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가 조금 늦었죠?" 걸걸한 목소리로 한 여자가 말을 걸어왔다. 싸늘한 겨울 바람이 불던 대학로의 어느 저녁이었다. 영화에서 보여주던 냉랭함과는 달리 털털한 웃음을 지으며 인사를 하는 그녀의 모습은 무척 밝아 보인다. 변영주 감독의 영화 '밀애' 속 짧은 머리의 '은연'은 다른 사람들이 다가오는 것을 경계하고, 세상을 피해 달아나던 모습이었는데. 그 캐릭터가 너무 강렬했던 탓인가. 왠지 어색함이 느껴진다. 약간 긴 단발머리에 파마를 한 그녀는 '은연' 일 때와는 많이 다르다. 다가가기 힘들 것이라는 예상을 깨고, 그녀는 환한 웃음을 띄며 말을 건낸다. 영화 속 캐릭터와 실제는 많이 다른가보다. '밀애' 이후, 대학로에서 '19그리고80'이라는 연극에 출연중인 윤다경(31)씨를 만나보았다.

연극의 세계에 발을 담그다

이화여대 독문학과 91학번인 그녀는 대학재학 시절 독문학을 공부하면서 희곡에 대한 깊은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희곡을 더욱 알고 싶어 덤벼들었던 연극이 현재의 그녀를 있게 만들었다. 91년인 대학 1학년 시절, 과 동아리에서 연극을 시작한 이래 횟수로 13년째 연기를 하고 있는 셈이다. "연극 속의 나를 통해 하나의 새로운 캐릭터가 만들어지는 것에 희열을 느껴요"라고 말하는 그녀는 연극계에 발을 들이민 자신에 대해 강한 자부심을 가지고 있는 듯 하다. 연극을 처음 시작할 때 부모님의 반대도 없었다. 일반적으로 연기를 한다고 하면 집에서의 반대가 심할 것이라 예상한다. 그러나 그녀의 부모님은 그렇지 않았다. "저희 부모님께선 자식들이 하는 일에 대해 제한이 없어요. 개방적으로 키우셨죠."

대학로에서 94년 처음으로 연극무대에 오른 후 그녀가 출연한 출연작만 해도 약 14편. 현재는 대학로에 위치한 정美소에서 '19그리고80'이라는 연극에 출연중이다. 이 공연은 19세의 해롤드와 80세의 모드와의 사랑을 담고있다. 그녀는 해롤드의 맞선 상대로 나오는 3명의 여자 역을 맡아 1인 3역을 분하고 있다. 한 사람을 제대로 표현하기도 어려운데, 그녀는 세 명의 상이하게 다른 캐릭터의 여성을 표현해 낸다. 마치 각각 다른 사람이 그 역을 연기하고 있는 듯 하다. 너무 연기를 실감나게 하는 통에 관객들은 그녀가 나올 때마다 큰 소리로 웃고 박수쳤다.

연극과 인생의 가운데 서다

그녀가 대학시절 함께 연극하던 친구들은 현재 직장에서 일을 하거나 가정 주부로서 살아가고 있다. 물론 그녀처럼 혼자 사는 친구들도 있다. "이대인으로서 연극계 안에서 살아가는 것은 허허벌판에서 헤엄치는 것이나 다름없어요. 중대나 서울예전 등 자기 출신 대학을 중심으로 연극인들이 뭉치고 그러거든요. 아직까지 연극계 내부에서 이대 출신도 별로 없고..." 이러한 이유 때문인가. 그녀는 대학 재학 시절 연극 학회 등을 쫓아다니며 사람들을 알아갔다. 그녀의 그런 노력 덕분에 대학 재학 시절 중, 대학로에서 연극 할 기회를 가졌다. 지금까지 연극을 하면서 배우라는 것에 대한 자부심을 느껴왔지만 많은 현실 문제에 부딪혀 힘들기도 했다. "아직 연극계의 현실은 굉장히 어려운 편이에요. 생계나 일상을 책임지기엔 문제가 많죠. '연극 정신' 이라는 이름 하에 연기자들이 희생당하는 경우가 많아요." 30살이 넘은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부모님께 의지해야 하는 자신의 나약한 모습을 솔직하게 털어놓는 그녀. 힘든 현실을 짊어지고 있는 연극인은 비단 그녀 혼자만이 아닐 것이다. 연극계와 연극인 대부분이 현실적인 문제로 어려움을 겪고 있으니까.

2001년 10월, 그녀는 '한여름밤의 꿈' 이라는 작품을 마지막으로 연극을 접으려 했다. 결혼을 하기로 결심했기 때문이다. 대학 1학년 때 처음 만나 사귀게 된 남자와 결혼을 하기로 마음을 먹었다. "그는 제가 연극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어요. 둘 중 하나를 포기하라고 했죠. 제가 성인이 된 이후 연극과 그 남자가 제 인생의 두 축이었는데, 그는 제 인생의 절반을 포기하길 원했어요." 그녀는 결혼을 선택했지만, 그 남자는 떠나버렸다. 그와 헤어진 6개월 동안 아무 것도 하지 못했다. "그에 대한 미움보다 제 자신에 대한 생각을 많이 하게 되었죠. 울기도 많이 울었어요." 담담하게 웃으며 말했지만, 순간 그녀의 눈에 눈물이 글썽이고 있었다. 이 후, 그녀 인생의 절반이었던 연극만이 남게 되었고, 그 나머지 하나를 위해 최선을 다했다.

'밀애' 속 '은연'을 말하다

실연의 아픔을 통해 그녀는 자신을 되돌아보게 되었고, 새롭게 태어나고 싶었다. 그리고, 그녀는 자신의 이름을 버렸다. 우리가 알고 있는 그녀의 이름은 '윤다경'. 그러나 그녀의 본명은 '손지나'다. 그녀가 '밀애'를 찍으면서 처음 예명을 사용하기 시작했다. 자신의 이름을 버린 대신 그녀는 새롭게 태어났다. 영화 '밀애' 속 '은연'을 통해서 말이다. "'밀애' 속에는 많은 여자들이 등장하죠. '미흔'역도 당연히 매력적이었지만, 전 왠지 '은연'이 더 끌렸어요." '은연'은 어두운 여자다. 남편을 피해 딸과 도망 다니지만, 항상 남편은 그녀를 찾아낸다. 숨을 곳이라곤 없다고 생각하는 '은연'. 그녀는 세상을 경계하고 사람을 불신한다. 그녀는 이렇게 '은연'을 말한다. "제가 살아온 인생 보다 '은연'이 살아온 인생이 더 처절하죠. 하지만 제가 겪은 실연의 상처와, 밑바닥 인생을 사는 사람들에 대한 성찰, 그리고 사랑에 대한 저의 고민이 '은연'이라는 여자를 새롭게 탄생시켰어요."

"'은연'이 남편을 피해 도망 다니는 모습은 제가 헤어진 남자친구와 다투고 토라지던 당시의 부분적인 마음과 다를 바가 없다고 생각해요." 그녀는 그런 은연을 표현하기에 앞서 자신의 심정으로 먼저 생각해 본다. '이 상황에서 내가 은연이었다면 어떤 마음이었을까.' '은연'이 남편에게 맞아서 피를 흘리는 장면은 관객들뿐만 아니라 그녀에게도 가장 기억에 남는 장면이라고 한다. "그 신을 찍기 위해 남편 역을 맡은 분과 소주 한잔을 했죠. 그리곤, 정말로 싸웠어요." 그 장면에서 그녀의 옷이 다 찢어지고 가슴까지 다 드러났다. 하지만 그런 것들은 개의치 않는다. 쓸데없는 노출이 아니라 정말 그 장면에선 처절하리만큼 필요했으니까.

더 나은 배우로 나아가다

대학로의 한 커피숍에서 두 시간동안의 대화를 가진 후, 저녁을 먹으러 자리를 옮겼다. 그녀는 '윤다경씨' 보다, '언니'라는 호칭이 더 자연스럽게 되어버릴 만큼 사람을 편안하게 한다. 저녁을 함께 먹으며 배우로써 살아가는 것이 어떤가에 대해 물어보았다. "제 스스로에 대한 고민을 해 볼 수 있고, 다른 이들의 인생을 경험하면서 세상을 이해하게 돼요. 그게 배우로써 살아가는 가장 큰 장점이죠." 영화 '밀애'를 통해서 알려지긴 했지만, 연극 무대에서도 계속해서 발전된 모습을 보여주기 위해 노력할 것이라는 그녀. 연극이든 영화든 자신에게 주어진 역할이라면 언제든지 환영이라고 한다. 언제 어떤 분야에서든 새롭게 태어난 그녀의 모습을 발견하게 되길 기대해본다.
 

최정민 기자  <jmini014@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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