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시대의 아름다운 장미들을 만나보는 테마 버라이어티 쇼, 장미의 이름!"

지난 5월부터 매주 토요일 밤 SBS TV에서 방영하고 있는 테마 버라이어티쇼 <장미의 이름>을 소개하는 말이다. 이 프로그램의 임성민 MC는 첫번째 방송에서 "여자라서 행복하고 당당한 여성들과 그 여성들 옆에서 행복한 남성들을 위한 시간"이라고 소개하고 "기본이념은 여성존중과 우대"라고 덧붙였다. 그는 지난 6월 11일자 대한매일에 쓴 칼럼에서도 이 프로그램이 페미니즘을 표방한 버라이어티 쇼라고 밝혔다. 그러나 9회에 이르기까지 <장미의 이름>이 페미니즘을 표방한 쇼였다는 것을 아는 사람을 찾기란 힘들다. 여성은 프로그램의 소재일 뿐, 어디에도 여성을 존중하고 우대하는 모습은 없다.

여자친구로 인형놀이?

'날개 얻은 천사'는 남녀 커플들이 출연하는 코너다. 여기서는 남자친구가 그 날의 주제에 맞게 여자친구의 옷을 직접 골라 입히고 다른 팀과 의상 대결을 벌인다. 이긴 팀에게는 남자친구가 골랐던 의상과 리무진 데이트가 제공되고, 진 팀에게는 옷을 반품해야 하는 벌칙이 기다린다. 프로그램 방송시간이 토요일 밤인 만큼 MC들은 출연한 커플들에게 애정도 테스트나 연인확인 테스트로 키스나 포옹 등 농도 짙은 포즈를 요구하기도 한다.  

'날개 얻은 천사'는 <장미의 이름>이 코너 교체를 한차례 겪고 나서도 자리를 지켰다. 상업방송에서 남자가 여자친구에게 날개를 달아준다는 식의 신데렐라 만들기를 쉽게 포기하기란 힘들다. 그러나 흑장미와 백장미 팀으로 나뉘어 승부를 가리는 설정은 인형에게 옷을 입혀놓고 내 인형이 더 예쁘다고 자랑하는 어린 애들의 승강이와 다를 게 없다. 놀이공원, 이브닝 파티, 스타패션, 부모님께 첫인사, 여름휴가 등등 주어진 주제와 남자친구의 취향에 따라 여자친구는 변해야 한다. 지난 5월 26일분 '날개 얻은 천사'에 출연한 한 남성은 "제 여자친구는 이런 옷 별로 좋아하지 않지만 제가 좋아하니까 한번 입혀 봐야죠"라는 말도 서슴지 않는다. 남자친구가 골라준 옷을 입고 상자에서 걸어 나오는 사람은 예전의 여자친구가 아니다. 남자가 원하는 대로 가공(加工)한 여자친구는 귀엽고, 사랑스러운데다 섹시하기까지 하다. 결국 여자친구는 없고 예쁜 인형만 남은 셈이다. 언제나 웃고 있는 날씬한 밀랍인형처럼.

실패한 리얼리티 쇼, 코요테 어글리

코요테 어글리(COYOTE UGLY). 작년에 개봉한 할리우드 영화 <코요테 어글리>에서 따온 이름이다. 이 코너는 바텐더가 되고싶어 하는 5명의 여성들이 모여 합숙훈련을 하는 과정을 담은 리얼리티 쇼다. '코요테 어글리'는 영화에서 여성 바텐더 3인조가 뉴욕 멘하튼에서 운영한 바(bar)를 한국에서도 만들겠다는 목표로 시작했지만 지난 6월 7회 방송을 끝으로 막을 내렸다. 이유는 멤버 중 한 명의 개인적인 사정 때문이다. 그러나 그동안 어설픈 리얼리티 쇼를 마주해야 했던 시청자들에게 '코요테 어글리'의 폐지는 오히려 잘 된 일인지 모른다.

여성 바텐더가 흔하지 않은 우리나라에서 5명의 여성들이 이 직업에 도전한다는 생소한 기획은 시청자들의 시선을 끌기에 충분하다. 경쾌한 음악, 다섯 멤버들의 춤과 화려한 플레어(flair) 쇼도 '코요테 어글리'가 보여줄 수 있는 독특한 볼거리다. 그러나 바텐더는 춤과 플레어만으로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그런 2차적인 기술보다 칵테일에 대한 해박한 지식과 새로운 칵테일을 개발하려는 꾸준한 노력이 더 우선이다. 하지만 '코요테 어글리'에서 멤버들의 이런 노력을 찾기란 힘들다. 이들은 매주 방송사가 마련해준 행사장에서 보여줄 춤과 플레어 쇼 준비에 바쁘다. 가끔 등장하는 멤버 사이의 갈등도 드라마적 요소를 위해 끼워 넣은 냄새가 물씬 풍긴다. 그러나 리얼리티 쇼의 감동은 출연자의 진실하고 인간적인 모습에 달려있다. '코요테 어글리'는 목표를 향해 도전하는 사람들에 관한 리얼리티보다 날씬한 여성들의 춤 솜씨가 곁들여진 눈요깃거리에 불과한 쇼였다.

'결혼할까요' 아류작

"그녀의 이상형을 찾아라. 최고의 여성을 위한 신개념 맞선 프로젝트!"

<장미의 이름>이 지난 8회 방송부터 시작한 맞선 코너 '보이지 않는 사랑'의 기획의도다. 물론 맞선의 기회는 '지성과 미모를 모두 갖춘 최고의 여성'에게만 주어진다. 출연자들은 웨딩플래너, 패션 디자이너 등 전문직에서 일하는 여성들이다. '최고의 여성'은 예쁘고 능력도 있어야 한다는 말이다. 이처럼 TV에서 일반인들의 배우자를 찾아주는 이벤트는 쇼 프로그램의 단골손님이 된 지 오래다. 1994년 MBC-TV의 <사랑의 스튜디오>를 시작으로 본격적인 TV 맞선 붐을 일으킨 SBS-TV <기분 좋은 밤>의 '결혼할까요'가 지금까지 TV 맞선을 주선하고 있다. 또 SBS-TV <두 남자 쇼>에서 지난 3월 방영했던 '달콤한 청혼'은 코너 제목 그대로 일반인의 청혼 이벤트를 돕는 내용이다. 여기에 <장미의 이름>의 '보이지 않는 사랑'까지 가세했다. 그러나 'TV 맞선'이 신선한 소재일 수 있는 단계는 지났다. 여기저기서 쏟아져 나오는 남의 사랑, 남의 맞선에서 웃음을 찾는 시청자들도 드물다.

진행자들의 페미니즘 지각지수는?

       MC 남희석 : 질문 드리겠습니다. 만약 두 분이 부부생활을 하신다면, 집에 왔을때  여자친구가 어떤 모습이었으면 좋겠습니까?
       남자 출연자 : 아까 사진에 있는 예전 모습이었으면 좋겠습니다.
       MC 남희석 : 여자친구가 부엌에 있을 때는 어떤 모습이었으면 좋겠습니까?
       남자 출연자 : 부엌에서도 사진 속 그 모습이었으면 좋겠어요.
       MC 남희석 : 그렇다면 침실에서는?
       남자 출연자 : 그 때는 지금 이 모습이었으면 좋겠습니다.

지난 6월 2일 방영된 <장미의 이름> '날개 얻은 천사'의 한 장면이다. 여자친구가 모델 이소라 스타일로 옷을 갈아입고 나온 자리에서 나눈 얘기다. 여기에는 아내가 낮에는 마리아이기를, 밤에는 이브이기를 바라는 MC의 이중적인 시각이 투영되어 있다. 남자 MC 남희석이 여성 진행자들을 미스코리아 진(眞), 백치미 대회 진(眞), 강원도 감자아가씨에 빗댄 우스갯 소리도 저급한 농담에 지나지 않는다.

여자 MC 임성민 역시 <장미의 이름> 진행자이기 보다 예쁘게 핀 장미 중 하나다. "임성민을 위한 코디, 임성민의 날개 변신, 모델 임성민"이라는 남희석의 멘트와 함께 임성민은 몸에 꽉 끼는 옷을 입고 나와 스튜디오를 한바퀴 돈다. 남희석은 "임성민씨가 이 옷을 입고 나오면 전국의 노총각들이 난리가 날 거에요"라고 말한다. 시키는 대로 옷을 갈아입고 모델처럼 워킹을 하는 여성 MC의 모습에서 페미니즘을 지향한다는 프로그램의 MC는 찾을 수 없다. 보조 MC들의 태도도 페미니즘을 테마로 하는 프로그램의 기획과 어긋난다. 보조 MC인 코미디언 이혁재는 여성 출연자들에게 추근덕거려 시청자들의 눈살을 찌푸리게 한다. <장미의 이름> 인터넷 게시판에서는 MC 임성민이 벌칙으로 그와 데이트하는 장면 등에서 여성을 지나치게 성적 대상으로 대한다는 지적이 올라오고 있다.

테마 없는 '테마 버라이어티쇼'

<장미의 이름>에는 뚜렷한 테마도 없고, 살아있는 여성도 없다. 예쁘게 핀 장미들만 있다. '여성을 21세기의 진정한 동반자로 부각시키겠다'는 프로그램 기획의도가 무색하다. 이제는 기획의도처럼 여성들이 브라운관 속에 갇혀 예쁘게 포장된 장미가 아닌 한 인간으로 그려져야 할 때다. 여성을 테마로 한다는 말에 책임질 수 있는 방송이 되기를 기대해본다.

 

박수련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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