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마항쟁은 (5·16) 쿠데타 이후 20년 가까이 숨죽여 산 국민에게 1980년 5·18과 1987년의 민주화 운동을 전개할 수 있는 의식과 경험, 역량을 심어준 사건이다. 한국 현대사의 4대 민주주의 운동에 꼽히는 이유다.”

국제신문 기획탐사부 신심범 기자는 <스토리오브서울>과의 인터뷰에서 부마항쟁 의의를 이렇게 강조했다. 특별취재팀에는 김화영 박호걸 이준영 김해정 신심범 임동우 기자가 참여했다.

▲ 국제신문 특별취재팀

신 기자는 “부마항쟁이 저평가되고 있었다”고 했다. 부마항쟁은 유신체제 종식의 방아쇠를 당겼다. 대학생 주도로 1979년 10월 16일 시작된 시위가 노동자와 상인 등 5만여 명이 참여한 민중항쟁으로 발전했다. 시민은 유신철폐와 독재타도를 외쳤다.

성난 민심에 권력은 위기감을 느꼈다. 미국 중앙정보국(CIA) 기밀문서에 따르면 박정희 대통령은 계엄군에 하사금 1억5000만 원을 전달하는 등 무력진압을 지원했다. 철옹성 같던 유신체제 시절, 국민과 권력의 갈등이 수면 위로 드러나면서 한국 현대사를 뒤흔들었다.

그러나 부마항쟁은 역사적 의의에 비해 초라한 대접을 받았다. 국제신문의 2018년 8월 설문조사에 따르면 부마항쟁이 부산대에서 시작됐음을 아는 학생은 10%에 불과했다. 항쟁 40주기인 지난해에야 국가기념일로 지정됐다.

신 기자는 “박근혜 대통령이 취임하고 부마항쟁진상조사위원회가 꾸려졌다. 그런데 위원회는 국가기관의 시각에서 항쟁을 해석했다”고 말했다.

10·16부마항쟁연구소의 정광민 씨는 <스토리오브서울> 인터뷰에서 “위원회의 보고서 작성이 부실하고 편향됐었다”고 말했다. 그는 부산대 시위를 주도했던 학생 중 한 명이다.

특별취재팀은 항쟁의 역사를 다시 쓰리고 했다. 김화영 기자는 “(기존의) 부마항쟁 보고서는 경찰 진술조서 위주로 작성됐었다. 일반인의 목소리를 제대로 짚어보자는 취지에서 기획을 시작했다”고 말했다.

▲ 국군보안사령부의 부마항쟁 상황보고 문서(출처=국제신문)

시리즈는 2018년 8월 30일에 시작, 지난해 10월 8일까지 이어졌다. 1부는 김화영 박호걸 이준영 김해정 기자가 담당했다. 항쟁을 경험한 평범한 시민의 목소리에 주목하고 국가기념일로 지정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2부는 신심범 임동우 기자가 썼다. 부마항쟁이 이후 일어난 민주화 운동의 발판 역할을 했음을 강조했다. 이 과정에서 취재팀은 국군기무사령부의 기밀문서를 입수해서 보도했다.

증언으로만 존재하던 편의대(사복 차림의 군 작전조) 실체, 가스살포기와 화염방사기를 실은 수경사 헬기의 준비과정을 알렸다. 부마항쟁과 5·18민주화운동의 진압과정이 유사했다는 사실도 알려졌다.

취재팀은 진압과정에서 피해를 당한 시민 이야기를 전달했다. 이들에게 40년 전의 기억은 여전히 상처였다. 신 기자는 “그때 일을 떠올리고 싶지 않다는 피해자들이 더러 있었다. 괜한 트라우마를 상기시켰다는 생각이 덩달아 우울해졌던 기억이 난다”고 했다.

피해자의 구술증언은 여전히 부족하다. 항쟁에 5만여 명이 참여했지만 지금까지 300여 명만이 증언했다. 부마민주항쟁기념재단의 보고서에 따르면 응답자 600명 중 78.9%가 피해신고 접수사실을 몰랐다.

신 기자는 “시간이 더 흐르기 전에 반드시 사실 여부를 가려야 한다”고 말했다. 군과 검찰의 정보보고에는 부산시청 앞에서 탱크가 택시를 깔아뭉개 탑승자가 숨졌다는 내용도 있다. 당시 탱크를 몰았던 장병의 이름도 기록돼 있지만 아직까지 접촉하지 못했다고 한다.

부마민주항쟁기념재단의 정광민 이사장은 “(국제신문 보도가) 그동안 알려지지 않은 부마항쟁의 한 부분을 드러냈다. 새로운 각도에서 본다면 새로운 문제의식이 나올 수 있는데 특히 사회경제적인 맥락을 살펴야 한다”고 후속연구의 필요성을 강조했다.

 

 

 

 

저작권자 © 스토리오브서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