의 음(飮)은 마시는 것이고 식(食)은 먹는 것이다. 같은 한자 용어를 많이 쓰는 일본에서는 음식이라는 말을 쓰지 않는다.

그들은 음식을 '다베(食)모노(物)'라고 부른다. 말만 아니라 역시 국물을 떠 먹는 숟가락도 없다.

국물은 숟가락으로 떠 마시고 건더기는 젓가락으로 집어 먹는다. '음'이 음(陰)이라면 '식'은 양(陽)인 셈이다. 숟가락이 음이라면 젓가락은 양이다. 존재하는 모든 것에는 빛과 그늘이 있다. 그것처럼 음식의 국물은 음식의 그늘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음식의 탈 코드화로 한국에서는 도시락이 발달할 수 없었다. 아마 70대가 넘은 사람들이라면 도시락을 싸 들고 학교를 다니다 그 반찬 국물에 공책은 물론이고 책보까지 흥건하게 젖었던 난감한 기억을 갖고 있을 것이다.

바로 이 국물 때문에 한국은 물론이고 동양에서는 패스트푸드나 인스턴트 음식산업이 어려워진다. 이 분야에서 세계를 제패한 미국의 맥도널드 햄버거는 철저하게 국물을 배제한 서양음식의 특성에서 비롯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패스트푸드의 감초라고 할 수 있는 감자튀김 역시 물기가 많은 한국의 감자로는 제 맛을 내지 못한다고 한다. 이 바삭바삭한 음식 맛, 그 접시음식 맛은 싸 가지고 다니거나 즉석에서 만들어 먹기에 알맞다.

포스트모던 시대의 국물문화 발상법

정보이론에서는 국물을 노이즈(잡음)라고 한다. 서구문화와 문명 그리고 모든 이념을 한 마디로 요약한다면 국물 없애기(미각문화), 그림자 없애기(시각문화), 노이즈 없애기(청각문화)라고 할 수 있다. 이를테면 스파게티처럼 면에서 물기를 제거하는 요리술이었다고 할 수 있다.

노이즈가 없어야 접시에 그 음식을 담을 수 있는 것이다. 서양 음악의 기저를 이루어 온 것은 음악으로부터 노이즈를 제거하는 작업이었고 악기의 발전이란 철저하게 노이즈를 방지하는 기술에서 이루어져 왔다.

그러나 한국의 음악은 노이즈를 제거하지 않고 오히려 그것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여 음악의 일부로 그 맛으로 이용하는 데 그 특성이 있다고 할 것이다. 창에서는 쉰 듯한 목소리의 탁성(濁聲))이 그리고 가야금에서는 여운을 흔들어 주는 농현이 그렇다.

듣는 쪽도 마찬가지다. 서양음악이 연주될 때는 관중은 기침 한 번 없이 숨을 죽이고 앉아 있다. 그러나 우리의 음악은 정반대로 연주 도중에 추임새를 던지기도 하고, 창을 하는 사람이 고수와 농을 하기도 한다. 노이즈를 끌어들이는 것이 연희 형식의 하나로 되어 있다.

악기도 그렇다. 우리 악기의 상징이라고 할 수 있는 장구는 모양도, 소리도 기하학적 대칭형에서 벗어나 있다. 보기에는 좌우가 같은 것처럼 보이지만 그 크기와 울리는 소리가 각기 다르게 되어 있다. 손으로 치는 왼쪽은 말가죽이고 채로 치는 오른쪽은 쇠가죽으로 되어 있기 때문이다.

북에는 으레 양면이 있게 마련인데 장구처럼 그것이 서로 다른 소리를 내게 돼 있는 것은 아마 장구밖에 없을 것이다. 가죽만 다른 것이 아니라 치는 법도 다르다. 한쪽은 채로, 또 한쪽은 손으로 쳐 그 울림에 국물(노이즈)을 섞는다.

그래서 장구는 귀로 먹고 마시는 탕이며, 그 양면을 치는 것은 수저의 역할과도 같다. 흔히 서양음악은 맥박이요, 우리의 국악은 호흡이라고 하는 것도 이러한 관점에서 보면 쉽게 이해된다.

'버섯' 다음에 오는 '음악'

포스트 모더니즘의 시조인 존 케이지(John Cage)는 음악을 노이즈로 펼처간 작곡가로 유명하다. "전통적 음악 이론은 페쇄적인 악음에 관한 연쇄적 규칙으로 이루어져 있어 잡음에 대해서는 아무 것도 말하지 않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케이지가 필요로 하는 것은 '잡음이나 잡음의 비합법성에 토대를 둔 음악'이었다.

구체적으로 그 잡음(노이즈)을 먹는 것으로 표현하면 케이지의 그 유명한 버섯이 된다. 케이지는 "대부분의 영어사전에서 버섯(mushroom)은 음악(music) 앞에 나온다"는 것이다.

버섯과 음악의 이와 같은 관계는 우연한 알파벳 순서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그러나 생각해 보라. 시골 쥐를 쫓은 잡음이야말로 우연한 것 아니었는가. 노이즈는 우연의 요소이며 하나의 시스템이나 질서를 별개의 것으로 변형해 주는 힘이었다는 것을 우리는 이미 세르의 경우에서 읽었다.

실제로 케이지는 작곡이나 연주상의 혁신에서 우발성이나 불확정성을 도입하는 방법을 많이 쓴다. 버섯은 고목나무나 부식물 위에 기생하는 균류(菌類)다. 버섯은 먹을 수도 있고 독이 있어 인간의 목숨을 앗아가기도 한다. 그것은 먹이의 노이즈인 셈이다. 또한 버섯은 잡음과 마찬가지로 '결정불능의 것'이다.

자신이 뉴욕버섯학회의 창시자이기도 한 케이지는 "버섯에 대해 알면 알수록 그것을 식별하는 자신감(自信感)이 흐려진다. 하나하나가 모두 다르기 때문이다. 모든 버섯은 각자가 다 독창적인 것이며 자기가 그 중심이다. 버섯의 전문가란 있을 수 없다.

버섯은 언제나 인간의 지식을 배반한다"고 말했다. 같은 버섯인데도 어느 사람이 먹으면 괜찮은 것이 다른 사람이 먹으면 죽는 수도 있다. 우연과 끝없는 변화를 일으키는 이 기생식물을 포스트 모던의 이론가인 그레고리 얼머는 데리다의 파르마콩과 어깨동무시키고 있다. 케이지의 버섯은 독약이기도 하고 동시에 만능약이기도 한 파르마콩의 식물판이기도 한 것이다.

그것은 "이미 철학적 대립 체계 가운데 포함시킬 수 없는 것이면서도 그 대립 속에 살면서 그것에 저항하고 그 질서를 혼란스럽게 하는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그것은 어떤 제3의 것을 구성하지도 않는 것이다."

잡음이 그러했듯 버섯은 진리가 아니라 변화를 상징한다. 끝없이 어떤 체계를 중단하고 탈구축하는 힘이다. 궁극적으로 이 결정 불능의 기생물은 경쟁의 종언과 협력에 관한 공생의 테마를 낳는다. 나무는 그 뿌리 사이에서 자라는 버섯으로부터, 즉 버섯이 담당한 분해 과정의 결과 용해된 양분을 흡수하는 방식으로 이익을 얻는다. 나무와 버섯은 공생하는 것이다.

버섯의 그 분해 작용은 때로는 술이나 빵을 만들 때 이용되는 발효 작용으로 공생적인 관계가 이루어지고 그 생존은 지속되어 간다. 서구의 낡은 사고 체계와 붕괴해 가는 산업문명의 폐허는 버섯에 의해 해체되고, 지속되고, 거듭나는 것이다.

한국의 식객문화

세르의 파라지트(기생충, 잡음)나 케이지의 버섯 이론에 대해 우리는 결코 주눅들어서는 안 된다. 이미 우리는 포스트 모던화의 몸부림이 아니라 전통적인 생활을 통해 그 기생의 연쇄와 잡음의 효용을 살아 왔기 때문이다.

모든 음식물에 부수되는 파라지트는 그 음식의 국물이라는 것과, '국물도 없다'는 말이 욕이 되는 한국인의 의식은 이미 살펴본 대로다. 세르의 '기식 연쇄의 세계 시스템'은 이론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에게는 하나의 생활 문화 자체의 체계 속에서 숨쉬어 왔던 것이다.

식객문화라는 것이 바로 그렇다. 3,000명의 식객을 거느린 맹상군이 아니더라도 한국인의 생활의식 속에는 식객이라는 존재가 귀중한 비중을 차지한다. 사랑이나 동네의 정자나무는 식객을 위한 공간이다.

문전에서 "이리 오너라" 하고 큰기침을 하는 식객들의 잡음은 끝없이 굳어 가려는 가정 체계에 도전해 변화를 일으킨다. 세르의 파라지트는 일방통행적인 것이지만 한국의 식객문화는 때로는 풍문을, 때로는 시화(詩畵)를 교환한다.

식객자는 김삿갓처럼 풍자적인 웃음 스캔들 그리고 아름다운 예술을 놓고 떠난다. 그래서 도시의 쥐와 시골 쥐는 기식에서 공생으로 발전한다. 김삿갓은 식객이며, 버섯이며, 잡음이었다.

김삿갓이 아니더라도 한국의 생활문화에서 식객은 부정의 요소가 아니라 적극적으로 포용하고 흡수해야 할 요소로 작용했다. 이규태 칼럼의 한 대목을 읽어 보자.

'우리의 옛 조상들은 3덕(三德)이라 하여 식구 수에 세 명 몫을 덤으로 얹어 밥을 짓고 찬도 꼭 먹을 분량에서 덤을 얹어 만드는 것이 부덕(婦德)이 돼 있었다. 지나가는 행인이나 걸인이 찾아올 수도 있고 어렵게 사는 이웃들이 갖다 먹을 수 있게 하기 위해서이다. 옛날 농촌이 그토록 가난했으면서 각박하지 않고 살아날 수 있었던 것은 조상님들의 3덕 때문이었다 해도 대과는 없다."

식객이 아니더라도 상물림이라는 한국 특유의 식사 매너도 기생 연쇄를 법칙화한 것이다.

"전통사회에서는 가장이 먹고 난 밥상을 안식구들이 물려 먹고, 안식구들이 먹고 나면 종들이 물려 먹었으며, 종들이 먹고 나면 구정물통에 모아져 개나 돼지에게 물려 먹었다. 옛날 관청에서도 여섯 명의 하인들이 들어야 하는 대감 점심 밥상을 드리면 판서와 참판이 먼저 먹고나서 이를 물리면 참의와 정랑·좌랑이 먹는다. 그 상을 다시 아전들에게 물리고 다시 종들이 물려 먹었던 것이다. 윗사람은 상물림을 배려해 찬을 남기는 것이 도리요, 아랫사람은 그것을 다 먹어치우는 것이 예의였다."

이러한 생활문화를 철학적 경지와 종교적 위상으로 발전시킨 것이 한국인이 믿고 산 상생(相生)의 사상이었다고 할 수 있다.

서구 산업사회의 근대문명 시스템에서 보면 한국의 전통문화 자체가 하나의 노이즈일 수 있다. 이 노이즈를 버리지 않고 근대 시스템에 끌어들일 때 그 시스템 자체가 변화를 일으키고 뜻하지 않은 새로운 시스템으로 변모해 갈 수 있다. 21세기란 바로 그러한 세기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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