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810121

태어나서 처음 맞는 설날, 차례를 지내고 남은 사브레가 다 떨어져간다. 명절에나 먹을 수 있는 고급 과자 사브레. 아껴 먹었는데도 하루가 다르게 가벼워지는 과자 상자를 품에 안고 슬픈 표정을 짓고 있었다. 가만히 세어보니 세 개가 남았다. 먹을까 말까 망설이는데 옆에서 신문을 보던 아빠가 하나를 집어가 버렸다.

"아빠아아! 나빠!"

"그래, 괜찮아. 너도 하나 먹어."

뭐가 괜찮다는 거야. 이렇게 되면 내가 절대적으로 불리하다. 아빠는 씹어먹지만 나는 갉아먹거나 빨아먹을 수밖에 없다. 세 개 쯤이야 금방 끝장날 게 뻔하다. 나는 상자를 가지고 엄마에게로 도망 가는 방법을 고려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아빠가 갑자기 놀란 소리를 냈다.

"태어난 지 57시간 밖에 안 된 애기가 살해됐다는데!"

"무슨 일이에요?"

소란스러운 분위기에 마루 밑 부엌에서 아침을 짓고 있던 엄마가 고개를 내밀었다.

"병원에서 애가 바뀌어서, 다른 사람 아기를 목을 졸라 죽였대."

"아니, 그럴 수가 있나?"

"간호사가 잘못 건네준 거라는데."

"세상에, 그럼 원래 부모는 어떻게 되는 거야. 애긴 왜 죽였대요?"                    

"…원래는 미혼모가 낳은 아기를 죽이려던 건데, 결혼 독촉을 받던 애아빠가 그랬다는군."

엄마 얼굴도 보기 전에 죽어버린 아기는 하늘나라로 돌아가서 잘 지낼 수 있을까. 엄마는 혀를 쯧쯧 차며 다시 부엌으로 돌아갔고, 신문을 다 읽은 아빠는 과자를 찾는 듯 두리번거렸다. 하지만 엄마 아빠가 불쌍한 아기 이야기를 하는 동안 내 손에 들린 마지막 사브레는 이미 흘러내린 침에 녹고 있었다. 승리!

# 19810525

"짠, 이것 봐. 뽀뽀뽀다!"

아침 아홉 시. 엄마가 자고 있는 나를 흔들어 깨우더니 텔레비전을 틀었다. 아침에는 아무 프로그램도 안 하는데 텔레비전은 왜 틀까. 뽀뽀뽀는 뭐지, 먹는 건가. 생각하고는 잠이 덜 깬 눈을 비비며 이불 위를 뒹굴었다. 잠을 깨려고 이불을 넘어 온 방안을 굴러다니기 시작했다. 문득 텔레비전에서 치직거리는 잡음이 아닌 정상적인 말소리가 흘러나왔다. 나는 깜짝 놀라서 고개를 들었다. 오옷! '0~5세 대상'이라고 써 붙인 듯한 유치한 주제가와 조악한 배경, 그리고 예쁜 진행자 언니와 인형옷을 뒤집어쓴 사람들. 이건 분명 나를 위한 프로그램이다.

"오늘부터 아침 방송이 하는 거야. 처음 보지?"

엄마는 지난 73년에 에너지 절약을 위해 중단되었던 아침 방송이 오늘부터 재개되는 거라며, 장래 위대한 방송인에게 자세한 설명을 해주셨다. 하지만 이미 입을 벌린 채 텔레비전에 정신을 빼앗겨 버린 나에게 제대로 들릴 리갉

"여덟 시에 일어나면 하나둘셋도 볼 수 있어."

아아… 아침잠이여, 안녕. 그 동안 즐거웠어. 이제는 너 대신 텔레비전이 내 아침을 장식하게 되겠구나.

# 19810729

엄마 화장대 위에는 엄마와 아빠의 결혼식 사진이 놓여 있다. 주례를 선 외할아버지와 엄마 아빠가 나란히 서 있는 사진이다. 결혼식 사진은 꽤 많이 있었지만 내가 나온 건 하나도 없었다. 왜 그런 건지 궁금했지만 사진을 가리키며 갸웃거리는 내 제스처를 엄마가 알아보질 못하니 대답도 듣지 못했다.

오늘따라 엄마가 결혼식 사진을 자주 쳐다보신다. 눈빛이 묘하다. 아침 신문을 봤을 때부터 그러셨는데, 저녁 뉴스에서 '세기의 결혼식'이라는 내용이 나올 때는 아주 부러워하는 표정이 되었다.

"어쩌면, 화려하기도 하지."

영국 왕자 찰스와 유치원 보모였다는 다이애너의 결혼식이었다. 결혼식 장면은 멋있었다. 천 명도 훨씬 넘을 것 같은 사람들이 모여 있었고, 둘이 함께 탄 마차도 예뻤다. 그러고보면 저 화장대 위의 사진과는 조금 비교가 되긴 한다. 하지만 내가 보기엔 우리 엄마가 세상에서 제일 예쁜걸!

# 19811130

"그 사람, 이제야 잡혔네!"

무릎을 치며 아빠가 탄성을 올렸다. 나와 나란히 앉아서 하나둘셋을 보고 있던 엄마가 고개를 돌렸다.

"누가 잡혔는데요?"

"그 있잖아, 작년 이맘때 윤상군 유괴 사건. 1년 17일 만에 잡힌 거래."

"아 그 사건! 드디어 잡았구나, 그렇게 신문 뉴스에서 떠들어대더니. 애는 무사한가, 범인이 누구래요?"

"아이는 유괴 다음 날 죽였고. 범인은… 중학교 체육 교사라는데, 이것 참."

엄마는 신문을 가져다가 읽기 시작했다. 흐음, 그 사건이라면 나도 기억한다. 소아마비에 걸린 남자애였는데, 가족들이 신문에 '범인에게 드리는 편지' 같은 것도 올리고 그랬다. 죽었구나. 어쩐지 씁쓸한 기분이 든다.

"그러고보면 올해는 살인 사건도 참 많았는데."

"지난 가을에는 여대생 피살 사건도 있었지, 무슨 소설처럼."

"올해 초엔 태어나자마자 목 졸려 죽은 애기도 있었구…"

여고 동창생 토막 살인 사건, 부부싸움하다가 아내를 살해한 이야기, 채무자가 채권자를 유인해서 살해하고 암매장한 사건, 종교에 미친 어머니가 세 딸을 자살시키고 자신은 자살에 실패해 살아남은 이야기, 빚독촉 하는 애인을 총으로 쏴죽이고 목을 베어 술독에 유기했다는 사건, … 헤유, 끝이 없었다.

"이런 엽기적인 사건이 아직은 뉴스 거리가 되는 게 그나마 다행인가."

"그러게, 이런 게 일상화되어 버리면 큰일이죠."

장담하는데, 십 년만 더 지나봐라. 토막 살인 암매장 사건 같은 건 시시해서 취급도 안 하게 될 거다. 웬만큼 큰 사건이 아니라면 말이지.

 

                                                                                                                조혜원 기자

저작권자 © 스토리오브서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