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무현 차기 대통령의 취임식이 얼마 남지 않았다. 이제 미국 정부가 주시하는 것은 우리의 대북정책은 물론 대미정책까지다. 미국 시민들 역시 반세기 전 전쟁으로부터 그들이 구한 나라가, 자신들을 어떻게 대할지 촉각을 곤두세웠다. 어느 때보다도 이들의 애국심이 뜨거운 시기다.

최근 케이블 채널 C-SPAN의 주한미군에 관한 방송분에서 미국인들은 이같은 분노를 확실히 나타냈다. 이 채널의 대표 프로그램 ‘워싱턴 저널’은 그 날의 화제에 대해 시청자의 의견을 듣는데, 대부분의 시청자들은 이 날 “자국민이 좋은 취급을 받지 못한다면 도울 필요가 없다”는 반응을 보였다.

9.11을 절대 잊지 않을 것이다

미국에 애국주의 열풍이 일어난 것은 9.11 테러부터다. 워싱턴 포스트의 Bob Woodward 편집부국장은 저서 ‘Bush at War’에서 “부시가 참모들에게 9.11을 기회로 여기라는 지시를 했다”고 밝혔다. 이를 미국의 의지와 힘을 보여줘 국제적인 위상을 굳히는 계기로 이용하겠다는 말이다.

대통령이 테러와의 전쟁을 선포하는 동안, 미디어 역시 애국심을 자극하는데 앞장섰다. 뉴스 전문채널들은 아직까지도 ‘War on Terror,' 혹은 ’War on Iraq'란 제목 아래 세계 각지에 주둔하는 미군의 모습을 반복해 보여주고 있다. 타임지는 지난 해 ’TIME Goes to War'이라는 특별호를 발간했다. 평소의 2배 가격에 170 페이지에 달하는 이 책자는 세계 2차 대전부터 최근 ‘테러와의 전쟁’까지 평화를 위해 싸운 미국인들의 사진을 담았다. 성조기를 흩날리는 미군 장갑차, 전쟁터에서 가족을 잃고 오열하는 시민, 그리고 미국의 승리. 전쟁에서 떠올릴 수 있는 전형적인 소재들이다.

9.11에 대한 깊은 분노는 학생들에게서도 찾을 수 있다. ‘We'll never forget 9.11.' 미국의 수도 워싱턴이나 빅애플 뉴욕의 벽에서 쉽게 찾을 수 있는 말이다. 워싱턴의 도심 F가를 따라 50미터 가량 이어진 벽화에는 ’United We Stand‘라는 구호도 새겨져 있다. 이는 1942년, 전쟁으로 인한 경제난을 일으키고 단결심을 구축하기 위해 잡지들이 내세운 캠페인 구호다. 18세기에 지어진 애국가 ’Song of Liberty'의 가사에서 따온 이 말은 진주만 공습 이후 최근까지 널리 쓰여지고 있다.

붕괴된 세계무역센터 건물의 잔해가 모두 치워진 그라운드 제로. 이곳에서 역시 세계 평화를 염원하는 이들의 한숨 섞인 분노를 확인할 수 있다. 울타리 너머에는 사상자를 위한 십자가가 세워졌다. 멀리 텍사스주의 고등학교에서 보내온 애도의 깃발 아래, 추모 행렬은 끊일 줄을 모른다.

“이라크보다 미국이 더 큰 위협이다“

현재 대학교 1, 2학년생이 바로 9.11을 잊지 않겠다며 앞장섰던 당시의 고등학생들이다. 그러나 이들의 생각이 현재 어떻게 바뀌었는지는 잡지 ‘Harper's’의 조사에 드러난다. 이 잡지는 최근호의 ‘Harper's Index'에서 다음 결과를 발표했다.

테러범으로 의심받고 있는 미국 내 인원: 7만 명
이라크보다 미국이 세계 평화에 더 큰 위협이라고 생각하는 대학생: 전체의 30%

대학생들의 이러한 의식 변화는 강의 시간을 통해서도 느낄 수 있다. 이 학교 국제정치학 수업을 듣는 학생들은 최근 ‘미국이 세계평화에 기여하고 있나?’란 질문 아래 짧은 토론을 가졌다. 대부분의 학생들은 “그 나라들이 원하지 않는다면 제3자로서 요청에 의한 도움만 제공하는 것이 바람직하다”란 반응을 보였다. 한 학생은 ”미국이 세계사에 있어서 반드시 영웅이 될 필요는 없다”고 말하기도 했다. 평화 유지를 위한 전쟁을 고려하는 부시 대통령의 정책들이 오히려 역효과를 낳고 있다는 의견이 지배적이었다.

교수들도 이같은 학생들의 변화를 대체로 긍정적으로 받아들인다. 국제정치학 콤스 교수는 “학생들 대부분이 올바른 생각을 갖고 있어 다행입니다. 미국은 변해야 해요”라고 말했다. 또한 국제학부 티모시 히크만 교수는 “미국은 어느 나라에 가서나 주인처럼 행세하려는 태도를 버려야 합니다. 그렇게 간섭하기 좋아하면서 사과는 잘 안 하잖아요. 미군 장갑차 사건이 대표적이 예입니다. 하지만 흑인들에게 사과하는데 150년이나 걸린 전력이 있는 나라이니...그 태도는 좀처럼 변하지 않겠죠”라고 말했다.

God Bless the USA

미국의 맹목적인 애국주의는 아직 수그러들지 않고 있다. 지난 12월 31일 뉴욕 타임스퀘어 광장에서 열린 새해 전야 행사가 이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주최측이 75만 명 인파에게 나눠준 것은 미국을 상징하는 빨간, 파란색의 풍선과 성조기였다. 이들이 미국 국기를 흔들며 부른 노래는 Lee Greenwood의 ‘God Bless the USA.' 이 노래는 ’내 일생을 바친 모든 것이 사라져도 이 땅에 살고 있는 것을 감사할 것이다. 자유를 누릴 수 있는 이 땅에 대한 사랑을 확신한다‘는 내용이다. 이렇게 나라 사랑을 노래하던 이들은 새해를 알리는 카운트다운을 마친 후에도 USA를 연호하며 자리를 떠날 줄 몰랐다.

이같은 상황에 국제정세를 객관적인 눈으로 보는 소수가 반갑지 않을 수 없다. 그들 중에는 젊은 대학교수나 학생들이 대다수를 차지한다. 시사주간지 뉴스위크의 여론조사 결과, 현재 부시 대통령의 업무수행에 대한 지지도는 56%에 그친 것으로 나타났다. 또 응답자의 60%는 ‘무조건 전쟁을 생각할 것이 아니라 좀 더 시간을 갖고 대안을 찾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미국 내 애국주의의 열풍 탓에 정부에 대한 비판적인 시각을 갖고 있는 사람들은 ‘반미 미국인’ 취급을 받는 현실이다.

미국 대학생들은 이 나라가 ‘영구히 불완전한 나라(permanently unfinished country)’라고 배운다. 세계에서 모여든 각종 계층과 민족을 흡수해 언제든 변화할 수 있다는 뜻에서다. 그러나 정작 이들은 항상 넘치는 믿음으로 미국을 바라보도록 강요받고 있다.

우리나라 내의 반미 감정에 대한 보도가 나가면서 자주 받는 질문이 있다. “한국 사람들이 미국을 왜 그렇게 싫어한다고 생각하니?” 젊은이들이 무조건적인 애국주의에서 벗어날 때, 이들은 미국에 대한 증오가 어디서부터 오는지 알 수 있을 것이다.


정선호 기자 <realsuno@hot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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