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최=한국기자협회‧한국언론학회
주관=삼성언론재단
주제=70년 전 역사학자의 일기로 보는 한국전쟁– 김성칠의 ‘역사 앞에서’를 중심으로
일시=2019년 11월 4일 (월) 오후 7시~8시30분
장소=한국프레스센터 19층 기자회견장
강연=정병준 이화여대 사학과 교수

 

한국기자협회와 한국언론학회가 공동주최하고 삼성언론재단이 주관한 인문학 강좌가 11월 4일 오후 7시 서울 한국프레스센터 19층 기자회견장에서 열렸다. 주제는 ‘70년 전 역사학자의 일기로 보는 한국전쟁– 김성칠의 역사 앞에서를 중심으로’였다.

강연자인 정병준 이화여대 교수는 서울대 국사학과를 졸업하고 같은 대학원에서 석박사 학위를 받았다. 한국 현대사를 전공하면서 <몽양 여운형 평전>, <한국전쟁>이라는 책을 썼다.

특강에서 정 교수는 역사학자 김성칠의 생애와 작품을 정리하고 한국전쟁과 <역사 앞에서>의 의미를 설명했다. 김성칠은 한국전쟁의 경험을 일기에 담았는데 가족이 <역사 앞에서>라는 책으로 출간했고, 정 교수가 해제했다.

▲ 삼성언론재단의 인문학 특강 현장 (출처=삼성언론재단)

김성칠은 1913년에 태어나 1951년에 38세의 젊은 나이로 생을 마감했다. 10대에는 소년독립운동가, 20대에는 문필가, 30대에는 서울대 사학과 교수였다.

그는 1931년 동아일보 논문공모에서 <대팔주(大八洲) 재배경험>로 1등에 당선됐다 18세 소년의 글은 신문에 2회 연재됐다. 다음해에는 <농촌구체책 현상공모>에서 역시 1등으로 당선돼 9회 연재됐다. 동아일보 창간 15주년 논문공모에서도 1등을 해서 8회 연재됐다.

1938~1941년에는 조선금융조합연합회 이사를 지냈다. 금융조합은 조선농민을 수탈하는 기관이었는데 전문학교 이상을 졸업한 조선인이 선택할 수 있는 최고의 직장이었다. 이사 월급은 75원으로 당시 군수 월급과 같았다.

그는 글재주를 활용해서 금융조합 기관지에 왕성하게 투고했다. <금융조합>이라는 잡지를 타블로이판으로 냈다. 발행 부수가 11만~28만 부로 신문부수보다 많았다. 짧은 글을 여러 번 쓰면서 글의 파급력을 알았다고 한다.

김성칠은 1942년 경성제대 법문학부 사학과에 입학했다. 1946년 경성대 사학과 교수로 일하면서 <조선역사>를 출간했다. 6만 6000부가 팔려 해방 후 최초의 베스트셀러가 됐다.

다음해에는 서울대 사학과 전임강사가 됐다. 동양사를 가르치면서 연행사와 북학파를 연구하고 용비어천가 같은 고전을 번역했다.
 

▲ 정병준 교수가 한국전쟁과 <역사 앞에서>에 대해 강연하고 있다. (출처=삼성언론재단)

그는 매일 일기를 썼다. 주제와 소제목을 만들고 초고를 만든 뒤에 정리했다. 1945년 12월, 1946년 1~4월, 1950년의 1월과 6~12월, 1951년 3~4월 등 15개월 분량이 남았는데 가족이 <역사 앞에서>라는 이름으로 출간했다.

이 책은 한국전쟁의 기록적 가치가 높다는 평가를 받는다. 북한의 침공에서부터 1‧4후퇴(1950년 6~12월) 지역(서울, 정릉) 직업(서울대 교수) 사상(중도파, 회의하는 지성), 4인 가족의 가장이 겪은 내용을 담아서다.

일기에 기록된 한국전쟁 당시의 모습은 신문이나 후대의 연구와 일치하는 부분이 많다. 서울이 북한에 점령당한 상태에서 그는 북한의 침공이라고 표현했다. 역사학자로서 역사의 현장을 용기 있게 기록한 셈이다.

한국전쟁을 누가 시작했느냐는 학계에서 중요한 이슈였는데 아직도 북한에서는 지도부 몇몇을 제외하고는 남한의 북침으로 안다. 김성칠은 “우리 역사에 북침은 없다”고 일기에 썼다. 경험과 역사학자의 통찰력으로 판단한 결과라고 정 교수는 설명했다.

김성칠은 불안하고 불편한 태도로 전쟁을 대했다. 북한의 침공이 명백하지만 한국정부의 태도도 신뢰하기 어려웠다. 이승만 대통령의 이른 피난과 국무총리의 수원천도 발표 후 정정, 국방부의 해주점령설 보도, 한강교 폭파 등이 이유였다.

김성칠이 북한점령 시기에 목격한 상황은 참담했다. 북한군은 서울대병원 환자와 의료진 150~200명을 살해했다. 또 의용군을 강제모집해서 인민군 13사단의 80%는 남한출신이었다.

미군이 맹폭격을 할 때도 일반시민의 적개심은 별로 없고, 오히려 일종의 희망을 품는다고 김성칠은 기록했다. 애국가 부른 피난민을 인민군이 죽이자 “인민공화국 백성이 되어보고 모두들 대한민국을 뼈저리게 그리워”했다는 내용도 전한다.

정 교수는 김성칠의 주변 인물에 대해서도 설명했는데 특히 부인 이남덕을 실력이 뛰어난 그의 학문적 동반자로 높게 평가했다. 이남덕은 이화여전, 경성제대를 나온 초 엘리트였지만 쪽진 머리에 평범한 차림으로 다녔다.

질의응답 시간에 청중이 실패해서 잊히고, 의미를 되짚어봐야 아무도 관심을 갖지 않는 인물을 왜 찾아서 연구하는 지를 물었다. 정 교수는 이렇게 대답했다.

“역사에서 발현되지 못한 가능성이라는게 저는 있다고 봅니다. 역사를 선과 악, 승과 패로만 기억한다면 역사를 공부하거나 배우는 의미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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