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나라에서 스무 살은 특별한 의미를 지닌다. 초등학교 6년, 중학교 3년, 고등학교 3년의 교육을 마치고 사회로 첫 발걸음을 내딛는 시기이기 때문이다. 한 휴대폰 광고에서처럼 스무 살은 그들만의 특권을 가진다. 그 동안은 학교 교육에 얽매여 타율적으로 결정해야 하는 일이 많았지만,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나면 분별력 있는 판단을 할 수 있는 성인으로 대우받는다. 또, 이제 학생이라는 신분을 벗어나서 대학생, 직장인 등 여러 가지 모습으로 사회 생활을 하게 된다. 사회로 조심스런 첫걸음을 내딛을 준비를 하고 있는 스무 살들의 마지막 겨울 방학은 어떤 모습일까?

동완이의 하루

동완이는 아침 10시나 11시쯤 느지막이 일어난다. 아주머니들이 즐겨본다는 '누나의 거울' 같은 아침 드라마를 보면서 슬슬 잠을 깨고 12시에 아침 겸 점심을 먹는다. 2시나 3시쯤에 친구들한테서 전화가 오면 외출 준비를 한다. 친구들을 만나면 농구를 할 때도 있고 오락실, 당구장 등에 갈 때도 있지만 주로 PC방에 가서 스타 크래프트를 한다. 스타는 그 동안 시간이 없어서 못하다가 요즘에서야 배웠다. 초보라서 아직까지는 이긴 게임보다 진 게임이 더 많지만, 실력을 키우고 있는 중이다.

그렇게 몇 게임을 친구들과 하고 나서 집에 6시나 7시에 돌아온다. 그 시간에 재미있는 TV프로그램들이 많기 때문이다. 여기 저기 채널을 돌려가면서 재미있는 부분만 보다가 드라마가 끝나는 11시면 자기 방으로 돌아간다. 11시 이후에는 시사, 토론 프로그램 같은 것만 하기 때문이다. 그 때부터 또 혼자서 스타를 한다. 낮에 했던 게임과 전략을 다르게도 해보고 새로운 것도 시도하다보면 금새 12시. 은곡공업고등학교 전자과 졸업반 김동완 군의 요즘의 생활이다.

"요즘 정말 하는 거 없어요. 그냥 친구들 만나거나 TV보면서 집에 있거나 그래요." 수능 시험 끝나고 나서 여유가 많을텐데 무엇을 하고 지내는지를 묻자 동완이는 심드렁하게 대답했다.
"전 고3 2학기 때 취업했어요. 취업을 안하면 공고는 졸업이 안되거든요. 이어폰 만드는 곳에서 4개월 정도 일하다가 수능 봤는데, 거의 공부 못한 상태에서 본 거에요. 일하다 보니 공부할 겨를이 있어야죠. 대학 진학 문제도 늦게 결정한 편이고, 공고라서 특별전형으로 대학 시험 봤어요."

동완이의 고3 생활은 일반 인문계 고등학생처럼 하루 15시간씩 학교에서 보충 수업, 야간 자율학습까지 하는 얽매인 생활은 아니었다. 하지만 취업과 대학 입시 준비를 병행해야 하는 것이 만만치 않았을텐데 특별히 힘들다는 말은 꺼내지 않는다. 고3병은 으레 인문계 고등학생들만 걸리는 것으로 여기는 사회 풍토 앞에서 공고나 상고 학생들의 취업, 입시 문제는 부차적인 것이 되어 버린 것일지도 모른다.

"수능 끝나고 특별히 무엇을 하고 싶다고 생각해 본 적이 없네요. 그냥 일하고, 공부하고 그렇게 보냈어요. 실컷 놀아야겠다고 생각한 적은 있어요. 컴퓨터 배워보고 싶었는데 집안 사정상 지금은 그것도 여의치가 않네요. 제 친구들도 저처럼 집에서 시간 때우는 애들도 많아요." 동완이에게는 수능 끝나면 무엇을 해야겠다고, 그것을 위해 지금 참자고 자신을 세뇌시키면서 공부하는 것이 정신적 사치였을지도 모른다. 무엇을 해야할 것인가를 생각할 여유도 없이, 당장 눈앞에 있는 두 마리 토끼를 잡기도 버거웠을 것이다.

"앞으로 남은 방학 동안 딱 짜놓은 계획은 없구요, 합격자 발표 기다리고 쉬려구요. 지금 원서 5군데 넣었는데요, 전문대는 아직 원서 안 받은 곳도 있거든요. 그런 것들 하다보면 시간이 다 지나갈 것 같아요." 지금까지 힘들게 달려온 고3들에게는 쉬는 것이 남은 방학의 계획일수도 있다. 고3들에게 쉬는 것을 할 일로 해야 할만큼, 여유를 주지 않았던 사회가 이제 그들에게 줄 수 있는 것은 무엇일까?

혜경이의 하루 

윤혜경(백석고등학교)양의 겨울 방학은 그 동안 못해온 공부에 대한 욕심 때문에 바쁘기만 하다. 혜경이는 늦게 일어나도 됨에도 불구하고 아침 8시면 일어난다. 8시 반이면 아침 식사를 하고, TV나 비디오를 볼 때도 있고 요즘 유행하는 십자수를 놓을 때도 있다.

점심을 먹고 2시까지 컴퓨터 학원에 간다. 월요일부터 금요일까지 일주일에 다섯 번 가는 컴퓨터 학원에서 '윈도우 98' , '한글 97' 등을 배운다. 4시에 학원이 끝나면 집에 와서 조금 쉬고 저녁을 먹은 뒤, 7시 30분까지 영어 학원에 간다. 외국인을 만나도 대화를 할 수 있도록 회화를 한 시간 정도 배운 다음 다시 비올라를 배우러 간다. 어렸을 때 바이올린을 배운 적이 있었는데 그 동안 시간이 없어서 못 배우다가 못 배운 것을 마저 다 배우려고 친척 오빠한테서 레슨을 받는다. 매일 한 시간 정도 비올라를 연습하고 집에 오면 10시가 넘는다.

"며칠 있으면 합격자 발표 나는데요. 굉장히 많이 떨려요. 전 수학을 좋아해서 수학과에 원서 넣었어요. 어머니께서는 교대에 원서 넣으라고 하셨지만 전 교대가 싫어요. 담임 선생님께서도 수학과 나와서 뭐 할거냐고 그러셨지만 전 제가 하고 싶은 공부를 위해서 수학과에 원서 넣었어요. 그렇지만 이상하게 미래에 대한 걱정은 안되네요."

대학이라는 간판을 보고 눈치 작전에, 미달 학과를 찾는 아이들도 있지만, 혜경이처럼 자신이 원하는 것을 하기 위해서 학과 위주로 원서를 넣는 학생들도 있다. 대학의 서열화 현상을 방치하는 사회도 문제지만, 진정으로 자신이 무엇을 원하는지 적극적으로 찾지 않는 학생들도 문제다.

컴퓨터와 영어는 대부분의 고3 학생들이 수능 끝나고 나서 배우고 싶어하는 것들이다. 그렇지만 혜경이처럼 실천으로 옮기는 사람은 그리 흔하지 않다. "컴퓨터는 배워야겠다는 생각을 했어요. 안 배우면 살아갈 수가 없는 세상이잖아요. 다음 달에는 워드까지 배워서 자격 시험 준비할 거에요. 영어는 어머니께서 시간 날 때 배워보라고 하셔서 배우러 다니는데요, 그렇게 싫지는 않아서 다니고 있어요. 운전 면허도 필기 시험 공부하고 있어요. 대학 생활 준비요? 솔직히 말하면 뭘 해야 할지 모르겠어요. 그냥 대부분의 사람이 해야 할 것이라고 말하는 것을 하는 거지요."

"대학생 되면 MT도 가보고 동아리 활동도 해보고 싶어요. 아르바이트도 한 번쯤 해볼만한 것이라고 생각해요. 제일 좋은 것은 하고 싶은 일을 하는 것이죠. 틀에 얽매인 생활에서 벗어나서 자유로워지는 것도 좋아요." 꿈꿔왔던 것을 실현해 나가기 위해 이것저것 해 보는 혜경이의 모습이 아기가 옹알이를 하는 것처럼 예뻐 보였다. 

인우의 하루

이미 합격이 결정된 이인우(중동고등학교) 군의 하루는 느긋할 만 한데도, 8시 반이면 시작된다. 요즘 1주일에 4번 수학 과외 아르바이트를 하기 때문에 아침 식사 후에는 그 날 가르칠 내용을 미리 본다. 11시부터 1시까지 과외가 끝나고 나면 비디오를 주로 본다. 그 동안 못 본 영화들, 보고 싶었던 영화들을 보느라 장르는 크게 구애받지 않는다.

슬슬 외출 준비를 하고 각종 소모임들에 나갈 준비를 한다. 고등학교 때 친구들의 모임, 학원 모임 등 인우가 만나는 사람들이 부쩍 늘어났다. 11시쯤 모임에서 돌아오고, 12시부터 2시까지는 컴퓨터로 웹서핑을 하거나, 컴퓨터 통신 나우누리에서 작은 모임을 또 갖는다.

"고 3때 여름에 더워서 공부하기 힘들었던 게 생각나네요. 그 때 친구들끼리 대학에 가면 뭘 하고 싶은지를 묻는데 그냥 가만히 있고 싶은 거라고 대답했어요. 하는 일없이 그냥 있는 거요. 고3은 공부하기 싫어도 해야 되고, 학교 가기 싫어도 가야하는 거잖아요. 그런 타율적인 것 말고 아무 일 없이 그냥 있어보고 싶었어요." 인우는 학교장 추천으로 서울대학교 치의예과 수시 모집에 합격했다. 수시 모집은 수능 점수로 자격 제한만 하기 때문에 수능 점수로 합격이 뒤바뀌지는 경우가 드물다. 인우는 합격자 발표를 2월말까지 기다리는 다른 수험생들보다 시간적 여유를 많이 가지게 되었다.

"시간이 많이 남지만 그 시간에 다른 친구들은 원서 쓰느라 바쁘니까, 친구들과 같이 보낼 수는 없지요. 제가 수시 모집에 붙어서 친구들한테 괜히 미안한 것도 있고, 친구들하고 있으면 친구들이 부담스러울까봐 걱정도 되구요. 그래서 혼자 중학교 은사님을 찾아 뵙거나 강촌, 강릉 같은 곳에 잠깐 여행 다녀오거나 그렇게 보냈어요." 인우는 지금도 여행 중이다. 전화를 받았을 때 경북 영주시에 있는 부석사라고 했다.

수시 모집은 학교별로 인원 제한이 있어서 소수의 학생들에게만 기회가 주어진다. 인우의 담임 선생님도 그 기회를 살리고 싶으셨는지 좀 더 경쟁률이 낮은 자연과학부에 원서를 넣으라고 하셨다. 그러나 인우는 소신이 뚜렷했다. "치의예과는 중학생 때부터 지망하던 곳이어서 그 과로 원서를 썼어요. 친구들 보면 점수대 맞춰서 학교 보고 원서 쓰고, 눈치 작전 한 애들이 원서를 내고 나면 후회를 많이 하더라구요. 붙고 나서도 후회하고 재수를 결심하는 애들이 있어요. 중요한 것은 자신의 삶이니까요, 후회하지 않을 굳은 결심을 하고 원서를 썼으면 좋겠어요."

"지금 특별하게 대학 생활 준비하는 것은 없고, 그냥 TEPS랑 운전 면허 시험 준비하고 있어요. 컴퓨터는 책 사놓고 혼자 보는데 좀 어렵네요. 영어, 컴퓨터는 경쟁에서 중요한 무기라고 생각하거든요. 고3 때는 막연하게 대학생 되면 여행 많이 다니고, 여자친구도 사귀어 봐야겠다는 생각을 했었는데요, 지금은 그런 것보다 대인 관계를 넓히는 게 더 중요한 것 같아요. 대학 생활이 고등학교 때처럼 정해진 사람을 만나는 게 아니잖아요. 고등학생 때는 대학 입시라는 목표 하나만 있으니까 혼자 다녀도 별 상관이 없었는데 대학생 때는 사람들을 많이 사귀어 보고 싶어요. 자주 가지는 여러 모임들도 그래서 나가는 것이구요."

정해진 사람들을 만나는 것에서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게 되는 것처럼, 이제 정해진 생활이 아니라 다양한 경험과 다양한 상황 선택이 필요한 세계로 접어드는 민우의 첫걸음에 대학 새내기의 희망이 묻어나고 있었다.

학교에서 시간표를 짜주고, 과제를 내주고, 목표를 정해주던 고등학생 시절과는 달리, 사회로 나온 스무 살들에게는 아무도 과제를 내주지 않는다. 자신이 목표를 정하고 스스로 과제를 만들어 해결해야 한다. 고등학교에서 사회로 넘어가는 비무장 지대 같은 고3 겨울 방학. 아무도 돌보지 않는 그 곳에서 우리의 아이들은 자유와 방종의 적정선을 헤아리고, 스스로 그 기준추를 조절해야 한다는 부담감에 흔들리고 있다.

그러나 초·중·고 12년 동안 억눌려왔던 그들에게 지금의 흔들림은 앞으로의 생활을 탄탄하게 하기 위한 기반 다지기 작업일지도 모른다. 지금의 방종, 나태함은 후에 더 큰 책임감을 키워줄 수도 있다. 아기가 이제 막 걸음마를 시작하면서 서투른 것처럼 여러 가지 시행착오를 겪으면서 조심스레 나아가는 이 땅의 스무 살들에게 작은 격려의 박수를 보내고 싶다. 

 송혜원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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