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광수 에세이 <자유에의 용기>

어느 깊은 밤, 검고 긴 차에서 내린 검은 머리의 남자가 주의를 살피며 X호텔로 들어간다. 주위에 아무도 없음을 확인한 그는 긴 호흡을 하고 호텔 안으로 들어간다. 그 때 모자를 꾹 눌러 쓴 노랑머리 남자가 그 앞을 지나간다. 검은머리의 남자는 흘끗 쳐다볼 뿐 별 관심없이 몸을 돌려 다시 호텔로 들어간다. 노랑머리는 그의 가슴에 번쩍이는 뺏지를 본다. TV에서 자주 본 국회의원 금뺏지다. 이 밤 중에도 높은 분들은 할 일이 많은가 보다.
 
며칠 전 노랑머리는 그의 머리가 "보통인의 선량한 도덕관념에 반한다"는 죄명으로 경찰서에 잡혀갔다. 경찰은 삭발을 강요했지만 차마 그는 머리를 자를 수가 없었다. 그래서 항상 모자를 꾹 눌러 쓰고 다녔다. 노랑머리를 자르지 않은 채. 다음날 그는 길을 가다 유난히 큰 목소리를 듣는다. "여러분의 바르고 정직한 일꾼으로 개방 사회를 지향하고 국민의 자유와 인권을 존중하고…." 꽤나 똑똑하고 정직한 목소리다. 하지만 믿지 않는다. 한두 번 속아보나.

노랑머리는 개방사회에 걸맞게 몇 편의 소설을 쓴다. 하지만 청소년에게 유해하고 국민의 정서에 반하다는 추상적인 방침으로 인해 콩밥 신세를 진다. 노랑머리는 생각한다. 개인의 자유가 억압된 한국에서 살기는 정말 힘이 들다고. 하지만 절대로 노랑머리는 자르지 않겠다고.

마광수. 그는 이미 오래 전부터 노랑머리로 세상에 도전장을 던졌다. 그의 머리는 나오는 순간부터 많은 사람의 관심과 비난의 대상이 되었고, 그의 머리에 대한 찬·반의 의견 대립 속에 그는 결국 강력한 힘을 가진 검은머리의 남자들에 의해 붙잡혀 갔다. 국민의 자유를 지키겠노라고 외쳤던 사람들이 생각하는 자유라는 건 무엇일까. 표현의 자유는 개인의 자유가 아닌 집단의 부속물이란 말인가. 집단의 정서에 맞으면 자유로 인정되고 그렇지 않으면 방종이란 이름으로 책임을 물어야 하는가. 노랑머리는 이해가 안 간다. 혼란스럽다. 그 자유라는 추상적 단어는 도대체 누구의 자유를 말하는 것인가?
 
그는 미지근한 자유를 거부한다. 구태의연한 조선조식 윤리관에 의해 억압되는 자유를 되찾으려고 한다. 그는 「자유에의 용기」를 통해 당당한 자유의 의미와 가치 그리고 개개인의 창의성과 개성을 무참하게 꺾어 버리는 우리 사회의 획일주의적 사고방식을 신랄하게 비판한다.

만약 그가 성문제만 다루고 성의 자유만을 주장한다면 정말로 그는 변태 성욕자로 낙인 찍힐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성문제만을 다루지 않는다. 성문제를 우리의 당당한 자유 중에 한 요소로 포함시키고 우리 사회 전반의 억압된 자유의 회생을 갈구한다. 본인 자신도 참된 자유주의자가 되기 위해 노력한다고 이 글 서문에 밝히고 있다.

그는 쾌락이 행복의 중요한 요건이라 말하며 그 중 성적 쾌락을 최우선한다. 이 말을 듣고 심한 거부감을 갖는 사람이 있을 것이다. 하지만 생각해 보라. 쾌락이 어째서 나쁘다는 건가. 쾌락은 고통과 반대되는 개념으로 그야말로 즐겁고 기분이 좋은 상태를 말한다. 그중 성적 쾌락은 우리의 유교주의적 관습에 의해 쉬쉬되고 있을 뿐 쾌락의 중요한 요건이다. 하지만 너무 감추고 억압하다보니, 퇴폐적이고 음습한 형태로 이뤄져 오히려 사회적 문제로 확산되는 경우가 많다. 문제가 되고 있는 포르노 비디오같은 경우 아무리 막으려고 그물 수사를 해도 거의 통제가 되지 않고 있다.

이런 판국에 책의 내용이 국민들의 정서에 맞지 않다고 하여, 아예 출판을 금하는 우리의 사회는 개인의 표현의 자유를 막고 국민들의 행복 추구권을 박탈하는 심각한 우려를 낳고 있다고 그는 말한다. 또한 소수의 엘리트만이 고가의 문화적 사치와 욕망의 배설이 허용되는 우리 사회를 비판한다. 그들은 하루에 일반 서민의 한 달 월급을 쾌락을 위해 낭비하며 대중들에게는 대중적 사치를 자제하고 열심히 일하고 윤리적이고 정직하게 살기만을 강요한다.  이들은 이런 관료주의적 악습을 대중에게 강요하고 대중의 건강한 욕구와 여가선용의 욕구를 아예 지하로 감춰버린다. 대중의 가장 싸고 간편한 쾌락도구인 책의 통제 역시 이런 맥락에서 생각해 볼 수 있다.

마광수는 노래방이나 춤방을 대중적 쾌락을 풀어 주는 고마운 장소라고 말한다. 누구나 한 번쯤은 노래방이나 춤방에 가 보았을 것이다. 일상에 찌든 스트레스를 풀기에는 안성맞춤이다. 경제가 살아나면서 사람들은 차츰 여가에 관심을 가지게 되고 여러가지 여가 문화가 생긴다. 하지만 노래방이나 춤방 만큼 대중에게 친숙하고 경제적인 쾌락 장소가 어디 있는가. 그는 이런 대중적 장소가 늘어나는 것 자체를 선진화되고 있다고 말한다. 아마도 경제적 후진국에서는 이런 것 자체가 불가능하기 때문일 것이다. 

우리 사회의 권위적이고 파벌이기주의적 요소는 젊은 패기와 열의로 가득차야 할 학생운동이서도 볼 수 있다. 그는 학생운동이 너무 엘리트주의적 색채를 띄고 출세주의로 연결돼 가고 있다고 말한다. 이는 국회의원의 약 30% 정도가 운동권 출신인 점을 보면 어느 정도 생각해 볼 수 있다. 물론 노동자등과 같은 사회적 약층을 위해 평생을 헌신한 운동권 사람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들의 운동하는 형태를 보면 너무 정치적이다. 이들은 실상 학생들에게 가장 절실한 학교 내의 모순을 파헤치기보단 학교 밖의 모순을 해결하기 위해 골몰한다. 이들이 학생들의 지지를 못 받고 아웃사이더가 되는 것은 이런 이유에서이다. 학생운동이 해야 할 일은 대학을 '민주적 대학'으로 만드는 것이라고 그는 말한다. 교수와 학생의 자유로운 대화가 오가고 대다수 학생의 자유와 의견이 관철될 수 있는 그런 대학을 말이다.

그의 노랑머리는 금방 왔다 사라지는 유행과는 다르다. 그는 폐쇄적인 권위주의에 도전하며 당당한 자유를 되찾으려 한다. 자신의 노랑머리가 개인의 표현의 자유라는 떳떳한 권리를 갖기 위해 그는 몸부림친다. 검은머리의 이중적 도덕성에 반기를 들고 솔직한 도덕성이 자유의 영역을 판단하는 기준이 되기를 그는 간절히 바란다. 그의 이런 바램이 실천되기 위한 터전이 너무 모질다. 하지만 그 거친 땅을 뚫고 나오는 노랑색의 풀이 심상치 않다. 검은머리는 노랑머리를 긴장하라.

최상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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