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혜진 수습기자

짐승 같은 인간

마지막 대박, 서갑숙 운동, 안전한 고수익 투자. 거친 광고들에 짜증이 나던 참이다. '짐승 같은…' 네 글자가 눈에 박힌다. 조선일보 1월 21일자 기사였다. 20대 남자 두 명이 사람을 죽이고, 성폭행 한 여자에게 그 시신을 토막 내라고 했단다. 서늘한 웃음이 나왔다.

짐승 같은. 인류는 얼마나 오만한가. 짐승은 시신을 톱질할 수 없다. 인간 고유의 잔인함이다. 인간 같은 게 따로 있던가.

리처드 도킨스는 1976년 '이기적 유전자'를 발표했다. 그의 이야기는 간단했다. '인간은 유전자 증식을 위한 기계이다. 유전자가 이기적인 이상, 인간도 이기적이다.' 20년 후, 과학기자 매트 리들리는 '이타적 유전자'를 내놓았다. 한 걸음 더 나간다. '인간은 이기적이다. 고로, 이타적인 행동을 한다. 인간은 맘모스를 통째로 먹을 수 없다. 때문에 열렬한 협동주의자가 되었다.'

인간이 이기적인가, 이타적인가를 논하는 자체는 의미 없을지 모른다. '모든 인간은 이기적이다'는 '인간은 모두 죽는다'처럼 오랜 경험에서 얻어진 상식이다. '모든'에서 망설여지긴 한다. 테레사 수녀, 그는 분명 달랐다. 그러나 종교적 훈련의 결과였다. 그나마 교육의 힘도 인간의 본성 앞에서는 무력하기에 테레사 수녀가 성인(聖人)으로 회자되는 게 아닌가?

그래도 인간은 악하다

인간은 폭탄이다. 솜털에 싸인 폭탄이다. 어느 정도의 자유와 만족이 있다면 남에게 너그러워도 된다. 명예욕 또한 포기하기엔 아깝다. 욕심을 부려 인심을 잃을 필요는 없다. 인심은 곧 돈이다. 봉사는 뿌듯하다. 동정은 즐겁다.

인류의 오락에서도 인간의 이기성을 우회적으로 감상할 수 있다. 학대에 가까운 것들이 웃음의 재료가 된다. 무성영화에서도 넘어지고 자빠지는 코미디는 단연 인기였다. 이제는 소방훈련, 번지점프를 시킨다. 인기투표에서 한 표도 못 얻은 출연자의 얼굴을 감상하는 맛도 좋다. "유치하다"면서 또 보고 웃는 게 사람들이다. 어린 시절을 회상해보자. 개미, 잠자리 등을 괴롭히던 추억이 떠오른다. 날개를 떨어뜨리거나 돋보기로 햇빛을 모아 태웠다. 지금은 어떤가? 싸움구경, 불구경은 스릴 만점이다. 깨고 부수는 할리우드 영화 아니면, 불륜 드라마가 재미있다.

비인간적인 어떤 것도 낯설지 않도록

악의 다양한 형태에 대해 연구해 온 프랑스의 철학자 앙드레 글뤽스만은 '제 11계명(1991)'에서 11번째 계명을 제시한다. 글뤽스만은 기본적으로 인간은 악하다는 입장이다. 선을 향한 열정도 결국은 악을 낳게 된다고 주장한다. 선에 대한 관념 자체가 이기적이기 때문이다. 유대인은 유대인을, 독일인은 독일인을 최고로 생각한다. 가난한 사람은 평등이 우선이고, 재벌들은 자유가 더 좋아보인다. 자신이 갖고 있는 것, 유리한 쪽이 선이다. 11번째 계명은 "비인간적인 어떤 것도 네게 낯설지 않게 하라"였다. 즉, 자신 안에 존재하는 악을 직시하라는 명령이다.

우울한 결론이다. 인간은 인간답지 않다. 우리에게 진정한 선(善)은 없는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선에 가장 가까운 것은 '위선'(爲善)이 아닐까? 선행, 현명한 이기주의다. 내 안의 이기성을 부인하는 것은 어리석다. '됨됨이나 하는 짓이 사람으로서의 조건에 어그러짐이 없다.' 국어사전 속 '인간답다'의 의미다. 2003년 오늘, '사람으로서의 조건'은 무엇일까? 내 안의 악(惡)을 응시할 수 있는 능력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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