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중-경기고-서울대. 이른바 KS마크를 찍은 사람들은 현재 사회의 주류를 형성하며 기득권 층에 있어야 온당하다고 여겨진다. 이 학력을 소지하고도 그는 23년 간의 프랑스 망명생활을 했고 생계를 위해 택시 운전대를 잡아야 했다. 문화 비평 에세이 '나는 빠리의 택시 운전사', '쎄느강은 동서를 나누고 한강은 남북을 가른다'로 한국에 똘레랑스(관용)에의 관심을 불러일으킨 홍세화(57)씨다. 그는 최근 문화비평서 '악역을 맡은 자의 슬픔'을 출간했다. "프랑스에 있을 때 쓴 책들은 관찰자의 시각으로 썼다면 이번 책은 직접 한국 사회에 몸담고 있는 참여자의 시각으로 쓴 것입니다."

그는 2001년 1월에 영구 귀국하여 한국에 정착했다. 한국에 돌아와 그에게 가장 충격적인 것은 황금만능주의가 팽배한 사회 분위기이다. 새해 인사도 '부~우자 되세요'로, 좋은 아빠가 아닌 부자 아빠를 꿈꾸며, 능력을 보여주는 척도가 돈을 쓰는 규모로 변해 있었다. "광고는 그 사회가 중요하게 생각하며 닮고 싶어하는 모습을 가장 잘 보여줍니다. 한국에서 이런 광고들이 유행을 하는 것은 한국 사회가 얼마나 물질 중심적인지를 반증하는 겁니다. 그런데 왜 이런 심각한 사회 현상들을 토론하고 고민하는 지식인이 없는지 안타깝습니다."

사회 귀족의 나라

참여자로서 바라본 한국을 말하다보니 '악역을 맡은 자의 슬픔'은 저번 책들보다 강도 높은 비판을 담고 있다. 한국을 사회 귀족의 나라로 지칭하는가 하면, 제 역할을 하지 않는 지식인들에 대한 비난도 거침없다. 특히 엘리트층의 대표격으로 여겨지는 이회창씨에게 쓴 편지는 노블리스 오블리제(높은 사회적 신분에 상응하는 도덕적 의무) 관념이 없는 사회 주류에게 날카로운 일침을 놓는다.

홍세화 씨는 이 사회 귀족들을 "뻔뻔함이 몸에 밴 사람들"이라고 한다. 그리고 사회가 그들을 용인해왔기 때문에 더욱 뻔뻔해질 수 있었다고 말한다. 기득권을 빼앗기지 않기 위해 정· 재계, 심지어 학계까지 장악하고 사회를 그들의 구미에 맞게 좌지우지하는 데 전혀 책임감을 느끼지 않는다. 똘레랑스 사상에 따르면 이런 계층도 받아 들여야 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의문이 들 수도 있다. 그러나 그의 의견은 단호하다.   

...앵똘레랑스(불관용)가 헤게모니를 쥔 곳에 똘레랑스는 설 자리가 없다. 요컨대, 똘레랑스 세력도 앵똘레랑스 세력에 대하여는 앵똘레랑스로 대응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이다. 다시금 강조하거니와 똘레랑스의 부드러움은 앵똘레랑스에 대한 단호한 앵똘레랑스를 조건으로 하는 것이다.

                                                                                                      -본문 내용 中-

기득권을 위한 신자유주의

신자유주의도 사회 귀족층이 책임을 회피하는 데 좋은 도구로 작용하였다. 우리나라에 도입된 신자유주의는 '강요된' 것이었다. 사회 내부의 충분한 논의 없이 무조건적인 해결책으로 제시됐다는 것이다. 그 결과 IMF를 불러온 사회 기득권이 면죄부를 받을 수 있었다. 특히 재벌 개혁, 언론 개혁 등 반드시 해결됐어야 할 문제들이 가려졌다. "사실 그 시기에 사회 기득권 층이 IMF를 불러왔다는 죄책감을 갖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정부는 그들에게 신자유주의를 도입하게 하여 노동자층에게 모든 책임을 떠넘겼습니다."

그는 신자유주의가 경제 외적인 면에도 도입이 된 것이 큰 문제라고 지적한다. 교육, 문화 등 경제적으로 산출될 수 없는 것들에도 신자유주의가 도입되어 많은 부작용을 낳고 있다는 것이다. 그는 '교육인적자원부'라는 교육부의 바뀐 명칭을 그 예로 든다. "어떻게 사람이 '자원'이 될 수가 있습니까? 인적 자원이란 단어는 미국 기업의 한 부서 이름입니다."  

교육에 관한 이야기가 나오면서 그의 목소리가 커졌다. 그는 한국에서 틀에 박힌 교육을 받았고 그의 자녀들은 한국의 교육과 완전히 다른 프랑스 정규 교육을 받았다. 책 곳곳에는 그가 직접 경험한 두 나라의 교육 제도를 비교하는 부분이 있다. 그는 한국 교육의 문제점을 지적하면서 대학 평준화를 해결 방안으로 제시했다. 현재 수능 점수별로 줄을 세워 일류학교에 들어가는 방식으로는 대학을 가기 위한 경쟁만 치열할 뿐이다. 그러나 평준화가 될 경우 대학 입학 후의 학업에 더 충실할 수 있다. 때문에 그는 평준화만이 진정으로 국가경쟁력을 키우는 길이라고 말한다. 홍세화씨가 궁극적으로 바라는 것은 학벌 없는 사회이다. 실제로 그는 시민단체 '학벌 없는 사회'의 공동 대표이다. 소위 SKY대학이라 불리는 명문대를 졸업한 학생들은 죽을 때가지 따라다니는 학벌 때문에 공부를 게을리 해도 일단 졸업을 하면 사회에서 유리한 고지를 차지한다. 이 때문에 사회 기득권 층은 바뀌지 않는다. 그는 프랑스 공교육 제도가 한국 교육 개혁의 참고서가 될 수 있다고 말한다. 물론 프랑스 사회에서도 기득권이 세습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세습되는 기득권세력은 극소수에 불과하며 그들이 얻은 것을 사회에 환원할 줄 안다는 점에서 한국의 기득권과 다르다.            

젊은 벗들에게

마지막으로 요즘 대학생들에 대해 묻자 그는 '버릇없는 세대'라고 말한다. 부모 세대인 베이비 붐 세대와는 달리 한 가정에서 적은 자녀를 두기 때문에 귀하게 자랐고 이 때문에 자신을 억압하는 권위에 강한 거부감을 갖는다. 어떤 권위든지 거부하기 때문에 탈정치화하는 경향이 나타난다. 물론 지금까지의 사회를 지배하던 권위는 부조리한 면이 많았기 때문에 그 권위를 거부하는 젊은이들이 상대적으로 올바르게 보였다. 그러나 이제는 썩은 권위를 거부하는 것에서 더 나아가 올바른 권위를 성립하려는 노력이 필요한 때다. "탈정치화, 황금만능주의에 물든 젊은 세대에 실망할 때도 많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올바른 권위를 확립하고 보다 나은 사회를 만들어가길 기대합니다. " 

스스로를 악역으로 칭하는 그는 앞으로도  계속 책을 쓸 생각이다. 그는 현재 한겨레 21의 기획위원으로 있으면서 3주에 한번 글을 기고한다. 그 외에도 아웃사이더의 편집위원으로 활동하면서 날카로운 비판들을 쏟아내고 있다. 한국 사회는 그의 쓴 소리를 소화하면서 고질병을 고쳐나가게 될 것이다. 그는 사회에 꼭 필요한 악역이다.
 

최영락 기자 <poineta@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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