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K대학교 이모군(21세)은 고등학교 동창들과의 약속을 앞두고 5시간째 PC방에 앉아있다. On-line게임 스타크래프트에 빠져서 요즘은 거의 매일 PC방에 출입하고 있는 이군은 친구들과 만나서 소주방에서 흥을 돋군 후 곧 노래방으로 들어갔다. 최신가요부터 뽕짝 트로트까지 신나게 부르고서 노래방을 나선 그는 다시 PC방으로 향한다. 또 다른 약속이 잡혀있기 때문이다. 이미 밤 12시를 넘어선 시각이지만 먼저 와서 한창 게임에 몰두해 있던 친구들과 함께 그도 곧 컴퓨터 앞에 앉아 게임 속으로 빠져들기 시작했다.

PC방, 소주방, 노래방을 거쳐 다시 PC방으로 돌아온 이군의 하루는 온갖 '방(房)'에서  이루어진다. 또 항상 사람들과 함께 모여서 다니는 그가 혼자 그 '방'에 가는 일은 결코 없다. "함께 즐겨야 재밌잖아요. 혼자서 무슨 청승이에요?" 이렇게 '방(房)' 일색인 대학생들의 오락문화는 일부러 의도한 것이 아니다. 발길이 저절로 방에서 방으로 이어지는 것뿐. 한국인의 생활 속에서 가족 구성원들과 함께 지내던 집안의 '방' 대신 가족 아닌 다른 사람들과 함께 어울려 지내는 집밖의 탈가족적인 '방'문화가 익숙해진 것은 그리 새삼스러운 일이 아니다. 또한 이러한 '방'의 문화가 대학생들만의 문화도 아니다. 그 '방'의 매력이 무엇이기에 한국인은 밤마다 방으로 방으로 찾아드는 것일까?

"노래방으로 가자"

1990년대 초반 이후, 노래방은 전국민의 놀이터가 되었다. 도심에서 벗어난 한적한 주택단지의 곳곳에서도 노래방 간판은 쉽게 눈에 띈다. 이렇게 여기저기 산재해 있는 노래방은 원래 일본에서의 가라오케가 한국식으로 변형된 것. 일본의 가라오케는 혼자 무대에 나가서 노래를 부르며 스트레스를 해소하거나, 여러 사람들과 함께 가라오케에 가서 남들은 술을 마시더라도 혼자 무대에 서서 노래를 부르는 형태이지만 한국의 노래방은 자그마한 방안에서 사람들과 함께 춤도 추고, 노래도 부르는 오락의 방이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한국의 노래방은 일본에서 입양해 온 반쪽짜리 한국문화라기 보다는 한국태생의 완전한 한국문화로 자리를 잡았다.

노래방에 준비된 각종 장르의 노래들은 전국민의 노래방 출입화를 부추긴 요인이다. 일본의 가라오케는 성인을 대상으로 하여 음주까지도 허용한 성인용 오락문화의 선두주자이다. 반면에 한국의 노래방은 어린이들이 좋아하는 TV만화 주제곡과 동요에서부터 최신 대중가요는 물론이고, 흘러간 옛노래, 전통민요, 팝송, 그리고 심지어 가곡까지도 갖추고 있기 때문에 어린이부터 노인에 이르는 전세대가 함께 나눌 수 있는 대중화된 오락문화를 주도하고 있다. "애들이랑 노래방에 함께 가도 애들이 부를만한 노래가 있으니까 가족끼리 외식하고 나서 함께 가게 되죠. 애들도 좋아하구요" 가정주부 허미영씨(38세)의 말이다.

이렇게 노래방이 대중화된 것은 한국 특유의 집단주의 때문이라는 해석이 지배적이다. 사람들이 노래방을 찾는 이유는 단순히 노래를 부르기 위한 것 보다 다른 사람들과 함께 노래도 부르고 춤도 추어가며 오락의 시간을 공유하기 위함이 더 크다. 다른 사람과 함께 공유하는 그 시간이 좋아서 노래방 단지 노래 연습을 하기 위해서, 혹은 노래 부르는 것이 좋아서 노래방에 가는 것이라면 차라리 집에 노래방 기계를 설치하는 편이 더 낫겠지만 다른 사람과 공유하는 그 시간이 좋기 때문에 사람들은 노래방에 간다.

원조는 '혼자서'였지만 한국에서는 '혼자서'를 용납하지 않는다. 다같이, 함께, 우리 모두이다. 노래방은 다같이 놀면서 분위기에 취하는 한국식의 '다같이문화'를 가장 잘 반영하고 있는 방(房)이다

"나 지금 접속한다!"

전세계가 주목하고 있는 인터넷 열풍국 한국에는 뭔가 특별한 것이 있다. 현재 전국적으로 무려 1만여 개가 넘는 PC방이 그것이다. PC방이 처음 등장했을 때에는 문서편집 작업이나간단한 인터넷 사용, 또는 채팅을 하기위해 PC방을 찾는 사람들이 대부분이었다. 그러나 인터넷 전용선을 이용한 On-line 게임이 등장하면서 PC방은 밤이 깊어갈 수록 <스타크래프트>, <포트리스>, <바람의 나라>, <리니지>, <디아블로2>같은 On-line 게임을 즐기는 올빼미족 게이머들로 전좌석이 완전 매진된다.

지난 7월 유니텔에서 실시한 통계에 따르면 초고속 통신망을 사용하는 네티즌들이 이미 전체 네티즌의 60%에 이른다고 한다. 이렇게 초고속 통신망의 보급률이 급속도로 빨라지고 있어 집에서도 On-line 게임을 충분히 즐길 수 있지만 매니아들은 PC방을 찾는다. 집에서 혼자 하는 게임보다 친구들과 함께하는 On-line 게임을 즐기기 때문이다.

Y대의 정신유군(20세)에게는 PC방에서 스타크래프트를 함께 즐기는 고정 멤버 친구들이 있다. "단골로 가는 PC방에서 주로 하죠. 서비스가 좋거든요. 같이 게임하는 애들이랑은 게임하면서 먹을거리도 함께 해결해요. 게임이 시작되면 또다시 게임 안에서 만나구요" 이들에게 PC방은 동고동락하는 게임 생활의 장(場)이다. "나 지금 겜 들어간다"라는 말 한마디로 게임 시작. 바로 옆자리에 나란히 앉아서 소리질러 가며 공격과 방어 작전을 펼치는 이들에게 PC방은 게임의 즐거움을 배가시켜 주는 곳이다.

이처럼 PC방이 제공하는 On-line 게임은 결코 현실과 무관하지 않다. 그러므로 멋모르고 혼자 들어온 초보 게이머들은 게임 안에서 오래 살아남을 수 없다. 인터넷 On-line 게임에서도 '혼자'라고 "찍히면 죽는다." 이런 초보자들도 현실에서이든, 게임 속에서이든 어느 한집단에 끼어야만 게임에서 살아남을 수 있다는 것을 깨닫는 데에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는다.

이제 혼자 게임을 하면서 높아지는 승률에 기뻐하던 때는 지났다. 한국에서의 On-line 게임은 나홀로 게임이 아니라 '함께하는 On-line 게임'이다. 한국식 PC '방(房)' 덕분에.

뜨끈뜨끈한 현대판 사랑방

노래방이나 PC방과 더불어 한국식 집단주의적 오락문화가 잘 드러나는 곳이 찜질방이다.찜질방을 찾는 사람들은 대부분 누군가와 함께 가고 싶어한다. 찜질방 안의 후끈후끈한 공기 속에서 혼자 3∼4시간을 버티기란 여간 지루한 게 아니기 때문이다. 이렇게 함께 온 사람들로 북적대는 찜질방 안은 화기애애한 분위기다. 친구들과 함께 온 중년 여성들, 부부동반 모임에서 온 4∼50대 중년들, 나란히 누워 있는 60대 노부부, 온 가족이 함께 온 사람들 등 다들 일행이 있는 손님들이다. 게다가 주황색 불빛, 황토색 흙벽, 짚으로 만든 멍석이 깔린 바닥, 돗자리가 깔린 바닥은 포근함을 더한다. 찜질도 하고 사람들과 함께 즐길 수 있는 조건은 다 갖춘 셈.

초등학교 교사인 배효순씨(46세)는 직장생활 때문에 피곤한 몸을 위해서, 그리고 평소에는 시간을 내서 만나기 힘들었던 친구들과 만나기 위해 찜질방에 가곤한다. "다들 직장생활을 하기 때문에 피곤한 사람들이거든요. 그래서 다음번 모임은 아예 찜질방에서 할까 하고 생각 중입니다" 배씨와 같은 직장여성의 경우 찜질방에서 일석이조의 효과를 맛볼 수 있다.

이처럼 한국의 찜질방은 단순히 찜질만 하는 곳이 아니다. 사람들과 함께 즐길 수 있는 유료 사랑방인 셈이다. 사실 많은 사람들이 몰려드는 찜질방의 진짜 인기비결은 사랑방으로서 이용자의 구미가 당기도록 잘 되어있는 곳이다. 그래서 대부분의 찜질방이 간단한 식사를 하거나 음료수를 먹을 수 있는 시설과 고객전용 주차장을 갖추고 있다.

찜질방에 오면서 동시에 휴양지에 온 것과 같은 기분을 느낄 수 있게 한 곳도 있다. 전남 순천의 D찜질방은 도심을 빠져나와 50분쯤 차를 타고 나가야하는 호숫가에 자리잡고 있다.그렇지만 이곳까지 찾아오는 사람들의 발길은 끊이지 않는다. "주택가 여기저기에 널려있는 목욕탕과는 차별화를 두려고 했다"는 주인 서동우씨(41세)의 전략이 효과를 보고 있는 요즘이다.

결국 한국의 찜질방 문화는 건강 노이로제에 걸린 대중, 사람들과 함께 있고 싶어하는 집단주의에 빠진 대중을 꿰뚫어본 찜질방 업주들의 장삿속이 아닐까?

Made In Korea

노래방과 PC방, 그리고 찜질방까지. 한국식 집단주의와 오락성이 결합한 대표적인 오락문화시설들이다. 집에 있는 컴퓨터에 '옥소리 노래방' 프로그램을 깔아놓는 것은 소용없다. 사람들은 집밖에서도 화려한 무지개빛 조명 아래에서 사람들과 '함께' 즐길 수 있는 노래방으로 간다. 그리고 초고속 통신망이 깔려있는 집안에서 하는 On-line 게임보다 PC방에서 사람들과 '함께' On-line에 접속하는 것이 더 좋다는 한국의 게이머다. 또한 사람들은 이제 더 이상 남·여탕으로 구분된 목욕탕 한켠에 붙어있는 사우나실에서 만나지 않고 모두가 '함께' 즐길 수 있는 따끈따끈한 찜질방에서 모인다. 이처럼 한국인의 오락문화에서는 현대인의 원자화라는 사회학 이론이 적용되지 않는다.


방(房)이 주는 집단에 대한 소속감이나 친밀함에서 나아가 사회적 유대감, 공동체 의식으로 발전할 수 있는 'Made In Korea 방문화'를 기대하는 것이 아직은 무리일까?

박수련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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