셰익스피어의 희곡 속 '햄릿'이 아니더라도 '사느냐, 죽느냐'의 문제는 일견 고통과 부조리로 가득 찬 현실을 살아가는 현대인들에게 공통으로 던져진 화두다. 그러나 하루에도 몇 번씩 '이렇게 사느니 차라리 죽는 게 나아'라고 푸념하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정작 목숨을 포기하기보다 고단한 삶을 택하여 살아가고 있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 

정신의학자인 빅터 프랭클 박사는 종종 환자들에게 "왜 자살을 하지 않았습니까?"란 질문을 던졌다고 한다. 환자들의 대답은 다양했는데, 가족에 대한 사랑과 책임감 때문이라거나 자신의 능력을 아직 세상에 이바지하지 못했기 때문에, 혹은 추억 속에 잠겨서 살아가고 싶은 미련 때문에 등이었다고 한다. 프랭클 박사는 갖가지 어려움에 직면해서 죽음의 문턱까지 갔던 환자들이 각자에게 주어진 삶의 의미와 책임을 깨달았기 때문에 다시 현실로 발걸음을 되돌릴 수 있었다고 믿는다.  

프랭클 박사는 이처럼 '조각난 삶에 한 낱 실오라기처럼 남아있는 생의 의미와 책임을 견고한 직물로 짜만드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심리치료요법인 '로고테라피'를 창시했다. 실존적 성찰을 통한 의미치료라고 불리는 로고테라피의 명성은 그가 직접 세운 비엔나 신경과 외래환자 진료소로부터 유래해서 오늘날 많은 나라에서 그 효과를 인정받고 있다고 한다.

프랭클 박사의 대표적인 저서「죽음의 수용소에서」는 유태계 출신으로 2차 세계대전 당시 직접 아우슈비츠 강제수용소의 삶을 체험한 저자의 자전적인 이야기다. 프랭클 박사는 이 책이 수용소에서 간신히 목숨을 건진 한 사람-프랭클 자신-이 말해 주는 강제 수용소 안의 역사이자 수백 만 명의 사람들이 무수히 겪어야 했던 고통과 인간적 체험에 대한 보고서라고 말한다.

프랭클 박사는 심리학자로서 강제수용소에서의 하루하루가 평범한 죄수들의 마음 속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가에 초점을 두고 죄수들의 일상생활에서 발생하는 자질구레하고 조그만 고통과 행복에 관한 이야기를 하고 있다. 따라서「죽음의 수용소에서」는 우리가 이미 영화나 소설 등에서 충분히 접해온 끔찍한 대학살의 기록들과는 사뭇 다르다. 

이 책의 본격적인 내용은 나찌스 독일군들에게 붙잡혀온 저자를 포함한 유태인들이 각 지역의 수용소에서 가스실과 화장터가 설치된 중앙 대 수용소로 옮겨지는 소위 '수송'의 과정에서 겪는 심리상태로부터 출발한다. 프랭클 박사는 수송되기 직전의 재소자들은 하나같이 자기를 기다리고 있을 가족을 위해서 자기 목숨을 부지하고 친구들을 구해주자는 한 가지 생각에만 사로잡혀 있었다고 회상한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은 자기를 대신할 다른 죄수를 수송자 명단에 집어넣는 것도 주저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결국 피할 수 없는 운명에 따라 수송자 명단에 포함된 프랭클 박사는 다른 수 천 명의 재소자들과 함께 기차에 실려 며칠 밤낮으로 중앙 강제수용소로 수송되었다. 그는 당시의 광경을 다음과 같이 떠올린다.

「차 칸 안은 들어설 틈도 없었다. 오직 창문의 가장 위쪽 난 작은 틈바구니로 희뿌연 잿빛의 새벽빛이 겨우 스며들고 있었다. 모두들 기차가 군수 공장이 있는 곳으로 달려가 주기를 바라는 마음이었다. (중략) 잠시 후 기차는 덜커덩하는 소리를 내며 옆 선로로 들어섰다.  별안간 수심에 쌓였던 위쪽의 승객들 가운데서 고함소리가 터져 나왔다.

"팻말이 보인다. 아우슈비츠다!" 그 순간, 모든 사람들의 심장이 쿵하고 내려앉았다. 멈출 듯 하면서 천천히 나아가는 기차는 마치 끔찍한 현실-아우슈비츠의 제물이 될 승객들이 안쓰러운 듯 가능한 시간을 오래 끄는 것 같았다

밝아오는 새벽빛 속에 거대한 수용소의 윤곽이 차츰 드러났다. 길게 뻗쳐 있는 몇 겹의 철조망 담장, 감시탑, 그리고 알수 없는 목적지를 향해 쭉 뻗은 황량한 길을 따라 질질 끌려가고 있는, 초라하고 누추한 인간들의 기다란 행렬. (중략)

결국 우리를 태운 기차는 역으로 들어섰다. 최초의 침묵은 악을 쓰듯 질러대는 구령에 산산조각이 났다. 우리들은 전 수용소 생활을 통하여 그와 같이 거칠고 날카로운 음조의 고함소리를 그때부터 수없이 되풀이하여 들어야만 했다. 그들의 고함소리는 제물이 된 짐승의 마지막 비명과 흡사했다. 」

간결하지만 진실함이 묻어나는 주옥같은 표현들은 이 책이 강제 수용소의 삶에 대한 보고서임과 동시에 깊이 있는 수필문학으로 전개되고 있음을 드러내고 있다. 이 책의 서문을 쓴 골든 W.앨포트 는 "이 책이야말로 문학적으로나 철학적으로 가치를 가지고 있을 뿐 아니라 오늘날 가장 뜻깊은 심리학적인 움직임에 대해서도 감탄을 금치 못할 설명을 해주고 있다"고 극찬했다.

죽음의 수용소에서 실존주의로

프랭클 교수는 아우슈비츠 강제수용소에서 입소되는 순간부터 입고 있던 옷가지와 소지품, 신분 증명이 될 만한 모든 문서, 심지어는 연구하던 심리학 논문까지 빼앗겨 버렸다. 머리카락을 비롯한 온 몸의 털을 모두 깍인 후에 샤워장으로 내몰린 프랭클 박사는 샤워기에서 독가스가 아니라 진짜 물이 나온다는 사실에 안도의 한 숨을 내쉬던 순간, '잃을 것이라고는 벌거숭이 알몸' 밖에 없는 적나라한 실존을 경험했다고 한다. 그렇게 시작된 수용소에서의 삶은 그 전까지 자신을 규정하던 모두 가치를 부정당하고 인간으로서의 기본적인 권리조차 무시되는 극한의 시간들이었다. 매일 구더기가 들끓는 잠자리에 들며 사시사철 맨 발로 고된 노동에 시달리다 겨울에는 얼어터진 발을 감싸려고 그나마 부실한 담요를 찢어야 했다. 늘 뜻하지 않게 닥쳐오는 죽음 앞에서 동료가 아니라 자신이 살아 남았음을, 허기를 채우기에 턱없이 부족한 한 조각의 빵을 깨물며 확인하는 시간들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런 상황에서도 프랭클 박사는 물에 빠진 사람이 지푸라기라도 붙잡는 심정으로 천성인 낙관주의를 최대한 발휘하려고 애썼다고 한다.

프랭클 박사는 열악한 환경과 노동에 시달리면서도 짧은 순간이나마 사랑하는 아내를 떠올리면서 커다란 위안과 용기를 얻곤 했다. 당시 그는 수용소에서 헤어진 아내의 생사조차 확인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하지만 가장 사랑하는 사람을 명상함으로써 여전히 행복이 무엇인지 깨달을 수 있었다고 한다. 마음 속에서 이루어진 사랑하는 아내와의 대화는 그의 영혼을 죄수의 실존에서 다른 세계로 옮겨 놓을 수 있었던 것이다. 나아가 그는 아내가 살아있는지 아닌지 조차 문제가 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닫는다. 그래서 자신의 아내가 이미 죽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 날에도 조금도 동요되지 않고 아내와의 정신적 대화를 계속 해나갈 수 있었다고 한다. 프랭클 박사는 강제 수용소 안에서 비로소 생애 최초로 사랑이야말로 인간이 열망할 수 있는 궁극적이고도 지고의 목표라는 진리를 볼 수 있었다고 회고하고 있다.  

프랭클 박사는 4년 여 간의 강제 수용소에서 자신과 더불어 다양한 군상들의 삶과 죽음을 관찰해 나갔다. 동료 재소자들을 바라보는 그의 시선에서는 인간의 존엄성과 실존에 대한 깊은 통찰을 엿볼 수 있다. 결국 프랭클 박사는 나찌스의 강제 수용소와 같이 개인의 힘으로 어쩔 수 없는 상황에서도 인간은 '주어진 환경에 대한 자신의 태도를 선택할 수 있다'는 진실을 깨달았다고 한다.

삶의 의미에 대한 물음을 멈추고 삶이 우리에게 거는 기대에 대답하라

언제부터인가 내 머리 속을 잠식하기 시작한 의문들은 바이러스 마냥 자기 증식을 계속해왔다. 난 누구지? 나는 왜 태어났고 살아가는 의미는 무엇일까? 난 쓸모 있게 살고 있는 걸까? 과연 이 세상에서 쓸모 있게 사는 사람들이 얼마나 될까? 하지만 인간의 가치를 쓸모 로 따질 수 있을까? 그렇다면 가치의 기준은 또 무엇일까? 기준이 있기나 할까? 사랑 또한 현실 세계에 있는 걸까? 있다해도 내가 진정한 사랑을 할 수 있을까?

이런 '삶의 의미 바이러스'에 프랭클 박사는 과감히 백신을 투여한다. 그는 이런 질문들에 함몰되기 시작하면 보다 거창하고 그럴듯한 의미를 만들어내는 일에 급급하게 된다고 경고한다. 요즘의 내 머리 속을 훤히 들여다보인 듯 한 뜨끔함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체 게바라의 시들을 읽으며 그의 삶과 죽음에 매료되어 막연한 인류애에 들뜨기도 하고, 많은 영화에서 반복되는 구세주 모티브-일신의 보존보다 타인을 위한 일을 할 때 세상을 구할 수 있는 큰 위력을 발휘한다는-에 감동 받아 취해있지 않았던가. 그러나 의미를 추구하고자 하는 이상이 높아질 수록 정작 현실에서 사소해 보이지만 뜻깊은 일들을 찾아내고 행하는데 소홀해 지기 쉬운 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프랭클 박사는 이제 질문을 멈추고, 머리 속에 그럴듯한 의미를 채워 넣으며 만족하지도 말고, 하루하루의 일상에서 삶이 요구하는 바를 묵묵히 해나가야 한다고 말한다. 자신을 한없이 초라하게 만들고 보잘것없이 느껴지는 일이라도 피하지 않고 묵묵히 해낼 때 그것은 다른 무엇으로도 대체할 수 없는 절대적인 가치를 지니게 된다는 것이다. 너무 현실 순응적이 아닌가라는 비판도 있을 수 있다. 하지만 도저히 어쩔 수 없는 상황에서는 그것을 받아들이는 일이 오히려 살아갈 날들에 대한 긍정적 태도와 의지를 갖게 하기도 한다. 이런 인간의 의지가 지속될 때 결국 삶을 바꿀 수 있는 장기적이고 실질적인 힘이 되는 게 아닐까?

프랭클 박사 역시 아무리 절망적인 상황이라도 우선 받아들이고 무엇보다 감정의 평정을 잃지 않도록 스스로 의미를 부여하며 주어진 현실을 극복해 나갔다. 그는 자신이 수용소에서 보낸 기간을 결코 잊고 싶은 무의미한 시간으로 치부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에게 있어서 삶의 의미와 사랑이라는 진리를 깨닫게 해준 무엇보다 소중한 경험이었다고 자부한다. 당시의 체험을 바탕으로 그는 로고테라피라는 심리치료 요법을 창안할 수 있었다. 그의 이론은 크고 작은 갖가지 문제들로 고통을 받고 있는 현대인들의 정신적인 상처를 치료하는데 가장 효과적인 심리요법 중의 하나로 인정받고 있다. 이런 프랭클 박사의 삶을 정확히 예증하고 있었기 때문일까? 그는 "살아야 할 이유를 아는 사람은 거의 어떠한 상태에서도 견뎌낼 수 있다"는 니체의 말을 즐겨 인용했다고 한다. 그렇다면 지금, 여기, 내가 살아야 할 이유는 무엇일까?「죽음의 수용소에서」를 읽으며 내 삶을 맴돌고 있는 몇 가닥 의미의 끈을 살며시 쥐어 볼 수 있었다.
 

김재은 기자 <dewedit@dreamwiz.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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