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안하게 웃는 얼굴과 나긋나긋한 말솜씨. 정세균 전 국무총리의 별명은 ‘미스터 스마일’이다. 그는 어떤 자리에서 누구와 대화를 하든 철칙이 있다. 상대에게 매너 지키기.

대학 동기이자 오랜 친구인 송인회 건설근로자공제회 이사장은 “내 친구 정세균은 누구와 무슨 말을 하든 상대 인격을 존중한다”고 말했다. 송 이사장은 까닭이 있다고 말했다. 정 전 총리가 오래전부터 정치를 꿈꾸면서 대통령이 되겠다는 포부를 간직했기 때문이다.

▲ 정세균 전 총리의 프로필 사진(출처=페이스북)

정 전 총리는 국민학교를 다닐 때부터 정치인의 꿈을 새겼다. 열 살 남짓의 나이에 장래 희망을 대통령이라고 쓰는 어린이가 많던 시절. 1960년의 제5대 민의원 선거 벽보를 보고 산골 소년은 정치의 길을 꿈꿨다.

그는 전북 진안의 산골 마을에서 태어났다. 7남매 중 셋째. 초등학교 때는 월반을 할 정도로 영민했지만 집안 형편은 중학교를 보낼 정도가 되지 못했다.

학력이 인정되지 않는 고등공민학교를 다니고 검정고시를 합격한 뒤 전주공업고등학교에 들어갔다. 가난 때문에 국민학교 때는 8리를 걸어서, 고등학교 때는 20리를 걸어서 다녔다.

전주라는 큰 도시에서 정치라는 큰 꿈을 이루기 위해 대학에 가야 한다는 사실을 알았다. 결심하고 전주신흥고등학교의 교장실을 찾았다. 성적표를 보여주고 대학에 가겠다는 강한 의지를 피력했다.

교장은 모의고사 문제로 테스트했다. 당시 입학생 중에서 1등보다 높은 점수가 나오자 교장은 곧바로 입학을 허락했다.

“학비만으로는 다닐 수 없으니까 생활비도 마련해 달라고 했다는 거예요.” 송 이사장이 전한 정 전 총리의 당돌함이다. 신흥고 교장은 고심 끝에 학교 매점에서 일하게 했다.

그렇게 정 전 총리는 매점에서 빵을 팔며 학교를 다녔다. 친구들이 빵돌이라고 부른 이유다. 하지만 화 한 번 내지 않고 빵을 건넸다고 한다. 빵돌이 별명은 자부심이 됐다. 없이 살아본 설움을 누구보다 이해하는 밑거름이기 때문이다.

▲ 앞에서 왼쪽이 빵돌이로 불렸던 고등학생 정세균이다. (출처=트위터)

정 전 총리는 8월 5일 YTN이 주최한 후보자 토론회에서 인생 영화로 ‘학교가는 길’을 꼽았다. 장애아의 학부모들이 특수학교를 세우기 위해 거리로 나선 이야기다. “장애인이 살기 좋은 나라가 진짜 좋은 나라이고 선진국이라고 생각한다.” 영화를 소개하며 했던 말이다. 
공부를 잘해서 장학금을 타자 매점에서 일할 필요가 없어졌다. 그리고 학생회장 선거에 도전하기로 했다.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나 낮에 일하고 밤에 공부하는 빵돌이 같은 친구에게 힘이 되는 학생회장이 되겠다고 다짐했다. 어린 시절부터 연습한 웅변 실력으로 당선됐다.

좋은 기업에서 일하다가 국회의원이 되고 당 대표, 국회의장, 국무총리를 지냈다. 스펙만 놓고 보면 고생이라고는 몰랐을 것 같다는 오해를 많이 받는다.

그를 20년 넘게 보좌한 고병국 서울시의원은 “큰 꿈을 목표로 두고 어려움을 겪으면서도 차곡차곡 쌓아온 사람”이라고 표현했다.

국회에서 1월 8일 열린 긴급 현안 질의에서 정 전 총리는 목이 메어 말을 잇지 못했다. “영업을 못 하면서 임대료를 부담해야 하는 자영업자의 눈물을 어떻게 닦아줄 것인가.” 말끝에 목소리가 떨렸다.

송 이사장은 친구의 눈물이 진실이라고 말했다. 고병국 의원은 자신의 책 ‘법 만드는 청소부’에서 정 전 총리의 눈물은 고등학교 시절 빵돌이 설움에서 시작됐을 것이라고 설명했다.

▲ 고려대 총학생회장 시절(출처=블로그)

삼수 끝에 들어간 대학에서 정 전 총리는 정치인의 꿈을 위해 다시 달렸다. 은사인 고 이문영 교수는 “돈을 벌기 위해서 정치를 할 생각은 하지 말라”고 가르쳤다고 한다.

대학 2학년이던 1972년, 10월 유신이 선포됐다. 법학과를 다녔지만 유신헌법을 공부할 수는 없다고 생각해 사법고시를 접었다. 기자가 되겠다고 결심했는데 동아일보 해직사태가 터졌다. 몸담고 싶던 언론사가 탄압을 받는 모습을 보고 다른 길을 찾았다.

해외에서 많은 걸 배우고 싶어 쌍용그룹 산하의 종합무역상사에 들어갔다. 뉴욕 지사에서 4년, 로스앤젤레스 지사에서 5년을 근무했다.

‘수출만이 살길이다’는 표어가 국가의 모토였던 시절이었다. 발로 뛰며 뭐든 팔았다고 한다. 그러면서도 뉴욕대에서 행정학을 공부했고 로스앤젤레스의 페퍼다인대서 MBA를 취득했다. 김대중 정부 시절에 경제통으로 자리잡을 밑거름이 되었던 시간이다.

▲ 정세균 전 총리(왼쪽)가 뉴욕에서 근무하던 시절(출처=페이스북)

김대중 전 대통령과 인연을 맺은 건 뉴욕에서 근무하던 때였다. 정치 활동이 금지된 김 전 대통령은 당시 미국에 머물렀다. 유명 토크쇼 ‘나이트 라인’에서 김 전 대통령을 보고 깊은 감명을 받았다.

그들은 컬럼비아대에서 처음 만났다. 강사로 초빙된 김 전 대통령에게 ‘나이트 라인’ 이야기를 꺼내며 가까워졌다고 한다. 그 후 다시 만난 건 정치에 입문하기로 결심한 후였다. 인사를 드리기 위해 김 전 대통령의 동교동 자택을 방문했다.

김 전 대통령은 그를 한눈에 알아보고 경제통으로 발탁했다. 조승래 더불어민주당 의원은 “김대중 전 대통령이 그의 풍부한 경제 현장 경험을 눈 여겨 봤다”고 설명했다.

그 후 김 전 대통령의 1997년 대선을 위해 뛰어다녔다. 초선 국회의원으로 연청(민주연합청년동지회) 회장을 맡아 전국 조직을 총괄했다.

김대중 정부는 당선 직후에 경제위기를 극복해야 했다. 정 전 총리는 노사정위원회에 참여하면서 파업 현장의 중재자로 나섰다. 1998년 울산 현대자동차 공장에서 대대적인 파업이 일어났다. 국가 파산 때문에 시작된 정리해고를 반대하는 파업이었다.

당시 노무현 부총재와 함께 도착한 현장은 생각보다 심각했다. 도장 라인에 페인트가 꽉 찬 솥을 두고 조금이라도 자극하면 당장이라도 불을 붙일 기세였다고 한다. 엄청난 긴장과 압박 속에서 의원들은 7박 8일의 중재를 시작했다.

노사 양측의 의견을 모아 중재안을 만들었다 모두를 만족시킬 수는 없기에 돌아오는 건 욕밖에 없었다.

노무현 전 대통령과의 인연은 정치에 입문할 때부터 시작됐다. 당시 민주당의 노무현 부총재는 지역위원장 경합 과정에서 정 전 총리를 지지했다.

빚을 갚기 위해 노무현 후보의 대선기획단 정책실장을 맡는다. 지지율이 떨어져 의원들이 캠프에 나오지 않고 당이 적극 지원하지 않을 때도 정 전 총리는 캠프를 떠나지 않고 지켰다.

노 전 대통령에 대한 탄핵 소추안이 발의됐을 때도 마찬가지. 탄핵안을 막기 위한 농성에서 의장석을 지켰다. 그는 자신을 ‘노무현의 적통’이라고 주장한다.

17대 총선에서는 전북 진안·무주·장수·임실군에서 3선에 성공했다. 열린우리당 또한 과반의석을 달성하며 압승했다. 정 전 총리는 열린우리당의 원내대표가 된다.

노무현 전 대통령은 정 전 총리를 산업자원부 장관으로 임명했다. 가장 막중한 일은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체결이었다.

당시 보좌관이었던 고병국 서울시의원은 정 전 총리가 주도한 한미 FTA 성적은 “미국이 인정할 정도로 대한민국의 판정승이었다”고 말했다. 2007년 협상 타결 이후 미국에서 추가 협의를 요구할 정도였다. 고 시의원은 “그만큼 처음에 우리가 잘했다는 이야기다”라고 덧붙였다.

이명박 정부 시절에 정 전 총리는 통합민주당의 최고위원을 맡았다. 이때 자신이 모신 두 대통령을 차례로 떠나보냈다.

연고지였던 전북 지역구에서 4선에 성공했지만 후진에게 양보하고 새로운 도전을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2009년 봄의 재보궐선거를 앞두고 ‘호남 불출마’ 선언을 했던 이유다.

2011년 경기 성남의 분당에서 보궐선거를 치르게 되자 손학규 바른미래당 전 대표가 종로를 떠났다. 당시 종로는 보수당의 성지 같았다. 13대부터 18대까지 민주당이 한 번도 이기지 못했다.

정 전 총리는 종로 보궐선거에서 나섰다. 상대는 한나라당 원내대표를 지낸 홍사덕 전 의원이었다. 정 전 총리는 득료율 52.26%로 승리했다. 그리고 2016년 4월 재선에서 득표율 52.6%로 오세훈 후보에 이겼다.

6선 의원으로서 그는 2016년 6월 국회의장으로 선출됐다. 그 후 문재인 정부가 총리 후보로 지명했다. 사상 첫 국회의장 출신 총리 후보였다.

송인회 이사장에 따르면 정 전 총리는 처음에 거절했다고 한다. 입법부 수장이었던 인사가 총리직을 맡을 수는 없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그러나 결국 2020년 1월 제 46대 국무총리가 됐다.

▲정 전 총리는 밥 잘 짓는 ‘경제 대통령’이 되겠다고 선언했다. (출처=정세균 페이스북)

정 전 총리는 6월 17일 서울 마포구 상암동 누리꿈스퀘어에서 여권에서 처음으로 출마를 공식선언했다. ‘강한 대한민국, 경제 대통령’이라는 슬로건을 내걸었다.

그는 “밥을 퍼주는 일도 중요하지만,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새로운 밥을 지어내는 역동성”이라며 ‘밥 짓는 대통령’이 되겠다고 했다. 또 풍부한 경험을 토대로 복지만이 아닌 경제 성장을 통해 사회적 격차를 해소하겠다고 강조했다.

경쟁 후보였던 이광재 의원은 7월 5일 국회에서 정 전 총리와 기자회견을 같이 열었다. 여기서 이 의원은 “정 후보로의 단일화를 결심했다. 안정 속에서 개혁이 지속돼야 대한민국이 미래로 희망으로 나아갈 수 있다”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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