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에타(Fieta). 십자가에 못 박혀 죽은 후 땅으로 끌어 내려진 예수를 어머니 마리아가 무릎 위에 눕혀놓고 내려다보는 모습을 형상화한 조각이나 그림을 가리킨다. 인간으로서 가장 참혹하고 견디기 어려운 비극적인 상황을 예술로 승화한 작품이 피에타다. 라틴어 ‘피에타스(PIETAS)’에서 나왔다.

로마의 정치인이자 공화주의자인 키케로(BC 106~43년)는 젊은 시절에 썼던 저서 <발상에 관하여(De Inventione)>에서 ‘피에타스’를 국가에 대한 충성, 부모에 대한 효심, 가문에 대한 헌신이라고 표현했다. 피에타스는 동시에 이런 정신적 가치를 상징하는 여신이었다.

피에타스의 라틴어 형용사형은 ‘피우스(PIUS)’로 경건하고 충성심이 강하다는 의미다. 로마 5현제 시대의 4번째 황제인 안토니누스 피우스(재위 AD 138~161년)의 이름에서도 이 단어를 발견할 수 있다. 로마 원로원이 이 황제의 경건한 삶의 태도를 보고 존칭으로 붙여주었다. 피우스 황제는 기독교에 대한 박해를 중단한 사실로도 유명하다.

그렇다면 왜 인류의 위대한 종교적 자산을 경건함, 자식의 도리인 효와 같은 뜻을 가진 피에타라고 부를까. 사랑하는 자녀를 먼저 보내는 부모라면 누구나 마음이 갈가리 찢어질 것이다. 억장이 무너져서 제대로 울지도 못하리라. 마리아와 예수의 종교적 스토리를 통해 ‘피에타’는 자녀를 먼저 보내야 했던 부모의 비통한 마음을 예술적으로 승화시켜 표현했다.

고교 시절에 급우의 장례식에 갔었다. 반세기가 지난 지금도 어머니의 처참한 울부짖음이 귓가에 남아 있다. 황순원의 단편소설 <소나기>에서는 자녀가 부모보다 먼저 떠나는 일을 악상이라 했다.

소설가 박완서도 그의 아들 ‘원태’를 보내고 나서는 며칠 참던 “통곡이 치받쳤다” 한다. 자녀를 먼저 보낼 때 나타나는 부모의 ‘발작적인 설움’과 황망함은 다 비슷하리라. 심지어 개그우먼 박지선의 어머니는 딸을 혼자 보낼 수 없다면서 함께 세상을 떠났다.

서울대생 박종철 군이 1987년 1월 14일 용산 대공분실에서 물고문을 당하다가 사망했다. 그를 보내는 부모의 비통한 심정이 언론을 통해 전해졌다. “철아 잘 가 그래이. 아부지는 아무 할 말이 없데이. 네가 죽은 것은 네가 너무 똑똑하기 때문이야.”

언론을 통해 박 군 아버지의 이 말이 전해졌을 때 “제5공화국은 종 쳤다”는 표현이 인구에 회자됐다. 수도권의 언론사에는 ‘우리 아들 살려내라’는 전국 어머니들의 전화가 빗발쳤다. 인간이라면 누구나 공유할 수 있는 감정이입이다.

예수가 인류의 죄를 짊어지고 십자가에 못 박혀 피를 흘리며 죽기 직전에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라고 외쳤을 때 마리아의 마음은 어땠을까. 예수의 이 마지막 외침을 마태복음은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로 번역해 적고 있다. 또 요한복음 19장에는 “내가 목마르다” 한 후 “‘다 이루었다’ 하시고 머리를 숙이시고 영혼이 돌아가시니라”고 적혀 있다. 예수를 보내야 했던 성모의 마음도 다른 범부의 마음과 같았으리라.

코로나 19가 확산하기 전인 지난해 여름부터 금년 초까지 스페인의 마드리드를 시작으로 바르셀로나를 거쳐 로마와 피렌체, 그리고 알래스카와 시애틀, 그리고 에티오피아의 수도인 아디스아바바와 그 주변 도시를 여행했다.

지중해 연안국가인 스페인과 이탈리아 그리고 에티오피아를 관광하면서 이들 국가가 기독교 문화권에 속한다는 사실을 실감했다. 그들의 삶과 문화유적 속에서 예수의 생애에 대한 그림과 조각을 수없이 발견했다. 이 중 특별히 눈에 띈 것이 피에타였다. 지금부터는 지중해 연안에 산재한 피에타를 살펴보자.

인류에 회자되는 대표적인 피에타는 뭐니 뭐니 해도 로마의 베드로 성당에서 본 청년 미켈란젤로의 조각품이다. 인간이 대리석의 원재료인 화강암을 깎아서 그러한 작품을 남길 수 있다는 게 과연 가능할까라는 의문이 전문가들의 평가이다.

이 피에타를 봤을 때 예술적 감수성이 부족해서인지 그렇게 어마어마한 감동을 느끼지는 못했다. 다만 방탄유리로 둘러싸인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조각품을 직접 봤다는 사실에서 만족감을 얻었다. 이것을 제대로 느끼기 위해서는 아마도 그 앞에서 하루종일 봤어야 했을 것이다. 

▲ 미켈란젤로의 피에타

실제로 프로이트는 19세기 말 로마 여행 중 산 피에트로 인 빈콜리 성당에 있는 미켈란젤로의 모세 상을 보고 그 이미지를 잊지 못했다. 수년 후 다시 그곳을 찾아서 3주간이나 이 조각품만을 관찰했다고 한다.

모세가 타락한 백성을 향해 분노를 억눌렀듯이 프로이트는 아들러를 포함해 반기를 드는 제자들에 대한 분노를 참아내는 자신의 모습을 모세상에 감정이입시켰다. 노후에는 그때의 영감을 정신분석학적으로 서술한 <모세와 유일신(Moses and Monotheism)>이라는 책을 출판했다.

▲ 미켈란젤로의 모세상

두 번째로 눈에 들어온 피에타는 전몰자의 계곡 위에 있었다. 스페인 내전에서 죽은 4만 명의 군인이 계곡에 묻혔다. 이 피에타는 그들을 위로하는 듯이 보였다. 누구의 작품인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필자에게는 이 피에타가 매우 인상적이었다. 앞이 확 트인 광장 위로 예수와 마리아의 얼굴이 클로즈업 됐는데 예수의 고통과 마리아의 비통함이 고색창연한 모습으로 잘 나타난다.

▲ 전몰자 계곡의 피에타

세 번째는 스페인의 세고비아 성모 마리아 대성당에 놓여 있는 피에타였다. 오히려 이 피에타는 여러 여인과 성인에게 둘러싸여 있어 나름대로 화려함마저 느낄 수 있었다.

그리고 에티오피아 바흐 다르 지역의 타나 호수에 갔는데 그곳에 외딴 섬이 하나 있다. 기독교 정교의 유적지다. 이곳에 예수의 생애사가 양탄자에 화려한 물감으로 잘 그려져 보관돼 있다. 이곳 피에타 그림에는 예수가 하얀 담요로 싸여있는 모습과 함께 얼굴 위로 광채가 나는 성모의 모습이 그려져 있다.

▲ 세고비아 피에타(왼쪽)와 타나 호수 섬의 피에타

미켈란젤로는 여러 피에타를 그렸다. 청년이었을 때 선보인 조각품이 베드로 성당의 피에타다. 이 조각품에만 그의 이름이 들어간 ‘미켈란젤로 보나로투스 플로렌티누스 파치에바트’라는 서명이 새겨졌다.

그가 88세에 남긴 최후의 걸작은 론다니니 피에타다. 밀라노의 스포르자 성에 전시됐다. 유민호 퍼시픽21 소장은 “형상을 보면 마리아가 예수를 보듬는 것이 아니라 숨진 예수가 거꾸로 마리아를 업고 있는” 이미지라 한다.

그에 따르면 바티칸의 피에타는 대리석 조각의 기본인 삼각형 구도이다. 하지만 론다니니 피에타는 ‘죽음을 대하는 속(俗)에서의 인간 고통과 슬픔'의 활 모양 비대칭 구도다.

▲ 론다니니 피에타

다양한 피에타의 모습은 르부르 박물관이 소장한 15세기 르네상스 화가 게르 카르통과 19세기 낭만파의 거장인 들라크르아의 명화에도 남아 있다. 이러한 그림은 예수가 죽은 후 마리아의 무릎 위에 눕혀진 상황을 묘사했다. 따라서 당시 십자가가 세워졌던 예루살렘 골고다 언덕 바위에 지은 성분묘(Holy Sepulchre) 교회를 찾을 만하다.

이어지는 여행기에서는 코로나 팬데믹 이전에 다녀온, 가깝고도 먼 나라 일본과 중국의 명소를 소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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