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화여자대학교 교수 최선열

우리나라 사람들은 유난히도 등수에 민감하다. 어려서부터 몇등을 해야 한다, 몇등 안에 들어야 한다는 압박감 속에서 자랐기 때문에 성적순을 싫어하면서도 세상을 등수 매김으로 보는 모순을 보여준다.


성적순이 어디 학교 공부뿐인가. 가요순위, 텔레비전 시청률, 기업의 매출순위에서부터 대학, 학과의 위상까지도 등수를 매긴다. 경제발전으로 우리 기업이 세계시장에 진출한 뒤부터 우리는 세계 몇 위인가에 신경을 곤두세워왔다. 예나 지금이나 일본과 북한에 대한  경쟁심이 세계 속의 한국 성적표에 신경을 쓰도록 만들었다. 모든 면에서 그들을 이겨내기 위하여 속된 말로 악을 썼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물론 이런 경쟁심과 성취욕구  때문에 이만큼의 경제성장을 이루었음을 부인할 수는 없을 것이다.


대형사건들과 천재지변으로 유난히도 큰 뉴스들이 많았던 7, 8월 동안 필자와 같이 신문을 샅샅이 살피는 독자들은 몇 가지 흥미있는 통계자료 기사들을 발견했을 것이다. 그 통계치들은 작은 기사 속에서 개별적으로 짧게 다루어졌기 때문에 눈에 잘 띄지도 않았을 뿐만 아니라 종합적인 보도가 없었기 때문에 그 의미를 심각하게 생각해본 사람들도 많지 않았으리라 생각된다. 사실 이 통계치들을 한데 모아 놓고 보면 새삼 우리 사회의 일그러진 모습이 드러나게 된다.


간암사망률 세계1위, 교통사고 사망자(1000명당) 2위, 인구밀도 세계 3위. 우리가 세계 3위안에 든 것들이다. 왜 이렇게 나쁜 항목에서 상위를 차지하는지 정말 부끄럽고 한심하다. 더 복잡한 지수 접근(index approach)을 통해 본 평가도 부끄럽기 짝이 없다. 성별권한척도 78위, 언론자유 50위, 투명성 또는 도덕성(부패정도의 반대) 43위, 어린이 위험도 26위.

유엔개발계획(UNDP)이 올해 세계 174개국을 대상으로 국민의 평균 수명과 교육수준, 생활수준(1인당 국내총생산액)을 조사해서 만든 인간개발지수의 순위는 작년과 마찬가지로 30위라고 한다. 교육열이 높다보니 인간개발지수는 높게 나오게 되어있다. 그러나 여성의 의원직, 고위관리직, 기술전문직 진출도를 토대로 한 성별권한척도 순위에서는 인간개발지수 30위인 국가가 하위권인 78위로 추락한다. 이 순위의 차이는  우리사회의 성차별의 실상을 극명하게 보여주는 것이다.


미국의 인권단체인 프리덤 하우스의 <99년 세계 언론자유 지도>에는 우리나라의 언론자유 수준이 193개국 중 50위로 나와있다. 언론자유가 가장 완벽하게 보장되는 0점과 가장 탄압이 심한 100점 사이에서 한국은 28점을 받아 '자유로운 국가'군에 겨우 턱걸이로 들어갔다. 북한은 완전한 언론통제 국가로 평가되어 언론탄압점수 100점 만점을 받았다.


국제 투명성기구가 측정한 우리나라의 부패수준은 투명성(도덕성)이 높은 순서로 꼽으면 85개국중 43위라고 한다. 싱가포르 7위, 홍콩 16위, 일본 25위, 대만 29위 임을 고려해볼 때 우리가 경쟁상대로 여겨온 아시아 국가들과 비교해도 부패정도가 심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어린이가 18세가 될 때까지 겪는 위험을 수치화한 UNICEF의 어린이 위험도에서는 143개국 중 26위이다. 영아사망률, 체중미달아 비율 등 영양과 기초 보건 복지를 근거로 한 척도라는 점에서 이 위험도는 경제상태를 반영한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씨랜드 화재사건으로 수많은 어린이들이 억울하게 희생된 점을 생각할 때 우리나라 어린이들의 위험도를 UNICEF의 어린이 위험도 지수로 측정하는데는 한계가 있음을 알 수 있다.
 
IMF사태로 인해 1인당 국민소득이나 산업 경쟁력이 약화된 것은 사실이나 경제만을 보면 우리의 성적표는 괜찮은 편이다. 세계 총 면적의 0.07%밖에 되지 않는 작은 나라에 세계 26위의 인구가 밀집되어 있는 열악한 상황에서 쌀 생산량 세계 12위, 철강, 자동차, 조선산업에서는 줄곧 5등안에 들었다는 것은 대단한 저력이 아닐 수 없다. 세계경제포럼이 정부 규제, 하이테크, 노동조건 등 8개 기준에 따라 59개 국가를 비교 분석한 결과 우리나라의 산업 경쟁력은 59개국 중 22위라고 한다. 물론 스위스 국제경영개발원(IMD)은 우리나라 국가 경쟁력 순위가 95년 26위, 96년 27위, 97년 30위, 98년 35위, 99년 38위로 계속 밀려나고 있다고 경고하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인구 10만명 당 고등 교육기관 학생 수가 미국과 어깨를 겨룰 정도로 최상위수준이며 컴퓨터 보급률, 유무선 통신 사용률 등을 기준으로 한 정보화 수준이 23위라는 것은 산업 경쟁력에 있어서는 여전히 잠재력이 있음을 보여준다고 하겠다.

여러 나라들의 성적을 비교해보면 줄곧 좋은 성적을 보여주는 나라들은 노르웨이, 덴마크, 스웨덴을 포함한 북구의 복지국가들과 미국, 유럽 등 잘 사는 나라들임을 알 수 있다. 모든 과목에서 고르게 일관성 있는 좋은 성적을 보여주는 이 나라들은 복지수준이 높고, 여성에 대한 차별이 거의 없으며, 부패가 적은 투명한 사회라는 특징을 보여준다. 국민을 위한 정치가 어떤 것인지를 잘 보여주는 정치선진국들이다.
 
되풀이되는 홍수로 고통 받는 수재민들, 씨랜드에서 참혹하게 죽은 어린이들, 수갑을 차게 된 화려했던 정치인들, 마치 한편의 딜레마 연극을 보고 있는 듯한 착각을 일으키게 했던 옷로비 청문회의 여인들을 보면서 우리의 천방지축 성적표가 새삼  떠오른다. 제각기 다른 상황에 처한 것 같은 이들이 투명성 순위 43위 이 나라에서는 부패의 먹이 사슬로 인해 서로 연결될 수 있을 것이라는 참담한 생각을 하게 된다.  이쯤 되면 행복이 성적순이 아니라고 우기기도 힘든 것 같다. 물론 성적이 좋은 나라 사람들 모두가 다 행복한 것은 아니겠지만 적어도 불행한 사건들이 이처럼  이어지지는 않을 테니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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