콘트라베이스를 보는 두 가지 시각

『베토벤 교향곡 제5번 스케르초(scherzo)의 악장 속에 있는 트리오 섹션에서는 둔한 콘트라베이스를 쩔쩔매게 하는 빠른 대목이 있다. 나는 이런 유머를 즐길 수 있는 베이스 플레이어를 부러워한다.』
                                 -피천득 '플루트 플레이어' 中-

『서로 각기 다른 음이 여섯 개가 나란히 있다는 말입니다! 이런 빠른 속도에서 말이지요! 도저히 연주가 불가능한 상황입니다. 사람들은 그래서 음을 그냥 위로 쭉 쓸어 올려 버립니다.』
                     -파트리크 쥐스킨트 '콘트라베이스' 中-

콘트라베이스 연주를 두고 두 글쓴이가 풀어낸 느낌은 달라도 너무 다르다. 한 사람은 쩔쩔매는 연주자의 모습을 보고 유머를 즐긴다며 부러워한다. 다른 사람은 악보에 억지로 끌려가는 모습이라고 생각한다. 전자는 삶의 향기를 즐기며 사는 피천득씨의 수필이고, 후자는 은둔 생활을 하고 있는 파트리크 쥐스킨트의 희곡이다. 각자의 생활 방식과 사고가 글에 고스란히 묻어난다.

친근함의 미학

글에는 글쓴이의 모든 것이 투영되어 있다. 특히 일상의 향기를 담아 놓은 문학인 수필은 다른 글보다 글쓴이의 채취가 더 진하게 담겨있다. 지하철에서 책을 읽다가 잠시 책장을 덮고 눈을 감아 본다. 딸을 사랑하는 아버지, 아름다움을 사랑하는 예술가, 고지식하지만 곧은 성품을 지닌 지식인의 모습이 하나로 합쳐진다. 한 번도 만나본 적 없는 사람이지만 왠지 '인간 피천득'이 친근하게 느껴진다. 손을 뻗으면 저자의 등에 닿을 듯하다.

딸 서영이가 미장원에 가서 트위스트 머리를 하고 오자 저자는 못마땅한 눈으로 그녀를 바라본다. 세팅 파마를 한 나를 보고 "민선아, 아빠는 원래 머리가 훨씬 좋단다"며 아쉬움과 못마땅함이 담긴 눈길을 보냈던 아빠의 모습이 떠오른다. 저자는 '엄마'라는 수필에서 어린 시절 어머니와 구슬치기를 하고 놀던 기억을 더듬는다. 엄마와 딱지치기와 술래잡기를 하고 놀았던 내 어린 시절의 모습이 겹쳐진다.

누구나 겪을 수 있는 일상의 단편을 채취했기에 그의 글은 읽는 사람에게 '맞아! 저런 일이 있었지!'라며 무릎을 치게 만든다. 사람 냄새가 난다. 주변에서 흔히 일어나는 사소한 일들을 읽다보면 담백한 희열과 잔재미를 동시에 느낄 수 있다. 소소한 것의 아름다움을 찾아내는 저자의 능력은 콘트라베이스 연주의 불가능함을 유머로 생각하는 여유에서 나온 듯 하다. '친근함의 미학'이야말로 그의 글에서 나타나는 생명력의 근원이 아닐까?

'인연'에 담겨있는 네 가지 조각

'인연'에는 각박한 현대인에게 없는 '여유'와 '청빈'이 숨쉬고 있다. 잘못 걸려온 전화에서 들려오는 여성의 신선한 웃음소리에 짜증을 내기는커녕 젊음을 느낄 수 있게 해 준 것에 감사함을 느낀다. "뭐 저런 여자가 다 있어?"라며 기분 나빠하는 대다수의 사람들에게는 찾아볼 수 없는 한 줌의 여유가 느껴진다. 호주머니에 들어있는 용돈 700원이면 부러울 게 없다. 수천 억을 손에 쥐고도 욕심을 못 버리는 사람들이 소유하지 못한 '청빈'이라는 가치를 저자는 지니고 있다.

'젊음에 대한 애정'도 '인연'에는 담겨 있는 것 중 하나다. 저자가 젊음에 가지는 애정은 언뜻 '집착'으로 느껴질 정도로 대단하다. 젊은 여성의 신선한 아름다움을 소리 높여 찬양하지만, 늙은 여성을 '시든 백합'으로 비유한다. 나이든 여성들이 들으면 돌 던질 소리일 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늙고 추한 것을 아름다움으로 포용할 줄 아는 성인군자는 세상에 몇 없기에, 저자의 생각을 이해 못하는 바는 아니다. 다만 나이든 여성의 원숙미를 '슬픈 억지'로 간주해 버리는 저자의 사고에 여자로서 약간의 섭섭함을 느낄 따름이다. 구순(九旬)의 노인에게 사고의 전환을 바라는 건 너무 무리한 욕심일까?

마지막으로 '인연'에는 한 조각의 '감성'이 자리잡고 있다. 세상을 따스하고 여유 있게 바라보기에 소년 같이 맑은 감성을 소유할 수 있나보다. 하지만 그 아름다운 감성에 흠뻑 취하려면 어느 정도의 문학 지식, 특히 영문학 지식이 안주로 필요할 듯 하다. 저자는 해박한 영문학 지식을 빌려 그의 감성의 날개를 마음껏 펼친다. 독자를 고려하면서 쓴 소설과는 달리 수필은 글쓴이 마음대로 뱉어낸 독백에 가깝기 때문이다. 덕분에 그의 감성을 100% 이해하는데는 실패하고 말았다. '키츠'나 '모드 곤'같은 사람의 글을 모르는 내 무지에서 비롯된 결과이긴 하지만, '조금만 독자와의 의사소통을 고려해줬으면…'하는 작지만 이기적인 아쉬움이 남는다.

깨끗함, 담백함 그리고 은은함

피천득씨의 글은 미문(美文)이지만 빼어난 아름다움이나 날카로운 세련됨이 드러나지는 않는다. 오히려 앞서 말한 '평범함의 미학'이 더 돋보인다. 하지만 그 평범함 속에서 오감을 모두 느낄 수 있다. 알록달록한 색이라기보다는 표지만큼이나 깨끗한 흰색으로 보인다. '스콜피온'의 강렬할 일렉트릭 기타 소리가 아니라 '유키 구라모토'의 맑은 피아노 연주가 들린다. 매끄러운 비단의 느낌보다는 약간 거칠지만 시원함이 묻어나는 세모시의 감촉이 느껴진다. 눈물이 날 정도로 맵고 강한 낙지 볶음의 맛보다는 담백하고 정갈한 백김치 맛이 혀에 감긴다. 아찔한 장미향보다는 은은한 들꽃 향기가 코끝에 스친다.
 
물론 매혹적인 장미향이나 강렬한 낙지 볶음의 맛을 싫어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정신 없는 일상 속에서 자극적인 통속 소설이나 어려운 전문 서적보다는 담백한 수필이 더 마음에 와 닿을 뿐… "수필은 한 조각의 여유에서 나온 눈에 거슬리지 않는 파격"이라고 저자는 말한다. 그래서일까? 짧은 글이지만 휴식을 취하는 기분으로 편안하게 읽을 수 있었다. '인연'을 읽는 동안 일상에 찌든 답답한 가슴에 잠시나마 한 줄기 시원한 바람이 머물렀다.

안민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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