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요? 제가 28일까지 마감이라 29일에나 시간이 될 것 같은데......” 출산한지 얼마 되지도 않아 벌써 마감에 쫓기는 그녀. 만화가 원수연씨(44)는 개인 매니저까지 두고 있을 정도로 바쁜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다. 아직 산후 조리가 끝나지 않아 두꺼운 옷을 한 겹 더 걸친 그녀는 소탈하게 웃으며 작업실로 안내했다.

예술의 길은 하나로 통한다

한쪽 벽을 가득 채우고 있는 만화책들이 인상적인 그녀의 작업실. 창가와 맞닿아 있는 그녀의 책상 한 켠에는 음악을 듣기 위한 도구들이 갖춰져 있다. 반평생 가까이 만화를 그려온 그녀에게 음악은 절친한 벗이다. “만화를 시작하면서 다른 취미들은 버릴 수밖에 없었어요. 그나마 음악은 작업하면서도 들을 수 있죠.” 취향이 정해져 있지는 않다. 작업할 때 들을 수 있는 편한 곡, 느슨해지지 않으면서도 시끄럽지 않은 곡을 즐겨 듣는다.

그녀는 칸딘스키의 작품을 좋아한다. 하나의 예술로서 만화와도 뭔가 통하는 듯한 느낌이 있는 것 같단다. “딱히 왜라고 말하기는 힘들지만, 어릴 때 한동안 푹 빠져 지냈던 기억이 나요. 그래서 지금도 좋아하나 봐요.” 작업을 하다보니 미술관에 가기란 하늘의 별따기가 되었지만, 시간이 나면 미술관에서 여유를 만끽하고 싶다고 말했다.

슬럼프가 아니야!

그녀는 아침에 눈을 떴을 때가 가장 행복하다. “마감에 쫓기며 살다보니 그런가 봐요. 하루가 많이 남았구나 하는 생각에 즐겁다가 저녁이 될수록 초조해지죠.” 정해진 시간 내에 머리를 짜내야 하기 때문에 잠도 못자고 몇날 며칠을 작업에 몰두하다 보면 육체의 한계를 넘는 일이 몇 번씩 있다. 몸 상태는 악순환이 계속된다. 그런 일이 매달 몇 번, 이제는 십년이라는 세월을 넘어 이십년을 향해 가고 있다. 자신의 작품을 읽어주는 독자에 대한 책임감이 투철한 그녀는 힘들어도 강행군을 계속할 수밖에 없다고 말한다. 

87년 <그림자를 등진 오후>로 시작한 그녀의 만화 인생은 <시간의 춤>, <비밀 만들기>로부터 단편인 <비를 본적이 있나요>, <해머 피크닉>, <당신에게는 과분하게 멋진 남자>로 이어져 <엘리오와 이베트>, <풀하우스>, <Let 다이>와 같은 인기작들을 탄생시키게 된다.만화를 좋아하는 그녀에게도 만화 그리는 작업이 항상 즐거운 일만은 아니다. “매 순간이 슬럼프 같아요. 그만큼 작업하기가 녹녹치 않거든요. 대신 슬럼프를 애써 무시하죠. 정면으로 맞서다간 무릎을 꿇어버릴 것 같아요.”

죽느냐 사느냐

많은 팬들의 사랑을 받고 있는 성공한 만화 작가, 원수연. 그녀는 아직도 만족하지 못한다. 만화를 시작할 때부터 자신을 벼랑 끝에 내모는 연습을 했다. “나에게 맞는 직업이 뭘까 방황하다가 막상 선택을 했을 때는 현실적이었어요, 굉장히. 먹고 사는 문제였죠.” 그녀에게 만화는 달콤한 꿈이 아닌 가혹한 현실이었다. 어릴 때부터 하나의 ‘꿈’으로 만화를 시작한 다른 작가들과는 달리, 그녀는 스물 여섯이라는 상당히 늦은 시기에 ‘생계수단’으로서 만화를 시작했다. 그런 그녀는 ‘살기 위해’ 한 치도 뒤로 물러 설 수 없었다. 

그녀는 처음 시작할 때부터 대중한테 어필하기 위한 본능이 꿈틀댔던 것 같다고 말한다. 그러나 이제는 굳이 현실과 타협하는 작품만 그려내려 애쓰지 않는다. “독자와의 공감대가 중요하지, 상업적인 코드냐 아니냐가 중요하지 않다는 것을 깨닫게 됐어요.” 자신의 작품이 상업적인 만화와 예술적인 만화 중에 어디에 속할 것 같냐는 물음에 “흥행작가라고 하더라구요, 사람들이......(웃음)”라며 좋은 작품들에겐 그런 구분이 무의미한 것 같다고 말한다.

다양한 사람, 다양한 사랑

그녀는 앞으로 방영될 드라마 <풀하우스>를 기다리며 기대에 부풀어 있다. 언젠가는 드라마로 만들어봤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갖고 있었다고. 하지만 완전히 똑같은 작품을 기대하지는 않는다. “드라마는 또 다른 산업이기 때문에 만화와 굉장히 다를 수밖에 없다는 걸 이번에 알게 됐어요.” 그녀는 드라마 제작진도 자신의 의견을 지배적으로 받아들일 수 없다는 걸 알고 있고, 그들의 의견을 존중한다. <풀하우스>를 만화가 아닌 드라마로서의 매력을 살려줄 수 있는 것은 드라마를 만드는 사람들이라고 확신하기 때문이다. “캐스팅에 대해 홈페이지 게시판에도 의견들이 많이 올라오고 만화의 캐릭터와는 다르다는 의견에 공감은 하지만, 원작과 완전히 똑같은 건 없거든요. 모든 사람을 만족시킬 순 없죠. 드라마를 만드는 사람들의 최선의 선택이라고 생각해요. 다른 맛이 있겠죠.”

그녀가 각별한 애정을 기울이고 있는 작품 <Let 다이>에서는 조금 다른 형태의 사랑을 보여준다. 95년부터 <윙크>에 연재를 시작한 동성애 만화 <Let 다이>는 1권이 나온 후 6년의 공백을 가졌다가 다시 연재를 시작해서, 현재 단행본으로는 12권까지 나와 있는 상태다. 이번 작품에서 보여주는 어둡고 슬픈 이야기들은 이전의 작품들에 익숙해진 독자들에게 충격을 안겨주기도 했다. 그녀는 동성애에 대한 사람들의 인식을 넓히고 소수의 사람들에 대한 편견을 없앴으면 좋겠다고 말한다. “굉장히 다양한 사람들이 존재하는데 사랑 역시 다양한 형태가 존재할 수 있다고 생각해요. 그런 삶 역시 색안경을 끼고 보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Let 다이>를 쓰는 도중 6년이나 쉬었던 원수연 씨는 몇 년 전과는 달라진 자신의 모습을 발견하고는 놀라기도 했다. “결혼도 하고 아이도 있는 지금의 생활이 개인적으로는 안정을 주고 있지만, <Let 다이>같은 작품을 하기엔 어려움이 많아요. 저의 모난 부분이 많이 없어졌거든요" 공백 기간 없이 계속했다면 더 좋은 작품을 쓸 수 있지 않았을까 하는 아쉬움이 든다고 한다.

완성되지 않은 보석

그녀는 앞으로의 작품으로 <풀하우스>와 같은 알콩달콩한 사랑 이야기와 복수하는 과정 속에 피어나는 휴먼 스토리, 두 가지를 구상하고 있다. 복수와 휴먼 스토리, 모순 되는 말 같아 고개를 갸우뚱해보이자 그녀는 ‘복수’라는 개념을 나름의 철학으로 설명한다. “개념의 폭을 넓히는 거예요. 오히려 은혜를 베풀 수도 있거든요. 복수의 모습이 딱 정해져 있는 건 아니잖아요. 자기의 맺힌 응어리를 풀어가는 과정이랄까.” 그녀는 만화를 통해 어린 독자들에게 ‘사람을 사랑하는 마음’을 전하고 싶다. 아직은 부족하다며 더 욕심을 내는 그녀, 만화 작가 원수연은 창작의 고통 속에서 끊임없이 사랑을 노래하는 거친 보석이다. 


 
김지연 수습 기자 <white0164@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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